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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60)화 (60/133)

마법과 꿈

잠이 든 뒤 황후로 눈을 떴던 미렌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라이언?”

“이올라오스가 범인을 잡았다는군. 그리고 공범이 누군지도 실토했다는 소식이야.”

“공범이 누군가요?”

아침 식사를 함께하던 라이언이 나이프를 내려 뒀다. 그가 미렌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10년간 함께한 집사라더군.”

“그럴……!”

“미렌?”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일 뻔했던 미렌이 겨우 그것을 가라앉혔다. 라이언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미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라이언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미렌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집사의 소행이라니?

공작의 방에서 수면초 가루를 찾은 게 어제였다. 물론 그것이 모든 물증은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빠르게 실토한 게 이상해요.”

“그 생각엔 나도 동의해. 하지만 미렌, 이게 만일 베르디움 공작의 짓이라면 여기서 더 크게 만들 순 없어.”

“어째서요?”

“그때부터는 일개 살인 사건이 아니라 전쟁이 될 테니까.”

베르디움 공작이 귀족파를 이끄는 수장이 된 것은 모두 에드가 가문이 힘을 잃으며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에드가 가문에 이렇다 할 주인이 없는 지금,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전무했다.

라이언이 그를 제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라이언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때를 기다려야 해. 아직은…….”

미렌이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며칠 전 파티에서 보았던 공작 부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며칠 전까지 함께 차를 마시던 이가 죽어 나가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가는 게 귀족의 삶이었다.

그녀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렌.”

“…….”

“미안해.”

그 다정한 속삭임에 미렌이 라이언을 바라봤다. 그는 마음 아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을 이런 진창에 있게 해서.”

“……라이언.”

“내가 당신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게…… 마음이 아파.”

덜컥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언이 미렌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직 앉아 있는 미렌을 향해 허리를 굽혀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아 주었다. 미렌은 등 뒤로 그가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제 옷자락을 붙잡는 게 느껴져 마주 안았다.

“그런데도 도저히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어…….”

듣고 있던 미렌은 결국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어 냈다. 대신 라이언의 양 뺨을 감싸고서 두 눈을 바라봤다.

“포기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

“당신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에요, 라이언. 내가 좋아서 당신 곁에 남은 겁니다.”

미렌의 얇디얇은 손가락이 그의 뺨을 훑어 내렸다.

눈을 마주하던 라이언은 마침내 그것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의 허리가 조금 더 깊이 숙여졌다.

둘 사이로 더 이상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은 것은 그다음 순간부터였다.

***

“축제에 직접 참가하신다고요?”

황후의 머리를 빗겨 주던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빗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앉아 있던 미렌이 먼저 허리를 굽혀 빗을 주워 마리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들었어.”

“하, 하지만 이제껏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황후 전하께서 평민들이나 참가하는 축제에 직접 나서시다니요?”

“공작 부인 살해 사건으로 이전 축제들과 달리 분위기가 좋지 않아. 가라앉은 분위기는 백성들의 지갑마저도 닫게 만들지. 그러니 내가 먼저 나설 생각이야.”

현재 민간에서는 함부로 나섰다간 테룬 공국의 사람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그 대단하다는 베르디움 공작의 저택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니 아무 보호책도 없는 평민들은 불안해할 법도 했다. 미렌은 그것을 꼬집은 것이다.

축제는 제국의 영광을 알리기 위해 준비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그날만큼은 모두가 웃고 즐겨야만 했다.

“위와 옆이 뚫린 마차를 준비해 줘. 개막식 날 그걸 타고 수도를 한 바퀴 돌 테니까.”

“당장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대단한 마차는 준비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오히려 검소할수록 좋아. 그러니 부탁할게, 마리아.”

치장을 마친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의 황후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법한 화려한 드레스가 미렌의 몸을 감싼 채였다. 비록 외모는 아름답진 못했으나 그녀의 얼굴에선 생기가 돌았다.

미렌이 이토록 꾸민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오늘이 바로 사절단이 참가하는 연회 날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그녀였기에 긴장은 되었지만 미렌은 애써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미리 아르테미스도 마셔 둔 터였다.

“전하, 준비되셨습니까?”

“그래.”

“제가 모시겠습니다.”

대연회장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었다. 미렌은 무거운 드레스의 무게를 견디며 한참을 걸어야만 했다.

연회장의 문 앞까지 왔을 때는 사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여기서부터는 걸음걸이마저도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드레스의 무게로 인해 뒤뚱거리며 걷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시종 한 명이 미렌의 입장을 알리는 동안 그녀가 마리아에게 속삭였다.

“폐하께서 기다리시겠군.”

“……예, 무척이나 기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 전하. 그러고 보니 모든 마탑주들도 참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헤겔 카르너도 왔느냐는 말은 묻지 못했다. 그 순간 미렌의 앞으로 거대한 양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부신 조명이 제 얼굴을 내리쬐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내디뎠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고개를 숙여서도, 뒤뚱거려서도, 우아하지 못해서도 안 되었다. 뒤에서 치맛자락을 잡아 주는 시녀들의 도움을 제외하고선 이제 미렌 홀로 이 모든 것을 견뎌 내야만 했다.

“…….”

“…….”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런 미렌을 두고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거기에 정신이 팔렸던 미렌이 제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을 때였다.

따악…….

조용했던 장내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미렌의 옆으로 누군가 달려왔다. 그녀는 제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이를 올려다봤다.

라이언이었다.

황좌에서 빠르게 내려온 그가 넘어질 뻔한 미렌의 허리를 감싸자 귀족들 사이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가 미렌을 향해 소리 없이 괜찮아, 하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미렌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드레스의 무게가 어느 순간 깃털처럼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라이언이 서 있는 곳과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인파에 둘러싸인 누군가가 보였다. 백발의 남자는 미렌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눈을 돌려 버렸다.

헤겔이 제 마법으로 드레스의 무게를 줄여 주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미렌은 헤겔이 서 있는 방향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전했다.

“폐하, 이곳까지 내려오시다니요.”

“당신이 위태롭게 걷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볼 수 있어?”

“제가 그리 위태롭게 걸었습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었는데…….”

“드레스는 또 왜 그렇게 무겁고 화려한 걸 입혀선, 내가 분명 너무 아름답게 꾸밀 필요는 없다고 하였는데……!”

다른 이들보다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둘은 라이언의 한마디에 순간 서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녀가 ‘네?’, 라고 되물었다.

“마리아에게 그런 명까지 내리셨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대체 무엇이요?”

“당신이 너무 예뻐서…… 누군가 반해 버릴까 봐.”

라이언의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깃 사이로 숨겨진 목마저 색이 변한 터였다. 그는 제 얼굴이 부끄러운 듯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토록 예쁘게 꾸미는 걸 보는 건,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니까…….”

라이언의 말대로 그녀는 그와의 결혼식을 제외하고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미렌이 연회용 드레스를 입는 모습을 보는 건 그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자그마치 8년 전 그때를 제외하고.

“폐하, 얼굴이 너무 붉습니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라이언이 그토록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처음 봤던 미렌은 잠시 제 아래와 옆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의 아래에선 귀족들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선 힐끗힐끗 미렌과 라이언을 바라보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것을 눈치챈 그녀가 라이언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이윽고 미렌은 풍성한 드레스 아래로 손을 뻗어 라이언의 큰 손을 맞잡아 주었다. 그녀 딴에는, 라이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잡은 것이었다.

“……읏.”

“라이언?”

그런데 손이 잡히자 라이언은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참기 시작했다. 놀란 미렌이 저도 모르게 라이언이라 부르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모로 돌리며 빈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손을…… 놓을까요?”

걱정된 미렌이 손을 놓으려 들자 그가 그 손을 꽈악 잡아 왔다. 미렌은 손이 아픈 것보다도 황제와 황후가 사사로이 손을 잡은 게 다른 이들에게 보일까 드레스 아래로 조금 더 숨겨 버렸다.

“놓지 마.”

“놓지 않겠습니다. 라이언, 이러다 남들에게 보일 수도 있으니 힘을…….”

그러자 라이언은 힘을 푸는 대신 미렌의 손가락 사이마다 제 손가락을 끼어 강하게 얽어 왔다. 그녀는 치맛자락 아래에서 농밀하게 만져지는 제 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도와준다고, 했잖아.”

“하지만 이건……!”

“부인, 내게 거짓말을 하였어?”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속삭이며 대화하던 이전과 달리 평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아래에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제게 모이자 심장이 철렁 떨어진 미렌은 침을 삼켰다. 제 옆을 바라보자 어느새 표정을 가다듬은 라이언이 평연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치맛자락 사이로 움켜쥔 손은 조금도 놓아주지 않았으면서.

“아니요, 폐하.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하하! 폐하, 황후 전하를 너무 괴롭히지 마소서. 오늘을 위해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잖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너무 짓궂으십니다.”

귀족들 중 몇 명이 농담을 던져 왔다. 미렌이 수습되는 분위기에 안도했을 때였다.

“몸이 약해 이제껏 걸음 한번 해 주신 적이 없는 전하시잖습니까? 이번 연회가 별로였다간 차후 발걸음을 완전히 끊으실지도 모릅니다.”

낮게 웃고 있던 라이언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야기의 당사자인 미렌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하지만 섣불리 혼낼 수 없었던 것은, 이 연회장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귀족이 입을 연 저 남자 한 명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분노해 입을 열려는 라이언을 막은 것은 미렌이었다. 그녀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그를 막은 뒤 자신이 직접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내가 직접 공들의 기억을 바꾸어도 괜찮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해하지 못하셨습니까? 이 연회를 잊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대체 어떻게요?”

미렌이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얼굴 위에는 황후의 얼굴을 감히 보지 못하게끔 반투명한 면사포가 씌워져 있었다. 모두가 미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보일 일은 없었다.

일어선 미렌이 문득 한 손을 들었다. 다섯 개의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하게 하나씩 접혀 들었다. 이윽고 모여든 꽃봉오리가 펼쳐지듯 팡, 손가락이 뻗어졌다.

그 순간.

대연회장 내부로 꽃송이가 한가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눈처럼, 혹은 비처럼 쏟아지는 꽃잎이었다.

이날 연회에 왔던 모든 이들은 이때를 회자할 때 그렇게 말했다.

황후의 손이 춤을 추는 순간,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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