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4)화 (64/133)

발 없는 말이 되어

“폐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마리아에게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미렌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꼿꼿이 턱을 치켜세운 채 앉아 그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면사포로 얼굴이 가려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미렌은 표정을 편안히 하지 않았다.

황후로서 참가하는 첫 공식적인 행사였다.

그녀의 건강이 차차 나아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그녀는 이곳에서 조금의 병색도 비쳐서는 안 되었다.

차 한 모금도 편히 마실 수 없는 자리에 앉은 그녀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마리아, 알현을 원하는 자들이 있는가?”

“베르디움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이? 가까이 오라 전하게.”

“예, 전하.”

인형처럼 앉아 있는 미렌에게 기다렸다는 듯 베르디움 공작이 다가왔다.

그는 황후보다 한 단 낮은 위치에 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베르디움 공작. 그간 잘 지내었나?”

나지막한 목소리에 멀리 떨어져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아닌 척 이곳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직위가 낮은 귀족들은 목소리조차 처음 듣는 것일 터였다.

다들 그저 ‘죽어 가는 황후’라고만 알고 있었을 테니.

베르디움 공작은 그 모든 시선을 담담히 감내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특히나 전하께서 얼마 전 여신 기부 파티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베르디움 공작이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조금 더 허리를 굽혔다.

그가 언급한 기부 파티는 얼마 전 죽은 베르디움 공작 부인도 참여했던 행사였다.

“예. 각 영지마다 있는 구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영지에 속한 이들에게도 단비와 같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베르디움 공작의 목소리에는 이렇다 할 높낮이가 없었다.

그건 공작 특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대화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절제된 목소리라 하여도 직접 대화를 하고 있는 미렌에게는 그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황후인 그녀가 연 기부 파티가 다른 이도 아닌 베르디움 공작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말.

뭣 모르는 하위 귀족들은 이것을 두고 황후가 베르디움 공작, 더 나아가 귀족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며 말을 나를 것이다.

아마도 공작이 원한 상황은 그것일 터였다.

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공작을 내려다보던 미렌이 툭,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 각 영지 상황에 따라 공정하게 나누어 기부하라 명령을 하였는데.”

“…….”

“공작의 영지에는 구제민들이 특별히 많은가 보군.”

그녀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괜한 소문이 나기 전에 어서 공작의 말을 바로 잡아야만 했다.

미렌이 내뱉은 한마디는 크게 퍼져 나갔다.

하위 귀족들이 저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대개가 공작의 영지가 예전만 한 위용을 갖추지 못했다는 소리들이었다.

이제껏 덤덤한 얼굴이던 공작의 표정에도 아주 미약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전년도에는 유독 공작의 영지에만 가뭄이 찾아왔다지.”

“알아주신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기부금은 돌아갈 만한 곳에 갔을 뿐이네. 공작이 표한 감사는 마음만 받지.”

그가 준비해 온 선물은 마리아로 인해 공작의 시종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수완가인 베르디움 공작이 이쯤에서 멈출 리는 만무했다.

“아직 건강을 모두 회복하진 못하셨다 들었습니다.”

소문은 다른 소문으로 덮는다.

공작은 빠르게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귀한 약초입니다. 필요한 분께 바치고 싶은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하?

소리 내지 않았지만 미렌이 면사포 아래로 짧게 웃었다.

베르디움 공작다운 상대법이었다.

자신의 명성은 깎지 않되 자존심도 어느 정도 챙길 수 있는.

그녀는 웃음기를 지운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작의 그 귀한 마음, 잘 받아 두지.”

“감사합니다.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런데 공작.”

고개를 조아린 채 그대로 물러서려던 공작이 잠시 멈춰 섰다.

그때였다. 그녀가 제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어 들였다.

히익.

아래에 있던 귀족들 사이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황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오로지 바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있는 베르디움 공작뿐이었다.

“내 건강은 이제 그대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

“그러니 마음만 받겠네.”

아직 미처 찌우지 못한 살로 인해 다소 말라 보이긴 했으나 그녀의 에메랄드빛 두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한 행동의 파급력은 컸다.

황후의 얼굴을 두고 가타부타 입을 열던 귀족들의 목소리도 한동안 잠잠해질 터였다.

건강해진 그녀는 예전만큼이나 못생기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아름다워진 이유는 건강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체에 새겨진 자신감 덕분일지도 몰랐다.

당당하게 공작을 내려다보는 미렌의 두 눈은 조금도 기죽어 있지 않았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황후 전하의 조언, 마음 깊숙이 받겠습니다.”

끝끝내 베르디움 공작은 선물을 건네지 못했다.

돌아서는 그의 뒤로 고급스러운 천에 감싸인 약재를 든 시종이 뒤따랐다.

아직 모두가 바라보는 자리에 홀로 있는 미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려 주던 방패막이마저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있어야만 했다.

그녀가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였다.

“황후의 존안을 누가 드러내었지?”

“……폐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헤겔의 모습이 언뜻 보인 것도 같았지만, 끝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가온 라이언이 미렌이 치워 둔 베일을 다시금 씌워 주었기 때문이다.

제 커다란 덩치를 이용해 귀족들로 하여금 한번 시선을 차단한 그가 빠르게 그녀의 베일을 정리했다.

그러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당신의 얼굴을 함부로 볼 수 없길 바라.”

“……사사로운 감정이십니다.”

“비록 나는 황제지만 또한 한 명의 사내이지 않은가.”

그리 말하자 미렌이 저도 모르게 풋,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가 어째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 그렇게 말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 면사포 하나도 없었다간 공식적인 행사에 처음 참가하는 미렌으로선 표정 관리를 하느라 온 힘을 다 빼 버릴지도 몰랐다.

지금도 그렇다. 그가 제 커다란 등으로 귀족들에게 보이지 않게끔 가려 주어 조금이나마 쉴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그녀의 건강함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였다.

미렌은 앞으로도 몇 시간이고 이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그동안 그녀의 표정이나마 조금 가려 줄 면사포는 그토록 중요했다.

“목이 마르진 않아?”

“괜찮아요, 라이언.”

“잠시 쉴 시간은 만들어 줄 수 있어. 자리를 비운다고 큰 소문이 나는 것도 아니야.”

이번 대화는 비교적 낮게 오갔다.

라이언은 그녀의 면사포 정리가 다 끝났음에도 할 일이 있는 척 계속해서 미렌의 머리카락을 만져 댔다.

물을 마시려면 다시 면사포를 걷어야 하니, 이렇게 몰래 물어 오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라이언다운 배려였다.

“힘들면 말씀드…….”

“미렌?”

그때였다.

순간 미렌의 두 눈동자가 라이언을 벗어나 옆으로 돌아갔다.

라이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이 돌아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저 멀리 헤겔로 보이는 백발의 남자가 연회장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잠시 힐끗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헤겔은 빠져나간 뒤였다.

라이언이 그녀의 왼쪽 뺨 위를 느릿하게 매만지며 말했다.

“내게 집중해 줘.”

“폐하가 아니면 제가 누구에게 집중한단 말입니까?”

“그 말, 지킬 수 있겠어?”

미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식간에 라이언이 그 앞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가 드레스 사이로 손을 파고들어 왔다.

이번에도 그는 손쉽게 미렌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달리 드레스 사이로 맞잡은 손을 숨겨 두지 않았다.

“어머.”

“어머나…….”

차악!

여기저기서 부인들의 부채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부부가 손을 맞잡은 모습이 모든 이들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손을 잡고 있게 된 미렌이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라이언은 눈썹 하나도 까닥이지 않은 채 명령했다.

“다음은 누구인가.”

“트리온 백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까이 오라.”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트리온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백작은 공작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조아린 다음 인사를 올렸다.

“고귀하신 제국의 태양, 폐하를 뵙습니다.”

“잘 지내었나, 트리온 백작.”

“물론입니다.”

“그대의 아들은 제국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이올라오스?”

“과분한 말씀입니다.”

“하하! 모자란 제 아들을 그리 여겨 주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제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이올라오스는 갑작스러운 질문이 던져지자 딱딱하게 내뱉었다.

오히려 트리온 백작이 조금 더 유들하게 대답했다.

황제와 백작의 인사치레식 대화가 오가자 다음은 미렌의 차례였다.

트리온 백작이 평연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를 전해 왔다.

“건강을 되찾아 다행이십니다, 전하.”

“백작의 걱정이 내 건강에 도움이 되었네.”

“그렇습니까? 늙은 노신의 마음을 알아봐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전통 있는 트리온 가문의 주인답게 백작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기품을 잃지 않았다.

다만 트리온 백작으로부터 나온 그다음 한마디에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이다.

“아내로부터 전하와 인연이 있는 자가 제 저택에 머무르고 있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렌 우드의 이야기였다.

“부인에게 흔치 않은 귀한 손님이니 부족함 없이 모시라 전해 두었습니다. 전하께서 제게 주신 기회라 생각하고 모자라지 않게 모시겠습니다.”

미렌 우드의 이야기가 나오자 맞잡은 라이언의 손에 묘하게 힘이 들어왔다.

그녀가 힐끗 눈동자를 움직여 바라봤지만 라이언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트리온 백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의 이름이…… 미렌 우드, 맞지요?”

공교롭게도 전하의 존함과 비슷한 부분이 있더군요.

트리온 백작의 한마디가 발 없는 말이 되어 달려 나갔다.

‘미렌 우드’라는 이름이 사교계에 퍼지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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