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3)화 (63/133)

어둠 속에서

“어디까지 가는 거야?”

“개인적인 알현실입니다. 이제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걸으십시오.”

제 뒤를 힐끗 바라본 이올라오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물론 그가 바라본 것은 헤겔의 얼굴이 아니라 마법사들 특유의 도드라지는 근육이 없는 긴 다리였다.

이올라오스도 기사치고는 얇은 편에 속했지만 실속 있게 근육이 잡혀 있는 몸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사는 마법사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용케도 그런 이올라오스의 눈빛을 눈치챈 헤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뭘 훔쳐봐?”

“훔쳐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 더 배려해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걷는 게 힘드시다면 얼마든지.”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이토록 멀리 가냐는 질문이었잖아. 기사들은 죄 머리에 근육만 찬 건가?”

“기사들에 대한 모욕은 그만두십시오.”

“마법사들은 죄 운동을 못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놈이 말은.”

헤겔과의 대화에 앞서가던 이올라오스도 마찬가지로 얼굴에 조그만 금이 갔다.

그는 최대한 그것을 티 내지 않도록 억누르며 헤겔을 안내했다.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본인의 수양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무시할 게 못 된다는 겁니다.”

“그래 봤자 마법 한 번이면 모두 무너질 일 아니던가?”

“이보십시오!”

결국 이올라오스가 참지 못하고 먼저 으르렁거렸다.

헤겔은 기다렸다는 듯 히죽 웃으며 더 얄밉게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람을 베는 놈들이 고상한 척하는 걸 보면 구역질이 치밀어서 그래.”

“그러신 분이 남의 것을 그토록 탐내셨습니까? 그건 얼마나 고상하신 행동이랍니까?”

“뭐?”

히죽거리던 헤겔의 웃음이 거둬진 것은 그때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올라오스도 순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황후 전하를 탐내셨잖습니까?”

“하? 부른 이유가 정말 그거였나?”

그 한마디로 이올라오스는 자신이 헤겔의 말장난에 놀아났음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만남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이 말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이래서 마법사들이 싫었다.

솔직하고 깨끗한 기사들과는 달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그들은 오로지 자신밖에 알지 못했다.

“당신이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셨습니다.”

“그 심기라는 게 애꿎은 사람을 건드릴 정도로 쓸데없이 방대한 것은 아니고?”

“지금 폐하를 모욕하신 겁니까?”

채앵.

이올라오스의 허리에 채워져 있던 검집에서 검이 뽑아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헤겔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헤겔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전에서 느껴지는 검을 넌지시 내려다보며 단지 물을 뿐이었다.

“남쪽 마탑주를 벤 황제의 기사라, 호사가들이 몹시도 좋아할 문장이로군.”

“그딴 말들에 휘둘릴 충정이 아닙니다. 걱정은 마십시오.”

“충정? 좋아, 그래. 나도 물어나 보지.”

헤겔이 픽 웃으며 제 목 아래에 있는 검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었다.

말을 할 때마다 검날이 목젖을 자꾸만 쳐 댔기 때문이다.

“네가 황제에게 하는 짓이나, 내가 황후에게 하는 짓이나. 대체 다를 게 뭐였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선을 넘은 적이 없어. 네 예민하신 주군께서 단지 날 거슬려 할 뿐이지. 자꾸 그리 압박하니 황후가 숨기려 드는 것 아닌가?”

“폐하께서는……!”

“내가 내 아내에게 다가오는 놈을 거슬려 하는 게, 문제가 될 일이었나.”

마지막 한마디는 무섭도록 낮은 목소리였다.

이올라오스와 헤겔 모두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막 방에서 나온 듯한 라이언이 서 있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헤겔을 바라보며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이올라오스도 순식간에 꺼내었던 검을 도로 넣고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헤겔은 한숨을 푹 쉬며 심드렁한 얼굴로 라이언을 따라 들어갔다.

쿵.

결국 혼자 남게 된 이올라오스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연회에선 언제나 이올라오스가 황제의 신변 보호 역을 맡았기에, 이번 대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문 앞을 지키고 서야 했다.

그는 문 바로 옆 벽에 곧은 자세로 서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우드 씨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 둘걸.”

긴긴 밤, 오늘도 퇴근은커녕 황성에서 아침을 맞이해야 할 듯싶다.

***

처음으로 알현실에 발을 내디딘 순간, 이올라오스는 이곳이 무척이나 이상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모든 곳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의 장소답지 않게 이 방 안에는 그 어떤 물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파도, 책상도, 심지어는 전등마저도.

방 안에 있는 것은 달빛이 들어올 수 있게끔 만들어진 커다란 창뿐이었다.

헤겔보다 먼저 들어온 라이언이 어둠 속에서 창밖을 멀거니 바라봤다.

“내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더군.”

“……누가 그랬습니까?”

“쓸데없이 서로를 탐색하는 질문은 관두지, 마법사.”

자신이 먼저 황후라는 단어를 꺼내고 싶지 않아 알면서도 질문을 던졌던 헤겔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올라오스와는 달리 황제인 라이언은 이런 질 낮은 말장난으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헤겔도 눈을 내리깐 채 제대로 된 대답을 내주었다.

“그 비밀에 대해선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

“예, 그건…….”

그때였다.

성큼성큼 다가온 라이언이 표정 없는 얼굴로 헤겔의 목을 잡아챘다.

그는 한 손으로 헤겔의 목을 조이며 나직이 물었다.

“큭…….”

“헤겔 카르너, 정말 죽고 싶은 건가?”

라이언은 헤겔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단호하게 물을 뿐이었다.

“황제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건 곧 죽여 달라는 말이겠지.”

“황……후 전하께서는, 컥, 폐하가…… 이러는 걸 아십……니까?”

라이언은 헤겔의 끊어질 듯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잡았던 헤겔의 목을 놓아주었다.

“알지 못해.”

“학, 하아…….”

“알았다간 날 보는 눈이 어떻게 변할 줄 알고.”

“폐하께서도 황후 전하에게 숨기는 게 있는 건 마찬가지잖습니까. 어째서 황후 전하의 탓만 하시는 겁니까?”

겨우 숨을 몰아쉰 헤겔이 바로 서며 구겨진 제 옷을 매만졌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라이언,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여도 비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똑똑했다. 라이언의 질문은 ‘어째서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헤겔 카르너가 알고 있냐’는 의도였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황제와 황후 둘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주제로 바꾸어 버렸다.

사실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의 입장에서 남쪽 마탑주의 목숨 따위는 아주 가벼운 것에 속했다.

남쪽 마탑주의 자리는 헤겔 다음으로 마법 실력이 뛰어난 이에게 물려주면 되었으니까.

헤겔은 최대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히 했다.

“나는 그저…… 그녀가 날 두려워하는 게 싫었을 뿐이다.”

“……폐하의 어린 시절처럼 말입니까?”

라이언은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그에게는 네 명의 배다른 형제가 존재했는데, 선황이 급사한 뒤 황위를 노리고 있던 이들이 그 형제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일어났던 일은 라이언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의 어머니, 선 황후의 시해 사건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독을 먹고 사망한 어머니를 눈앞에서 목격한 라이언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그는 황위를 욕심내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살기 위해 황제가 된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그가 형제들을 하나씩 없앨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직접 형제의 목을 베는 라이언은 전혀 그 나이답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라이언은 미렌과 결혼하며 결심했다.

그녀에게는…… 그녀에게는 처음 복숭아나무를 심기 위해 만났던 그때처럼 순수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여 주겠노라고.

그녀마저 자신을 두려워했다간 자신이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것이, 라이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미렌이 내 이런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

“이제껏 내가 보았던 모든 이들은 나를 두고 두려워했는데, 그녀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느냔 말이다.”

헤겔로부터 이렇다 할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자 라이언은 애꿎은 손만 꾹 쥐었다.

그의 짧게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황제가 된 이상 누군가를 해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모두에게 칭송받는 고귀한 태양? 그딴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누군가가 목숨을 보장받으면, 또 다른 누군가는 죽어 간다.

그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자리가 황위였다.

그리고 라이언이 그 황위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약하디 약한 미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모순 속에서 그는 버텨야 했다. 오로지 그녀 하나만 바라본 채.

“전하께도……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이 제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 비밀이 생겨났다고. 전하께서도 같은 이유에서 숨긴다는 생각은 못 해 보셨냐는 말입니다.”

헤겔의 한마디에 라이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제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폐하께서는 전지전능하여 모두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는 전지전능하지 못해. 다만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내 사랑을 그리 생각하지?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폐하께서도 이미 전하를 모욕하고 계시잖습니까.”

라이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헤겔이 짚은 부분은 라이언으로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좋아함에 있어선 누구보다 솔직했으니까.

그러니 신뢰를 주지 못했을 리 없다고…… 그리 생각했다.

“대화는 이미 끝난 듯하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카르너.”

막 돌아선 헤겔을 붙잡은 것은 라이언의 나직한 부름이었다.

그가 뒤돌아서기도 전에 라이언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건방진 말장난은 이번만 넘어가 주겠다.”

“……알고 계셨습니까?”

허탈하게 웃은 헤겔이 라이언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처음 헤겔이 라이언에게 목을 잡혔을 때 바뀌어 버린 대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언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넘어가 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점이 이올라오스와는 달랐다.

황제를 상대하는 것은 세간에서 천재라 불리는 헤겔마저도 피곤한 일이었다.

“다만 하나만 묻지.”

“무엇입니까?”

“황후를, 미렌을…… 마음에 담았나.”

기나긴 침묵이 오갔다.

그러나 헤겔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언의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똑히 바라보며 내뱉었다.

“폐하께서는 오로지 황후 전하에 대해 물으신 겁니까?”

“그래.”

헤겔이 그 질문을 피할 이유는 없다.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평연하게 대답하려던 그는 문득 제 마음이 미묘한 우월감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르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다.

그 쾌감이 주는 기분을 제 앞에 선 이 남자는 전혀 모를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황후 전하를 마음에 담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황제를 기만하겠노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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