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5)화 (65/133)

달로 돌아간 토끼

연회가 파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사위가 어두웠다.

침실로 돌아가는 미렌의 뒤로 마리아를 비롯해 수많은 시녀들이 뒤따랐다.

미렌은 그중에서 마리아를 불러 작게 속삭였다.

“다음 기부 파티는?”

“무사히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래. 베르디움 공작 부인의 추모식도 함께 준비하도록 해.”

미렌이 공작 부인과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 몇 번 되지 않았다.

아마도 미렌이 계속 병을 핑계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얼마 보지 못했더라도, 비록 정치적 성향이 달랐더라도 가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침묵해야 하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미렌은 다음 사교 파티의 복장을 모두 검은색으로 규정하고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개막식에 탈 마차는 준비가 되었겠지?”

“예. 전하, 그런데 정말 직접 탑승하실 겁니까?”

“그야……, 윽.”

“전하?”

순간 어지럼증이 쏟아진 미렌이 제 머리를 붙잡았다.

마리아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익숙한 두통이었다.

이건 그러니까, 저쪽에서 누군가 그녀를 깨우는…….

‘레이디 우드?’

“전하, 머리가 아프십니까?”

“마리아, 지금 뭐라고 했…….”

‘우드 님, 괜찮으십니까?’

“전하, 괜찮으십니까?”

숨을 몰아쉬던 미렌은 점차 마리아와 어떤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와 남자, 전혀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들렸다.

그것이 미렌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끔 만들었다.

“제발……. 지금 쓰러질 수는 없어…….”

‘손님이 오셨습니다, 우드 님. 이만 일어나 보십시오.’

“전하! 걸을 수 있으십니까?”

아직 연회장에서 멀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귀족들 몇 명도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쓰러졌다간 다시금 건강에 대해 말이 나올 터였다.

미렌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제 머리를 붙잡은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와 미렌을 안아 올렸다.

라이언이었다.

“무슨 일이냐.”

“전하께서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미렌, 괜찮은가? 내 목소리가 들려?”

미렌은 라이언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녀의 반대편 몸 쪽에서도 또 다른 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카르너 님,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토끼.’

야, 미렌.

눈을 치뜬 그녀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몇 초간은 라이언이었으며, 또 몇 초간은 헤겔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끔찍할 정도의 두통이었다.

“미렌!”

‘미렌?’

두 남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끼며 미렌은 자문했다.

내가…… 누구였지?

***

어느 순간 황후의 몸이 툭, 힘을 잃었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완전히 힘이 풀리자 라이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심장 부근에 귀를 가져다 댔던 라이언은 조그맣게 뛰고 있는 소리에 먼저 안심했다.

그리고 황성에 있는 모든 의원들을 불러냈다.

당황한 것은 헤겔 쪽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날 듯 눈을 끔뻑대던 미렌 우드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그것이 의학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예후가 좋지 않아 보여서, 헤겔은 서둘러 힐링 마법을 펼쳤다.

바깥 의원이 부름을 받고 달려온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달려온 각각의 의원은 헤겔과 라이언에게 동시에 말했다.

“과로입니다.”

급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헤겔보다도 라이언이었다.

“황후가, ‘과로’라?”

“예. 전하께선 최근 상당히 잠을 잘 못 주무신 양이더군요. 올바른 수면 시간과 수면 양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마리아, 황후가 최근 들어 잠을 잘 자지 못했나?”

“대외 활동이 늘어나셨기에 예전만큼 주무시진 못하셨습니다. 또한 낮에 주무실 때도 있으시어…….”

마리아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라이언은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채 침대에 누운 미렌을 내려다봤다.

“혹 쓰러지듯 잠이 드실 때가 있으십니까?”

“네, 있으십니다.”

“이런. 황후 전하께서는 기면증을 앓고 계신 듯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먼저 충분한 휴식을 취하십시오.”

간단한 처방을 마친 의원은 곧 돌아갔다.

라이언은 미렌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녀린 손은 라이언이 조금만 힘을 주었다간 꺾여 버릴 듯 연약했다.

라이언은 차마 그 손을 제 욕심껏 쥐지도 못한 채 그곳에 이마를 기대었다.

“……미렌.”

“…….”

“그러지 마.”

내가 당신에게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길 원했다.

그러나 미렌은 황후의 폐위를 원하는 대신들을 발견하고 쓰러진 다음부터 황후로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가 라이언을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라이언은 그 마음이 기꺼워서 차마 그만하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냈던 게 최근 몇 달이었다. 그는 이마를 기댄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과로라고?”

“예. 아마도 축적된 피로가 터져 쓰러지신 것 같군요.”

“하…… 복숭아 농사를 지을 때도 없던 과로가 수도에 올라와서 생기다니. 넌 아무래도 시골 체질인가 보다.”

톡. 헤겔은 눈을 감은 채 뜨지 않는 미렌의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두드렸다.

헤겔의 옆에선 집사와 트리온 백작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수도에 올라오게 된 미렌이 돈을 벌기 위해 돌아다닌 것을 알고 있기에 무리가 되었나 싶었던 것이다.

“그럼 이만 처방을…… 아, 이런.”

“무슨 일이십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진 가방을 뒤적이던 의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러서 있던 집사가 친절한 얼굴로 그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말을 전했다.

“그게, 막 황궁에서 과로에 관련한 약재를 모두 구매해 간 참입니다. 당장은 제가 가진 약재가 없군요.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할 듯싶은데…….”

“잠깐, 황궁에서 과로에 대한 약재를 사 갔다고?”

“예. 피로 회복에 좋은 약재는 모두 사 갔습니다. 그보다 질 낮은 물건이 있기는 한데.”

“아니요. 내일 아침이라도 좋으니 질 좋은 약재로 구매하겠어요.”

마지막 한마디는 트리온 백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는 미렌의 둥근 이마를 닦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의원은 별다른 약을 처방하지 못하고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돌아갔다.

큰 병은 아니니 몇 시간 뒤에는 일어날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미렌을 찾아온 헤겔도 그길로 트리온 백작의 저택을 나섰다.

찾으러 온 이가 쓰러졌으니 헤겔이 그곳에 머물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저택을 나서며 헤겔은 우연히 퇴근하던 이올라오스와 마주쳤다.

“……당신이 왜 이곳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누구, 설마, 어머니를……?”

“이올라오스, 진짜 미친 거야?”

눈을 찌푸리던 이올라오스는 헤겔의 황당하단 반응에 고개를 팩 돌렸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게 습관인 줄 알았습니다.”

“하!”

“미렌 우드 씨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

그렇다면 저택을 나서는 헤겔이 혼자일 리가 없었다. 적어도 손님이 오면 저택을 나갈 때까지 배웅을 해 주는 게 예의였으니까.

이올라오스는 주변을 둘러봐도 미렌이 보이지 않자 왜 혼자냐는 질문을 던졌다.

“과로라더군.”

“과로……요?”

“쓰러졌어.”

눈을 크게 뜬 이올라오스가 당장 미렌의 방이 있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자리에서 누워 있는 미렌의 모습이 보일 리는 없었다.

“과로라니, 대체…….”

“이상한 내기에 휘말렸다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미렌이 말해 줬으니까. 아무튼, 높으신 분들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마. 가족들과 복숭아 농사나 지으며 조용히 사는 게 목표인 녀석이야.”

“우드 씨가 힘들다고 하셨습니까?”

“그런 적은 없어.”

헤겔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올라오스가 무어라 덧붙이기도 전, 그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런 투정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저 꼴이 되는 거고. 어깨를 으쓱인 헤겔이 힐끗 미렌의 방을 돌아봤다.

더 주고받을 말이 없자 헤겔은 가던 길을 마저 가려 했다.

그런 그가 다시 걸음을 멈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

“무슨 일입니까.”

“혹 황후도 쓰러졌나?”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라이언이 재빠르게 미렌을 감싸 안은 덕분에 귀족들에게도 퍼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갔던 헤겔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이상했다.

“짐작했을 뿐이야. 찾아온 의원이 황성에서 모든 약재를 사들여 갔다기에.”

“당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눈 감으십시오.”

“그래. 내가 궁금한 건, 그저 황후도 지금 잠들어 있는지였어.”

그건 답해 줄 수 있지 않나?

끝까지 라이언의 호위를 맡고 왔던 이올라오스는 물론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몇 분 정도 고민하던 이올라오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잠들어 계십니다.”

“그래?”

대답을 들은 헤겔은 무언가 고민하듯 입가를 쓸어내렸다.

이올라오스가 묘한 얼굴로 그런 헤겔을 주시했다.

확실히 그의 모습은 황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몇 번이고 무의식적으로 미렌 우드의 방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마음이 있다면 그 방향은…….

“고맙군. 먼저 간다.”

“가십시오.”

딱딱한 대화가 오갔다.

이올라오스도 돌아서 저택으로 들어가자 힐끗 그 모습을 확인한 헤겔이 마법을 사용했다.

이동 마법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황후의 정원 속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황후의 창문은 무척이나 잘 보였다. 헤겔은 가만히 서서 그 안쪽을 바라봤다.

침대 바로 옆에 앉은 라이언이 누군가의 마른 손을 붙잡고 기대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그 손의 주인은 미렌 에드가일 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미렌 에드가도, 미렌 우드도 깨어나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입을 다문 헤겔이 하늘을 바라봤다.

초승달 하나가 얇은 선을 그리며 떠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대답을 잃은 질문 하나가 떠돌아다녔다.

토끼, 너 지금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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