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6)화 (66/133)

평민 출신 황후

미렌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에는, 마리아가 옆을 지킨 채였다.

화들짝 놀란 미렌이 몸을 일으켰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선 이미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미렌에겐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정신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언제나 잠이 들면 다른 몸으로 깨어났기에 ‘시간이 사라졌다’는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 처음 그 감각을 느껴 본 것이다.

분명 눈을 감기 전엔 밤이었건만 어느새 아침이 되어 새가 울고 있었다.

“마리아, 지금, 지금이…… 아침인가?”

“예,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어젯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의원께서 과로라는 처방을 내리셨어요.”

“내가…… 정신을 잃어?”

“네? 네, 전하. 오랜만이라 많이 놀라셨군요.”

미렌 우드로서 어젯밤을 보낸 기억도 없었다. 미렌은 정말로, 처음으로 온전히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 감각이 놀라우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이제껏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던 미렌에겐 그것이 ‘죽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미렌 우드의 몸도 움직여 보고 싶었다.

“전하, 오늘이 개막식입니다. 정말 직접 참여하실 겁니까? 조금 더 쉬시는 편이…….”

흠칫 놀란 미렌이 마리아를 돌아봤다.

맞다. 오늘은 몇 년마다 돌아오는 축제의 개막식이었다.

그녀는 황후로서 백성들의 활기를 위해 수도 내를 마차로 한 바퀴 돌기로 했었다.

당장 준비를 시작해야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을 터다.

그러니 미렌 우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라앉은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안 돼.”

“라이언, 언제 오셨습니까?”

언제 들어왔는지 다가온 라이언이 미렌의 두 어깨를 잡고 다시금 앉혔다.

다리의 힘이 풀리듯 주저앉은 미렌이 라이언을 올려다봤다.

“당신, 당장 어제 과로로 쓰러졌어. 오늘은 이 방에서 나갈 생각 마.”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많습니다. 제가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어요.”

미렌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테룬 공국으로 인해 분위기가 뒤숭숭한 지금, 황후인 그녀가 백성들의 사기를 올려 주어야만 했다.

개막식의 축사를 하느라 바쁜 라이언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건강해진 황후의 모습을 보고 안심할 터였다.

대화의 합의점이 보이지 않자 결국 라이언의 속이 먼저 뒤틀렸다.

그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껏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런…….”

“라이언.”

“……미안해. 내가 실언했군.”

고개를 모로 돌린 라이언이 먼저 사과를 해 왔다. 그러나 이미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터라 사과 한마디로 분위기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미렌은 미렌대로, 라이언은 라이언대로 양보할 수 없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둘 모두 입을 다문 채 불편한 침묵이 오갈 때였다.

“전하,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 나서셔야 해요.”

어린 시녀의 보고에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라이언을 한번 바라봤다가, 끝내 그를 지나쳐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라이언만이 빈 침대를 멀거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

색소가 많이 빠진 백금발 머리가 화려하게 틀어 올려졌다.

미렌 에드가의 가냘픈 목선이 드러남과 동시에 너무 아파 보이지 않도록 생기 있는 화장이 덧그려졌다.

흰 레이스가 달린 장갑을 착용하고 가슴이 드러나지 않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자 제법 기품이 묻어났다.

노출이 거의 없는 대신 레이스로 풍성하게 꾸며 메마른 몸매도 가려졌다.

“너무 예쁘세요, 황후 전하.”

“목걸이는 전하의 눈 색과 같은 에메랄드로 할까요?”

치장을 마치는 동안 미렌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라이언의 생각을 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말린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또한 라이언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라이언은 태어났을 때부터 제왕학을 배웠다.

또한 비상한 머리는 물론 검술에도 뛰어난 두각을 보여 고귀한 태양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군주였다.

그러니 그는 알지 못한다.

아름답지도 못하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타고나지 못한 미렌이 그와 함께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라이언의 말처럼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당장은 행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끝이 있는 행복이었다.

미렌은 죽을 만큼 노력해야 라이언의 곁을 차지할 수 있는 범재였으므로.

“미안해요, 라이언.”

“네, 전하? 부르셨어요?”

“……아니. 축제가 곧 시작이던가?”

“예! 곧 있으면 마차가 도착할 거예요.”

똑똑.

치장을 완벽히 마무리하기 위해 분주한 시녀들 사이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미렌이 고갯짓하자 가장 어린 시녀 한 명이 문을 열어 주었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이올라오스? 그대가 이곳엔 어쩐 일입니까?”

“폐하께서 오늘 하루 황후 전하의 호위를 명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폐하께서도 개막식의 축사를 위해 나서실 텐데, 그럼 폐하의 호위는 누가 한단 말입니까?”

“부단장인 로이아 테넷 경이 도맡을 겁니다.”

미렌이 눈살을 찌푸렸다.

로이아 테넷이라면 그녀도 신뢰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올라오스와는 무위의 수준이 달랐다.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올라오스가 덤덤히 말했다.

“욕심을 부리셨을 때부터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

“욕심, 이라고요?”

“건강도 미처 회복하지 못하신 분이 무리한 일정을 감행하셨잖습니까. 그건 욕심입니다. 폐하께도, 아랫사람들에게도.”

치장을 마친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발에는 제법 굽이 높은 구두가 신겨져 있어서, 키가 큰 이올라오스와도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그녀가 이올라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저를 위한 직언입니까, 폐하를 위한 직언입니까?”

“……물론 폐하를 위한 직언입니다.”

“틀렸어요, 이올라오스 경.”

어느새 이올라오스에게서 눈을 뗀 미렌이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밖에선 황후의 마차가 도착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는 아름다웠지만 특별히 화려하진 않았다. 꼭 미렌 에드가처럼 수수하지만 우아한 멋이 있는 마차였다.

그녀는 마차에 오르기 전 이올라오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제가 이 무리한 일정을 어째서 감행하는지, 그건 지금부터 눈으로 확인하시면 되겠군요.”

“…….”

미렌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문을 닫았다.

이올라오스 또한 호위 기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마차를 이끄는 말에 탑승했다.

마차는 황성을 나갈 때까지만 평범한 속도로 달리다가, 황성의 거대한 문 앞에 서자 급격히 속도를 낮췄다.

가장 선두에 앉은 이올라오스의 눈에도 황성의 거대한 문이 보였다.

그러나 그 문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앞을 빼곡하게 수놓은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축제 기간임에도 살인 사건으로 인해 위축되어 나오지 않았던 백성들이 황후의 얼굴 한 자락을 보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병사들의 통제로 뚫린 길로 말이 나선 순간 고막이 뜯겨 나갈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린아이들 몇 명은 대단히 진귀한 광경이라도 보듯 아버지의 목말을 탄 채였다.

그 모든 백성들의 모습이 이올라오스의 두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어째서인지 이올라오스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장 박동에 순간 고삐를 꾹 눌러 쥐었다.

그때였다.

와아아아!

황후, 전하, 만세!

황후, 전하, 만세!

파도가 들이닥치듯 백성들 사이로 기묘한 물결이 일어났다.

모두가 황후를 연호한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던 이올라오스는 힐끗 고개를 돌리고서야 깨달았다.

미렌 에드가 워로덴이 마차의 창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이, 웃음 한 번이 백성들의 활기를 자아냈다.

‘물론 폐하를 위한 직언입니다.’

‘틀렸어요, 이올라오스 경.’

그는 그제야 황후가 왜 제게 틀렸다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황후로서 만들어 낸 이 들뜬 분위기 하나로 축제는 성공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 황제인 라이언의 업적으로도 남게 될 터다.

그러니 이올라오스의 직언은 틀렸다.

미렌 에드가가 오늘 부린 욕심은 본인이 아닌 황제를 위한 것이었다.

만일 황제를 위한 직언을 하고 싶었다면 이올라오스는 그녀를 더욱더 밖으로 내몰아야 했다.

겨우 그녀의 깊은 뜻을 깨달은 이올라오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악!”

마부의 비명 소리였다.

순간 방심했던 이올라오스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마차 앞을 가로막은 여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녀가 아이를 안고 있던 터라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행렬이 멈춘 뒤 이올라오스가 자리에서 내려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저, 전하를 뵙고 싶습니다. 제발요.”

“불가능합니다.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황후를 보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을 모양새라 결국 이올라오스가 주변에 있던 병사를 부르려 손을 들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마리아가 내렸기 때문이다.

“트리온 경, 무슨 일이죠?”

“전하를 뵙고 싶다는군요. 병사를 통해 처리할 테니 들어가 계시면…….”

“그럴 필요 없다.”

달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또각거리는 구두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토록 시끄럽던 좌중이 조용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미렌이 이올라오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안전을 위해 그의 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다정한 눈길로 마차를 가로막은 여인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

“어, 얼마 전 전하의 구제품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굶어 죽어 가던 제 아이가 살아났어요. 가…… 감사하단 인사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여인이 말을 하는 동안 이올라오스는 조금도 방심을 풀지 않았다.

좋은 의도로 다가온 척 암살을 시도하는 첩자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미렌은 한 걸음 더 내디뎌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미렌이 여자의 벌벌 떨리는 뺨을 감싸 쥐었다.

“아이는.”

“네, 네?”

“아이는 이제 괜찮은가?”

여자의 뺨은 가난을 상징하듯 더러웠다. 그러나 미렌은 그조차 개의치 않고 엄지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손길을 받은 여자가 놀란 눈으로 미렌을 올려다봤다.

“네, 많이 건강해졌답니다. 모두 저, 전하의 구제품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이군, 그래.”

찰칵.

누구보다 고귀하게 태어난 이가 가난한 여인의 뺨을 쓰다듬는 비현실적인 모습은 어떤 이의 손으로 인해 사진이 찍혔다.

그리고 다음 날, 이올라오스는 출근하며 꺼내 든 신문에서 커다랗게 찍힌 황후의 모습을 발견한다.

<건강해진 황후, 가난한 백성마저 품어 내다.>

출신답지 않게 백성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한 황후, 라는 이야기가 일간지 전면을 가로지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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