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다
“그런 적 없다니까!”
다음 날 오후. 미렌은 황후의 낮잠 시간을 핑계로 평민이 되어 베르디움 공작가를 찾아왔다.
로이아와 함께 정식으로 베르디움 가문의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난관은 아들인 다이오스 베르디움부터였다.
“내가 어머니랑 싸웠다고? 하, 참나. 누가 그래? 대체 누가 그랬는데?”
“다이오스 씨, 진정하세요. 저는 그저 최근 사이가 좋지 않으셨던 이유를 여쭸을 뿐입니다.”
“이게, 평민 주제에 감히!”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분노한 다이오스는 결국 손을 들었다. 미렌이 순간 놀라 눈을 감았을 때였다.
탁.
다이오스의 손목을 잡은 것은 곁에 있던 로이아였다.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다이오스를 제지한 채 물끄러미 얼굴을 마주했다.
“이, 이것 안 놔?! 계집이 기사랍시고……!”
꽈악. 다이오스의 손목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아아악! 놔, 놔! 놔주세요!”
거의 손목이 부러지기 직전까지도 놓아주지 않던 로이아는 다이오스가 애걸복걸하자 그제야 힘을 풀었다. 다이오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제 손목을 품으로 가져갔다.
그 뒤로 로이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미렌의 뒤로 돌아가 시립했을 뿐이었다.
“다이오스 씨, 진정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조사를 위한 질문이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씩씩대던 다이오스는 미렌이 연이어 다독이자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진정했다. 내일쯤이면 푸르게 멍이 들 손목을 매만지던 다이오스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와 내가 최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일주일 전이라고! 바로 사흘 전만 해도 같이 쇼핑을 하러 갔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원인은 뭡니까?”
“그건…….”
그는 어쩐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 로이아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어머니가 황후의 티 파틴지 뭔지에 다녀오신 뒤로 이올라오스의 이야기를 꺼내잖아. 내가 검에 흥미가 없는데 왜 기사가 돼야 해? 쯧, 기사처럼 멍청한 일이 어디 있다고.”
“이올라오스 경이요?”
“그래. 트리온 백작가와 마주할 때가 있으면 으레 있는 말싸움이었어. 시종들에게 물어봐도 좋아. 어릴 때부터 매번 있는 일이었다고.”
다이오스는 최대한 로이아에게 직접적으로 들리지 않게끔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이올라오스의 부관인 로이아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질문을 마친 미렌은 잠시 다이오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비록 어머니와 다정한 모자 사이는 아니었지만, 말대로 유별나게 관계가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데려온 손님들로 인해 변이 일어난 만큼 그들을 찾으려 많은 인력을 풀고 있기도 했으니까.
“근데, 너.”
“예? 저요?”
“그래, 평민. 넌 누군데 폐하의 명을 받고 이올라오스를 대신해?”
사실 폐하가 아니라 황후 전하를 대리해 온 것이었지만 미렌은 다른 이들에겐 조금 달리 설명했다. 공작가 출신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다간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일회성으로 함께하게 됐습니다. 특별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 네 이름이 뭔데?”
“전…… 미렌 우드입니다.”
우드, 미렌 우드. 그녀의 이름을 곱씹어 보던 다이오스가 문득 소파에 거만하게 기댔다.
“내가 좀 놀아 줄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니, 네 얼굴이 봐줄 만해서. 이 일이 끝나면 특별히 내가 놀아 주겠다고.”
“아뇨, 거절하겠습니다.”
미렌의 대답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거절당한 다이오스가 얼굴을 붉히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감히 평민 주제에! 네가 내 명령을 거절해?”
“명령이셨습니까?”
“그래!”
“하지만 제가 다이오스 씨의 명령을 들어줄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아, 그러니까 왜!”
다이오스가 아이처럼 발을 쾅쾅 구르기 시작했다. 미렌은 죽은 공작 부인이 아이를 참 잘 키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다이오스가 덥석 손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이거 안 놓으십니까?”
“싫은데? 일 끝나고 다시 만난다고 약속해 줘.”
미간을 좁힌 미렌이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치려 했을 때였다. 누군가 다이오스의 손목을 잡아 떨쳐 내 버렸다.
당연히 로이아인 줄 알고 고개를 돌렸던 미렌은 의외의 인사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가 뭔데 만나 달래?”
“……헤겔 씨?”
“네가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얘 별로 안 예뻐. 성격도 더럽고.”
미렌의 앞을 가로막고 선 헤겔이 거만한 눈빛으로 다이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미렌에 대한 비방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그러니까 멋대로 손목 같은 건 잡지 말지? 네 손이 더러워진다고.”
“헤겔 씨, 지금 저 도와주시는 거 맞는 거죠?”
“어. 맞아.”
다이오스는 지금 벌어진 상황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뒤늦게 삿대질했다.
“위대한 남쪽 마법사?!”
“사람한테 삿대질은 하지 말고. 마법사 처음 보나?”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폐하의 부름을 받았지. 남쪽 마탑이 황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지 내가 설명을 해야 할까?”
“돼, 됐어!”
결국 다이오스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로이아, 헤겔, 그리고 미렌만이 남은 응접실에서 헤겔이 먼저 다이오스가 앉아 있던 소파에 털썩 앉았다.
미렌이 서둘러 헤겔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말했잖아.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자문할 마법사를 보내는 게 어디인 줄 알아?”
“남쪽 마탑인 건 알고 있죠! 하지만 그래도 헤겔 씨가 오는 건 이상하잖아요.”
황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남쪽 마탑은 다른 마탑들과는 달리 특수했다. 마법에 관해 자문이 필요할 때면 남쪽 마탑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남쪽 마탑이더라도 마탑주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제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왔군요?”
“……무슨, 전혀 몰랐거든. 우연히 왔는데 네가 있었던 거지.”
“그 ‘위대한 남쪽 마법사’가요?”
“그래. 지금 의심하냐?”
헤겔과 미렌이 괜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로이아가 시종들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로이아는 헤겔에게 짧게 묵례하곤 미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곧 공작 각하께서 도착하신다는군요.”
“벌써요? 시간이 꽤 빠르네요.”
“가문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어서 해결하고 싶다 전하셨습니다.”
“부인이 죽었는데 그저 불미스러운 일이라…….”
한쪽 눈을 찡그린 미렌은 자리를 정리했다. 다이오스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공작을 조사해야만 했다.
“그래서 범인은 짐작이 가고?”
“그건 아직 몰라요. 다만 죽은 공작 부인의 방에 수면초 향이 남아 있었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재웠단 말이지? 깐깐하기로 유명한 공작 부인이 모르는 사람이 건넨 걸 복용했을 리도 없고.”
“맞아요. 면식범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그 순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베르디움 공작, 아스모 베르디움이었다.
“베르디움 공작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이올라오스 트리온 경을 대신해 조사 나온 미렌 우드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로이아 테넷입니다.”
“반갑소. 그런데 이쪽은…….”
공작의 눈길이 소파에 앉아 있는 헤겔을 향했다. 눈총을 받자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선 헤겔이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
“헤겔 카르너.”
“……말투가 영 불손하시군. 듣던 대로 남쪽 마탑주는 예의라곤 배운 적 없는 평민 출신이라 그러한가?”
“배우고도 못 하는 귀족 출신보단 낫지 않나?”
헤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렌이 그를 잠시 노려보자 입을 삐죽 내민 헤겔은 대화에서 빠지겠다는 신호로 뒤로 물러섰다.
미렌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공작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부인분과는 사이가 어떠셨습니까?”
“글쎄……. 우린 비록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파트너로서 사이는 나쁘지 않았소. 사랑은 없었어도 애정은 있었지.”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하지 못할 건 뭔가. 귀족들 간의 결혼이 다 이런 것을.”
그가 기품 있게 손을 흔들자 시종 한 명이 차를 내왔다. 공작은 느릿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반면 미렌은 다이오스 때부터 올려져 있던 제 찻물이 다 식었음을 알았지만 바꿔 달라 청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베르디움 영식께서 데려오신 손님분과는 마주친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날 밤 나는 출타 중이었소. 영지에 볼일이 있어 지방에 갔다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지. 그리고……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소.”
“이런,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대답을 마친 공작은 습관적으로 차를 마셨다. 그는 이후로도 대답을 할 때면 찻잔을 잠시 내렸다가 대답을 마치면 마시기를 반복했다.
조사를 마칠 때까지 그의 손에서 찻잔이 떠나는 일은 없었다.
“이쯤 하면 되었나?”
“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디 사건이 어서 해결되길 바라지. 내 가문에서 자꾸만 말이 나오는 걸 원하지 않소.”
그는 모든 질문에 있어서 성실하게 답했으며 숨기려 들지 않았다.
베르디움 공작이 떠난 뒤 정적이 감돌자 로이아가 미렌에게 다가와 물었다.
“영식분과 마찬가지로 거짓은 없던 것 같습니다.”
“네, 그렇네요. 공작 부인이 죽은 날 지방에 있었던 것도 확인이 되었고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저 뒤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헤겔에게 다가갔다.
“헤겔 씨, 이만하고 부인의 방으로 가 보시죠. 마법적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아, 그래.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뭐가요?”
“찻잔으로 입가를 가리는 저 버릇 말이야.”
미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버릇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은가?
“가끔씩 입가를 부채로 가리는 부인들이 있어. 다들 왜 그러는 줄 알아?”
미렌은 문득 공작 부인이 떠올랐다. 티 파티에서 만났던 그녀는 늘 부채를 소지하고 나타났는데, 때때로 그것을 펼쳐 입가를 가릴 때가 있었다.
그건 보통…….
“숨기기 위해서, 아닌가요?”
“그래. 그런데 부채는 보통 여성들의 액세서리지. 그는 부채 대신 찻잔을 사용한 거라고.”
“하지만 공작의 말은 대부분 진실이었어요.”
“그럼 진실이 아니라 거짓을 숨긴 거겠지.”
‘사람들은 거짓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든.’
라이언의 한마디가 벼락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