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59)화 (59/133)

복숭아보다 달콤한 것은

“헤겔 씨, 방에서 나온 게 있나요?”

“딱히. 마법을 이용해 살해한 건 아니야.”

“역시 그런가요…….”

공작 부인의 방문 앞에서 헤겔을 기다리고 있던 미렌은 실망감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헤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가 움찔거리곤 다시 내려 버렸다.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미렌이 고갤 들어 헤겔을 올려다봤다.

“큰일이네요. 이렇다 할 물증도 없고요.”

“물증을 찾아내려면 일단 이 가문 사람들의 방부터 뒤져 봐야지. 그런데 지금 그건 할 수가 없잖아.”

“그렇죠. 이올라오스 경이 직접 나서시는 거면 몰라도요.”

아무리 그녀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지만 태생부터 귀족인 이올라오스와 같을 수는 없었다. 아스모 공작은 제 집무실과 방을 조사한다고 하면 분명 거절할 터였다.

곁에 있던 로이아도 한 걸음 다가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평민이라 오히려 죄송하죠.”

평민 출신인 로이아는 기사가 되며 남작이 된 경우였다. 물론 고위 귀족들 사이에선 그다지 인정해 주지 않는 작위기도 했다.

“단장님께서 최대한 빨리 돌아오실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니요! 그건 괜찮습니다.”

“어째섭니까?”

로이아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던 그녀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사실 이올라오스 경과 경쟁 중이어서요.”

“경쟁 말씀이십니까?”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쪽이 폐하의 인정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노력하고 있는 거고요.”

헤겔은 이미 내기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던 로이아가 한 걸음 움직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지금 이럴 때가 아니군요.”

“네?”

“제게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마디 내뱉은 로이아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떤 기사들보다도 굳건해 보였다.

헤겔과 미렌은 홀린 듯 로이아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베르디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똑똑.

“계십니까?”

“……황성 측 기사인가? 무슨 일이지?”

집무실 문은 열리지 않은 채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렌이 눈을 크게 뜨자 로이아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공작 각하의 방을 확인해도 괜찮겠습니까?”

“하?”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탐탁지 않은 표정의 공작이 걸어 나왔다. 로이아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마주 바라봤다.

“자네 지금 뭐라 한 건가?”

“공작 각하의 집무실과 방을 확인해도 괜찮은지 여쭸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공작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현재 에드가 공작가의 부재로 인해 베르디움 공작은 제국에서 유일무이한 권력가의 사내였다.

그런 이의 방을 고작 평민 출신 기사 따위가 조사하겠노라 한 것이다. 그러나 로이아는 기죽지 않았다.

“책임지겠습니다.”

“하! 기고만장하기 짝이 없군!”

이를 악문 베르디움 공작이 손을 들어 올렸다. 로이아는 그것을 굳이 막으려 들지 않았다. 아마도 뺨 한 대로 값을 치르려는 의도인 듯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헤겔이 한 걸음 나섰다. 셋 중에서 그나마 지위가 가장 높은 이는 헤겔이었다.

“이봐, 공작. 폐하의 명령이야. 그쯤 하지 그래?”

“……폐하의 명령이라고?”

“그래. 다른 일개 마법사도 아니고 내가 온 걸 보면 모르겠나?”

헤겔은 큰 키로 아스모 공작을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그에겐 늙은 공작과는 다른 기백이 있었다.

결국 공작은 한 수 접기로 했는지 미렌과 일행을 무시하고 떠나갔다. 그의 뒤로 빈 집무실 문이 열려 있는 채였다.

“로이아 씨,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카르너 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대책이 없어도 그리 없을 수 있나? 이래서 기사들과 일하는 게 힘들다니까.”

“헤겔 씨, 어쨌든 결과가 좋았잖아요. 예쁘게 말해 줘요.”

헤겔로선 아마 뺨을 맞으려 했던 로이아가 걱정되어 한 말일 터다. 만일 공작이 이 일을 짚고 넘어갔다면 로이아는 기사단에서 중죄를 물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이아는 이미 아무 일도 없던 듯 딱딱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일행은 별 탈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영지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나 봐요.”

“그렇겠지. 요 몇 년간 베르디움 영지의 수확이 영 좋지 못했으니까. 아마 재정난으로 시달리고 있을걸.”

공작이 꺼내 둔 서류 중에선 그리 중요해 보이는 문서가 없었다. 책상 위를 바라보던 미렌은 문득 그 위에 있는 사라 베르디움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액자에 들어가 있는 그림이었다.

“정략결혼이라더니 부인의 초상화를 책상 위에 올려 두셨네요.”

“말대로 사랑은 없는 대신 애정은 있었나 보지. 결혼한 지가 벌써…… 수십 년은 지났을 거야.”

“예, 제 부모님과 연배가 비슷하시니까요.”

“우드 님의 부모님도 귀족이십니까?”

“네?”

저 멀리서 책장을 뒤지고 있던 로이아가 묻자 미렌이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또 다른 아버지인 에드가 공작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던 터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부모님은 시골에서 복숭아 농사를 하세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로이아 씨, 책장엔 별다른 게 없나요?”

미렌이 능숙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며 로이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책 한 권을 넣고 다른 책을 꺼내고 있었다.

“없습…….”

쿠궁.

순간 집무실에 있던 셋 모두 놀라 행동을 멈췄다. 집무실 바닥이 작게 흔들리는 것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다.

멈칫했던 로이아는 꺼내던 책을 마저 빼 버렸다. 그러자 다시금 소음과 함께 책장이 갈라졌다. 드러난 것은 조그만 방이었다.

“이게…… 뭐죠?”

“뭐긴, 공작의 비밀 공간이지. 하긴, 이렇게 거대한 건물에 숨겨 둔 공간 하나 없을까.”

“들어가도 될까요?”

“저쪽은 이미 들어갔는데?”

미렌이 고개를 돌리자 로이아는 이미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녀도 헤겔과 함께 바깥보다 다소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 모두 다 베르디움 공작 부인 아닌가요?”

방 안은 누군가의 초상으로 벽면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그의 죽은 부인, 사라 베르디움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초상과는 달랐다. 헤겔도 그 부분을 느꼈는지 초상 하나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모두 몰래 바라본 시선이야.”

그의 말대로 공작 부인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 이것을 그렸다면, 아마도 숨어서 몰래 그린 그림일 터였다.

헤겔과 달리 방 안을 구석구석 뒤지던 미렌은 구석에 있는 서랍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 손을 넣었던 그녀가 씩 웃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찾았어요.”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수면초 가루였다.

***

증거를 챙긴 미렌은 그것을 로이아에게 맡긴 뒤 우선 헤어졌다. 로이아가 먼저 이올라오스에게 보고하고서 정식으로 공작을 체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홀로 백작가의 앞까지 미렌을 데려다준 헤겔이 그녀에게 들어가 보란 듯 고개를 까닥였다.

“……자러 갈 거지?”

“그래야죠. 아직 해도 지지 않았으니까 돌아가서 할 일이 많아요.”

“어때?”

“뭐가요?”

헤겔이 뭘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던 미렌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더니 다시금 물었다.

“황후로 사는 것…… 어떠냐고. 네가 그랬잖아. 멍청하게 죽은 폐비로 남고 싶지 않다고.”

“아직 제가 목표한 바는 멀지만, 헤겔 씨, 저 지금 행복해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줄로만 알았어요. 놓아주는 게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미렌이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웃는 게 어색한 듯 입가를 가려 버렸다.

“폐하를 사랑하게 됐어요.”

“…….”

“그분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초라해지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고마워요, 헤겔 씨.

그녀의 상기된 한마디가 헤겔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침묵이 가라앉자 픽 웃으며 표정을 뒤바꿨다.

“그거면 됐다.”

“헤겔 씨도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세요.”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럴 일 없어.”

“이 몸은 비록 비루한 평민이지만 저쪽은 아니잖아요. 도움 될 때가 있을 거예요.”

미렌이 평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헤겔은 순간 울컥했다. 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비루하……! 하, 됐어.”

“헤겔 씨?”

헤겔은 왜인지 기분이 나빠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도대체 왜 자신의 기분이 나빠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잊고 있나 본데.”

“무엇을요?”

“둘 다 살리기로 했으면 모두 다 책임져. 네 지금 몸도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이야. 네 가족들도.”

“……기억할게요.”

웃음기를 거둔 채 말하던 헤겔은 순간 제 자신에게 놀라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미렌에겐 인사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났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황후의 몸을 버리고 싶지 않다며 울던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저 그 초라한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미렌 우드의 삶을 소홀히 하는 것 같자 이상하게 서운해졌다.

미렌 에드가도, 하물며 미렌 우드도 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헤겔, 헤겔 씨!”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헤겔을 붙잡은 것은 미렌이었다. 그녀는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가 헤겔이 멈추자 서둘러 그것을 놓았다.

대신 헤겔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둘 중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을게요.”

미렌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다짐했다.

헤겔은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마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도저히 그 눈빛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미렌 에드가와 제 남편인 라이언도 진심으로 사랑해요. 하지만요. 미렌 우드도, 미렌 우드의 가족도, 그리고 미렌 우드를 아는 모든 지인도.”

“…….”

“모두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헤겔은 그 한마디에 제 속에 쌓여 있던 모든 서운한 감정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탈할 정도로 허무한 감정들이었다.

뒤이어 따라오는 미렌의 웃음 한 조각에…… 헤겔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가 처음 제게 복숭아를 주었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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