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1)화 (61/133)

찬란한 태양

“연회를 시작하지.”

미렌의 손짓과 함께 쏟아진 꽃잎들로 화려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내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방금 전 일어난 일에 대해 떠드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던 미렌은 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헤겔이 있었다.

미렌이 그를 바라보며 짧게 미소 지었다.

방금 전 꽃송이는 헤겔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헤겔이라면 충분히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라이언이 질문을 던진 것은 그때였다.

“미렌.”

“예, 폐하.”

“방금 전 마법은…… 카르너가 한 건가?”

라이언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얼굴엔 평소와 달리 다정한 웃음도, 그렇다고 커다란 요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도와주었습니다.”

“……내게 부탁했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마법사가 아니잖습니까?”

미렌의 한마디에 라이언의 그럴 듯한 가면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떻게 그리 말할 수 있어?”

“……폐하.”

“미렌,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지?”

분명 그의 얼굴은 화난 듯 굳어 있었다.

구겨진 미간과 다물린 입매가 그러했다.

다만, 라이언의 눈빛이 안쓰러울 정도로 서러워 보일 뿐이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미렌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난 그가 싫어. 당신이 그와 친하게 지내는 건 더욱더.’

그는 분명 헤겔 카르너를 두고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어긴 건 다름 아닌 미렌 그녀였다.

하지만.

헤겔은 미렌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마 그녀 홀로 황후인 미렌 에드가의 삶을 지속하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미렌에게, 그리고 결국 한쪽을 포기하려 들었던 미렌에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해 준 이였다.

미렌은 차마 라이언에게 더는 그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라이언.”

“…….”

“미안합니다…….”

그녀가 라이언의 옷소매를 조심스레 쥐려 했을 때였다. 그가 문득 한 걸음 물러섰다.

라이언이, 미렌의 손길을 피한 것이다.

누구보다 다정했던 그녀의 남편 라이언이.

“내 언동이 당신의 기분을 저조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라이언. 당신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끝까지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라이언의 두 눈동자가 상처로 물들었다.

그는 오래도록 미렌의 말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기다리던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먼저 미렌을 남겨 둔 채 자리를 뜬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래로 내려간 라이언은 고위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이어 갔다.

미렌은 그저 황좌에 앉아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가 전하를 좋아할 수 없는 건 이래섭니다.”

시립해 있던 이올라오스가 라이언을 뒤따르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당장 라이언을 따라가는 대신, 미렌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전하께선 폐하에 대해 저보다도 알지 못하십니다.”

“…….”

“그런데 노력조차 하지 않으시죠.”

모욕적인 말에 미렌이 제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올라오스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차라리 끝까지 거부하지 그러셨습니까.”

“……이올라오스 경, 말이 지나치군요.”

“왜 폐하의 마음을 받아 주신 겁니까?”

기대라도 말게 하셨어야지.

그대로 지나치려는 이올라오스를 붙잡은 것은 미렌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의 팔을 잡았다.

미렌과 이올라오스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아래로부터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멋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제 언동이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습니까? 사죄하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점점 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이올라오스는 부담스러웠는지 그녀가 붙잡은 팔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미렌은 놓아주지 않았다.

단호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주군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요.”

“…….”

“가장 찬란한 태양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겠다고.”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제가 폐하를 사랑하는 방법이니까요.”

처음으로 시한부인 황후의 삶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미렌은 다짐했다.

이제껏 자신이 피하고 미뤄만 뒀던 일들이 더는 라이언을 괴롭히게 두지 않겠다고.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행복했다.

다만, 그녀는 이것이 끝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동화처럼 ‘서로 사랑해서 행복하게 끝났다.’라는 한마디로 정리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죽음을 미루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당장 제게 죽음이 들이닥쳐도 홀로 남은 라이언이 지치지 않도록.

“전하께선…….”

“이올라오스, 그만.”

미렌의 것이 아닌 낮은 목소리가 이올라오스를 불렀다. 부름의 주인은 라이언이었다.

어느새 이올라오스와 미렌에게 다가온 그가 그만하라는 듯 손짓했다.

이올라오스 또한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언의 뒤로 물러섰다.

다시 자리를 떠나려는 라이언을 붙잡은 것은 미렌이었다.

“라이언, 제가 당신을 불행하게 하고 있습니까?”

“…….”

“제 방법이 틀렸다면 말해 주세요. 다른 사람이 아닌 폐하에게 듣고 싶습니다.”

라이언은 돌아선 몸을 뒤돌지 않은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한 뒤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제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그때도요?”

“그래.”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던 그때에 그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찬란한 태양? 존경받아 마땅한 주군? 미렌, 당신이 잘못 알고 있군.”

“…….”

“나는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어.”

그가 돌아섰다. 라이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렌은 숨을 들이켰다.

그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열하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라이언의 턱 끝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가 내게 그렇게 말하더군.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그저 복숭아를 키우며 사는 삶이 더 좋다고.”

“라이언…….”

“나도 그러해.”

이제껏 황후의 품위를 위해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미렌의 표정이 완전히 깨졌다.

놀람을 숨기지 못한 그녀가 달려가 라이언의 뺨을 감쌌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당신뿐이야.”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이언, 울지 마세요.”

미렌의 엄지가 라이언의 눈 아래를 훑었다.

그녀는 그의 눈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미렌이 눈짓으로 시종들에게 귀족들의 시선을 돌리라 명하자 더는 아래에서 볼 수 없도록 가림막이 쳐졌다.

겨우 바깥의 소음이 조금이나마 가시자 둘은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미렌을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결국 그녀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헤겔 카르너와 달리 내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거지?”

그의 자그마한 속삭임에 미렌의 두 눈이 커졌다. 심장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라이언은 전과는 달리 이번엔 미렌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대신 덤덤히 제 생각을 말할 뿐이었다.

“내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 그렇지?”

“……라이언.”

“당신이 먼저 말해 줄 날을 기다릴게.”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대신 미렌의 어깨에 기댄 채 얼굴을 꼭꼭 숨겼다.

미렌이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라이언의 허리를 감쌌다.

그는 제 아내가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자 절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숨겨 버렸다.

“속……상하지 않습니까?”

“속상해. 무척이나 서운해. 대체 왜 내게는 말할 수 없는 거지?”

“제가 모자라서 그럽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요. 그러니 라이언.”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라이언의 물음에 미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만일 말한다면, 적어도 그건 테룬 공국과의 일이 모두 끝난 뒤여야만 했다.

“더 이상 헤겔 카르너의 일은 신경 쓰지 않겠어. 내가 약속하지.”

“라이언, 그는 그저 제 일을 도와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당신과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 않아.”

라이언이 자그맣게 속삭이자 미렌도 그의 귓가에 조곤조곤 말했다.

그가 그녀의 허리 뒤로 팔을 둘러 안았다.

처음엔 미렌에게 안긴 모양새였던 라이언은 어느새 허리를 곧게 편 채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득 안고 있었다.

미렌은 그 품이 주는 안정감이 좋아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폐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폐하가 아니라 라이언. 지금은 둘밖에 없잖아.”

“라이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어요.”

“나도 그저 복숭아나 키우며 살고 싶다는 생각 말인가?”

이제껏 라이언에게 미룬 모든 것들이 미안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녀는 한 번도 그에게 의사를 물은 적이 없던 것을 깨달았다.

황좌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을 죽일 수밖에 없던 이였다.

그가 어떤 아픔을 가진 채 황제가 되었을지 그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꿈은 아주 단순해.”

“꿈이요?”

“당신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

“황좌가 싫으신 건 아닙니까?”

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싫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지. 생각보다 적성에 맞기도 하고. 다만, 이건 그저 내겐 수단일 뿐이야.”

“수단이라니요?”

“당신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수단.”

그렇게 말한 라이언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미렌을 마주 봤다.

그의 얼굴 위 가득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미렌은 그토록 행복한 라이언의 미소를 처음 봤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해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 준 건 고마워. 나를 사랑하니 그토록 열심이라는 사실도 잘 알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마음이 좋아서 이제껏 구태여 꺼내지 않았어. 하지만, 미렌. 부디 잘 기억해 둬.”

내게 당신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라이언의 두 눈이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미렌은 그제야 그가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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