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2)화 (62/133)

반짝이는 별

“폐하와 전하의 사이가 제법 좋아 보이지?”

도수가 낮은 술 한 잔을 손에 든 채 멍하니 서 있던 헤겔에게 누군가 등을 툭 치며 다가왔다.

사실 헤겔은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광경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서 잊지 못할 연회로 만들어주겠다 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바람을 이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이 끝난 후 그녀는 헤겔에게 눈으로 인사를 전해 왔다.

그 웃음에 마음이 편했던 것도 잠시, 헤겔은 그 곁에 있는 라이언으로부터 싸늘한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이봐, 헤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언제부터 우리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했다고 말을 걸어.”

“넌 나이가 들어도 성격 나쁜 건 그대로네. 하하!”

“북쪽 마탑은 여전히 얼빠진 놈들만 모여 사나 보지?”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발 머리가 눈에 띄는 남자였다.

그는 헤겔의 심드렁한 한마디에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하! 역시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니까.”

“네 마탑을 욕하는데 그렇게 웃는 놈도 너밖에 없지 않을까.”

“내 마탑이라니? 난 그저 북쪽 마탑주일 뿐이지, 그게 내 건 아니야.”

“어련하시겠어, 알페카.”

헤겔의 마지막 한마디에 알페카가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헤겔과 알페카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마법을 배운 제자이기도 했다.

물론 헤겔은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알페카를 바보 같다며 싫어했지만.

“오랜만에 마탑주들이 모이니까 좋잖아. 저기 보이지? 오퓨커스 봐.”

“그래, 좋아 보이네. 여전히 세상 모든 남자를 제 시종쯤으로 아나 보지.”

“그게 오퓨커스의 매력이잖아. 여전히 아름답고.”

알페카가 가리킨 곳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가장 화려하게 입은 여성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서쪽 마탑주인 오퓨커스였다.

축제의 개막식보다 앞서 열리는 오늘 연회는 귀족들을 비롯해 모든 마탑주들에게도 초대장이 돌아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헤겔은 자신이 왜 이곳까지 왔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있던 오퓨커스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오퓨커스! 잘 지냈어?”

“물론, 알페카. 너는 여전히 사랑스럽구나.”

다가온 오퓨커스와 알페카가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마친 오퓨커스는 곁에 있던 헤겔을 발견하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보자마자 표정부터 구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넌 여전히 싸가지가 없구나, 헤겔.”

“그야 너만 할까.”

둘의 언쟁이 높아질 기미가 보이자 알페카가 서둘러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보통 둘 사이로 싸움이 번지면 해결하는 건 언제나 알페카였다.

“멜리크는 올해도 불참일까? 혹시 소식 들은 사람 없어?”

“멜리크는 여전히 음침하니?”

“멜리크가 마탑 밖에 나오는 날은 세상이 멸망할 때라니까.”

마지막으로 동쪽 마탑의 주인인 멜리크의 이름마저 나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탑주에 오른 뒤 한 번도 외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러는 넌 웬일로 참석했다니, 헤겔?”

“그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던 헤겔은 도로 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퓨커스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멜리크와 마찬가지로 연회 따위는 성질에 맞지 않는다며 불참했던 게 헤겔 카르너였다.

네 명의 마탑주 중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고 불리는 헤겔이지만, 그만큼 그는 매사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이 연회에 처음으로 황후인 미렌 에드가 워로덴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향했다.

보좌관인 리키가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그답지 않은 행보였다.

“……리키가 참석을 부탁해서.”

“아아, 네 ‘불쌍한 리키’? 참 귀여운 아이였는데.”

“네 보좌관들이나 잔뜩 귀여워하지, 오퓨커스.”

“우리 아가들은 내가 잘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 말렴.”

“걱정은 무슨. 동정이겠지.”

유난히 남자의 비율이 높은 서쪽 마탑이었다. 치료 마법의 대가인 오퓨커스를 존경해서 가는 놈들도 있긴 했지만, 그만큼이나 그녀의 미모에 반해 따라가는 놈들도 많았다.

오퓨커스는 그런 서쪽 마탑의 마법사들을 두고 언제나 ‘아가’라고 불러 댔다. 헤겔이 가장 싫어하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자라면 질색하는 헤겔 카르너가 오늘 황후에게 두 번이나 마법을 걸어 준 이유는 뭐였니?”

“맞아!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헤겔, 그거 네 마법이었지?”

“난 저놈이 그렇게 멋없는 마법을 하는 건 처음 봤단다. 너도 그렇지, 알페카?”

“멋이…… 없었나? 아주 다정한 마법이던걸. 드레스의 경량화도 그렇고, 시간 맞춰 뿌려 준 꽃가루 환각 마법도 그렇고.”

“다정? 풋. 저밖에 모르는 놈한테 그런 단어는 아깝지 않겠니?”

오퓨커스의 마지막 비웃음 소리에 헤겔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법을 사용할 때부터 이들이 눈치챌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오퓨커스의 비웃음 소리를 듣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위대한 남쪽 마법사’가 왜 황후의 손장난에 참여했을까? 으응? 나는 너무 궁금하구나, 헤겔.”

다가온 오퓨커스가 제 얼굴까지 내밀어 가며 그를 압박했다.

결국 헤겔은 고개를 뒤로 쭉 내뺀 채 나직이 대답했다.

“인연이 좀 있어서.”

“네가?! 자기밖에 모르는 그 이기적인 헤겔 카르너가?!”

“……오퓨커스, 입 닥쳐.”

“너 그거 바람이야!”

오퓨커스의 외침에 순간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그 즉시 헤겔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오퓨커스의 입을 제 큰 손으로 막아 버렸다.

“으읍!”

“오퓨커스, 귀족들은 원래 결혼하고 정부를 두지 않……나? 음, 그럼 헤겔이 황후의 정부인가?”

“그딴 것 아니니 너도 입 닥쳐, 알페카.”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헤겔이 알페카에게 시선을 돌린 사이 오퓨커스가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그녀는 헤겔의 손이 닿은 제 얼굴을 더럽다는 듯 슥슥 닦고서 말했다.

“알페카, 넌 방금 전 황후와 황제의 부부 싸움을 보고도 모르겠니? 저 둘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다른 귀족들처럼 정부나 만들 위인들이 아니야.”

“하긴, 황제 폐하의 사랑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긴 하지.”

“아마 멜리크도 알고 있을걸? 그건 이 세상 사람 전부가 안다는 뜻이야.”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랑 이야기.

헤겔은 오퓨커스의 중얼거림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황제와 황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 웃기지도 않는 사랑 이야기에 낄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는 미렌 에드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헤겔 카르너.”

“왜.”

“제발 조심하렴.”

“……대체 뭘.”

“안 될 일에는 마음도 주지 마. 내가 네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오퓨커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건방진 고갯짓에 발끈한 헤겔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그런 적 없어.”

“그런 적 없긴?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마법을 펼치는 게 흔한 일이니? 네 불쌍한 리키에게 물어봐.”

“오…… 오퓨커스, 저기, 이제 그만…….”

“하, 누구처럼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래도 놀려지는 것보단 낫지? 으응?”

기품 있게 웃고 있지만 오퓨커스의 얼굴에도 금이 간 지 오래였다.

헤겔은 이미 비웃음을 입에 걸친 채 대화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낀 알페카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황후 전하도 불쌍하다. 어쩌다 네 눈에 띄어서. 불쌍한 리키도 그렇고, 어째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불쌍하다니?”

“네 그 곁에 있는 놈들만 할까. 그런데 네 뒤만 줄줄 따라다니는 그놈들은 어디가 모자란 거냐? 아니면 멍청한 건가?”

“내 아가들을 함부로 말하지 마!”

“눈가에 주름 생겼다, 너.”

놀라 눈을 크게 뜬 오퓨커스가 재빨리 손거울을 꺼내 눈가를 살폈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눈가엔 방금 전 낸 화로 인해 미약한 주름이 져 있었다.

입술을 짓씹은 오퓨커스가 헤겔을 노려봤다. 헤겔은 이미 승자답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오퓨커스, 넌 주름이 생겨도 예뻐. 할머니가 돼도 아름다울걸.”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가끔 보면 알페카 네가 제일 못됐어!”

“그건 동감.”

헤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가장 못된 놈으로 몰린 알페카가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나, 나? 라고 물어 왔다.

헤겔과 오퓨커스는 가볍게 그것을 무시했다. 대신 진정한 오퓨커스가 헤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심해.”

“대체 뭘?”

“마법사가 높으신 분들 일에는 끼는 게 아니라는 거, 너도 배웠잖니. 스승님만 봐도 모르겠던?”

“죽은 사람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하려고.”

오퓨커스와 헤겔, 알페카, 멜리크는 모두 같은 스승 아래에서 자랐다.

물론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의 스승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넷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스승은 선황이 죽은 뒤 황위를 조종하려다 현 황제인 라이언에게 패배했다.

정치적 싸움에서 패배한 자의 말로는 모두가 같았다.

마탑이 예전과 달리 정치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 없어.”

“사고를 쳐도 알페카나 멜리크가 낫지. 네가 치면 그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거든?”

“아아, 귀 아파. 널 따라다니는 놈들은 대체 네가 왜 좋다던?”

“그야 예쁘니까. 아니면 아름다우니까?”

어깨를 으쓱인 오퓨커스가 자신도 안다며 큰 눈을 깜빡였다.

그에 헤겔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고, 알페카도 애매하게 웃으며 장단만 맞추었다.

셋의 이야기가 끝나 갈 즈음이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이가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마주 서 있던 오퓨커스가 먼저 반응했다.

등진 채 서 있던 헤겔은 그녀가 인사하자 고개를 돌려 제게 다가온 이를 확인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올라오스 트리온입니다.”

“폐하의 기사가 아니셔요? 기사분이 마법사들에겐 무슨 일이시랍니까?”

“아, 이분이 그 유명한 폐하의…….”

“알페카.”

폐하의 ‘개’라고 말하려던 알페카는 오퓨커스가 웃으며 자신을 부르자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면전에다 대고 개라고 말할 뻔했던 알페카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치가 빠른 이올라오스는 이미 알페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챘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신 헤겔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를 전했다.

“폐하께서 따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예.”

어깨를 으쓱인 헤겔은 별말 없이 이올라오스를 따라갔다.

둘만 남게 된 오퓨커스와 알페카가 멀어지는 헤겔을 가만히 바라봤다.

“오퓨커스, 오늘따라 유난히 헤겔에게 신경을 많이 쓰더라.”

“내가 그랬니?”

“응. 전엔 저런 놈은 망해 버려야 한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드디어 헤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오퓨커스가 알페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봐 버렸거든.”

“뭘?”

“황후의 손짓에 맞춰 꽃가루를 만드는 헤겔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땠는데?”

“그냥.”

그냥…… 내가 너무 잘 아는, 그런 표정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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