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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57)화 (57/133)

들키다

“죄송합니다. 숨기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폐하를 뵙는 게 오늘 처음이라 긴장했었습니다.”

미렌은 곧장 라이언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사과를 올렸다. 누가 봐도 평민처럼 보이는 인사였다.

라이언은 그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았지만 일어서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두려운가?”

“그……. 아무래도 살면서 폐하를 뵐 일이 생길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두렵다기보다는요.”

“그럼 두렵지 않나?”

미렌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재빨리 다시 숙였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라이언과 눈이 마주친 것은 물론 그 뒤에 선 이올라오스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두렵다기보다는…… 예, 어렵습니다! 폐하께선 제게 어려우신 분입니다.”

“그렇군.”

심장이 콩콩 뛰어 댔다. 이게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당황스러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미렌은 그제야 라이언이 제게 신하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며 투덜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러니 다들 두려워하는 것 아니냔 말입니다……!

“네가 구해다 준 아르테미스는 나의 아내가 복용하고 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필요한 분께 돌아가게 되어서…….”

“그 아르테미스가 내 아내의 목숨을 살렸지.”

라이언은 그 뒤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렌은 무릎을 꿇은 채 이따금씩 다리가 저려 올 때면 발가락만 꿈지럭거리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고개를 들지 못해 귀만 쫑긋거렸는데, 라이언은 이올라오스와 대화를 몇 번 나누더니 이내 일어서 떠나 버렸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싱거운 결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온 이는 이올라오스였다.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셨을까요?”

“예. 방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엇을요?”

다짜고짜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터라 미렌은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물었다. 이올라오스는 그런 미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신다고요.”

“……네? 언제요? 언제 절 죽인다고 하셨다가 살려 준다고……?”

“폐하의 앞에서 거짓말은 평민의 경우 사형입니다.”

미렌이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사, 사형?

그럼 지금 제 목이 날아갈 뻔했다는 말인가?

이올라오스는 제 허리에 찬 검을 가리키며 이걸로 당신을 벨 뻔했다고 다정하게 웃으며 말해 왔다. 미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우드 씨가 아르테미스를 찾아 황후 전하의 목숨을 구하셨잖습니까. 폐하께선 그걸로 용서하겠노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 말씀은 안 하셨던 것 같은데요.”

“우드 씨를 죽이려 했다면 폐하께선 직접 제 검을 뽑아 베어 내셨을 겁니다. 평민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으니까요.”

미렌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이올라오스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헤겔이 어째서 이올라오스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는 이 몸으로 라이언의 눈에 띄지 말아야지.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

“우드 씨, 저는 이만 도망친 용의자들을 잡기 위해 기사 몇 명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그럼 저는 저택으로 돌아가면…….”

될까요? 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물으려 했다.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대답을 가로챘다.

“폐하께선 우드 씨에게 이 저택에서 내부 공범을 찾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거짓말이죠? 고작 평민인 제가 어떻게 공작가에서 범인을 찾습니까?”

“고작 평민이라니요. 우드 씨는 지금 엄연히 황후 전하의 명을 받고 그분을 대신해 오셨습니다. 단순한 평민이 아니십니다.”

이올라오스는 이러다 말실수로 또 사형 당하겠다며 농담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농담인가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떠나기 전 남은 기사들에게 이야기를 해 둘 테니 협조는 걱정하지 말라며 전해 왔다.

그리고, 이올라오스는 빠르게 길을 떠났다.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아직 혼란스러운 베르디움 공작가의 저택 내부를 살폈다.

지금 시간, 점심시간이 지난 직후.

라이언과는 저녁 식사를 약속했었다. 그녀는 그 시간이 되기 전에 황후의 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현재 부단장 직을 겸임하고 있는 로이아 테넷입니다.”

“아, 네. 저는…… 그냥 미렌 우드입니다. 황후 전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자신을 부단장이라 소개한 로이아는 여기사였다. 그녀는 일전에 지갑 도난 사건으로 미렌의 몸을 수색했던 이기도 했다.

늘 웃고 있는 이올라오스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로이아는 ‘철벽의 로이아’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철벽은 그녀가 방패를 잘 다루어서 받은 칭호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우드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 아니요. 편하게 미렌이나 우드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저는 평민이니까요.”

“아니요, 우드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미렌이 멍한 눈으로 로이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래서 ‘철벽’이라고 불렸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로이아가 평연한 목소리로 ‘이유가 필요하십니까?’라고 물어 왔다. 미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트리온 단장이 우드 님을 잘 보필하라 하셨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할 말을 마친 로이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미렌의 뒤에 섰다. 지나가던 시녀들 몇 명이 미렌과 로이아를 발견하곤 흠칫하며 빠르게 자리를 뜨기도 했다.

평민이라는 제 신분을 이용해 시종들에게 친근하게 물어보려던 계획이었던 미렌은 제 이마를 붙잡았다. 로이아가 제 뒤를 지키고 있는 이상 그 계획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 테넷 경.”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시종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할 계획인데, 표정을 조금만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제 표정이 문제입니까?”

이제껏 미동도 없던 로이아의 얼굴 표정 중 눈썹 하나가 짧게 까닥였다. 미렌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겨우 말했다.

“시종들, 특히 시녀들이 테넷 경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종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은 이미 제가 마쳤습니다.”

“아뇨, 그건 어제 들어왔던 외부인들이 목적이었으니까요. 지금 우리의 목표는 내부인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편하게 다가가야 도움 되지 않을까요?”

로이아가 미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짜악!

로이아는 제 손으로 직접 자신의 뺨을 내려쳤다. 커다란 소음에 지나가던 시종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미렌이 허둥지둥 아무 일도 아니라며 그들에게 손을 내젓자 그제야 시선들이 거둬졌다. 로이아는 부어서 붉게 물든 뺨으로 자신보다 키가 조금 작은 미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입꼬리를 조금 올려 봤습니다. 이러면 됐습니까?”

“전혀 안……, 아니, 된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그만 때리세요.”

“예.”

로이아가 다시 손을 들려 하자 미렌은 서둘러 그거면 되었다며 일단락지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그녀가 한 번 더 제 뺨을 내려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빨래를 하러 가시나 봐요. 잠깐 몇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바구니를 들고 가는 시녀들에게 미렌이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갔지만, 모두 저들끼리 속닥이다 재빨리 자리를 떠 버렸다.

그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미렌도 지쳐 잠시 탐문을 멈췄다. 강제성을 띄지 않고 질문을 던졌더니 아무도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나서 봐도 되겠습니까?”

“테넷 경이요?”

고개를 끄덕인 로이아는 당장 복도에 서 있던 시종 무리에게 다가갔다. 미렌이 기대하지 않은 눈으로 로이아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로이아는 곧 시종 무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탐문에 응하시겠다는군요.”

“정말요?! 친절도 하셔……라……?”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렌은 로이아가 어떻게 한 번에 해냈는지 짐작이 갔다.

“그럼 모두 일하시는 중이니 뜸들이지 않고 묻겠습니다. 혹 최근 들어 공작 부인의 건강은 어떠셨나요?”

“그건 시녀들이 더 잘 알겠지만…… 우리가 알기로 병이 있다거나 하진 않으셨습니다. 아, 다만 얼마 전 황후 전하의 티 파티에 다녀오신 뒤로 잠을 설치셨어요.”

“티 파티요?”

“네……. 거기서 큰 실수를 하셨다고…….”

시종들은 거기까지 말하다 저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눈치껏 숨기는 게 있다고 파악한 미렌이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가족분들과는 사이가 어떠셨습니까?”

“다이오스 님과 최근에 하, 한 번 싸우신 적이 있긴 했는데…….”

“아드님과요? 이유도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흐음……. 미렌이 턱을 짚고 고민하는 사이 시종들은 먼저 떠났다.

그 뒤로도 시종들에게 탐문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미렌은 로이아에게 말했다.

“테넷 경,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입니다.”

“그럼 오늘 조사는 이쯤 하고, 내일은 정식으로 공작 가문 분들과 시간을 가져 봐야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바깥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로이아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사 한 명을 불러 미렌을 배웅시켰다.

아무래도 로이아는 범죄 현장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새운다는 모양이었다. 미렌이 짧은 인사를 마치고 베르디움 공작가를 나왔다.

백작가로 돌아갔지만 다들 저녁 식사를 하느라 바빴다. 식사를 권하는 집사에게 미렌은 돌아오며 간단하게 챙겼다 말하곤 어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빨리, 빨리 돌아가서 라이언과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폐하께서 곧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마리아, 준비를 부탁하지. 물 한 잔도 같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미렌 에드가의 몸은 목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제 목을 가다듬으며 라이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라이언이 도착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미렌!”

얼굴 가득 웃으며 다가온 라이언이 그리운 얼굴로 미렌을 제 품 가득 껴안았다.

아니, 껴안으려 했다.

그걸 밀어낸 것은 미렌이었다.

“……미렌?”

“라이언.”

“왜 그리 딱딱하게 부르는 거야? 미렌, 내가 뭐라도 잘못했나?”

라이언이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강아지 같은 얼굴로 그녀를 대해 왔다. 미렌은 허, 하고 웃었다가 서둘러 제 얼굴을 가다듬었다.

“라이언, 신하들이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했었죠?”

“맞아.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 미렌, 내가 그리 두려운가?”

이번엔 그 넓은 어깨가 축 떨어졌다. 미렌 우드를 대할 때만 해도 꼿꼿하다 못해 강직하게 버티고 있던 어깨였다.

“저랑 약속하세요.”

“무슨?”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도 제게 하는 것만큼, 아니, 반만큼은 하시겠다고.”

“갑자기……?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거야?”

“아뇨, 신하들이 모두 라이언을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라이언, 사실 제게만 다정하신 것 아닙니까?”

미렌의 마지막 질문에 라이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한가득 웃어 왔다. 그러곤 미렌의 어깨에 제 이마를 묻으며 속삭였다.

“맞아. 드디어 알아 버렸군. 나는 당신에게만 이토록 다정해.”

“그러지 마세요. 소문이 좋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앞에서만 웃음이 나는 걸 어찌할까. 도저히…… 도저히 웃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

라이언은 목 아래로 낮게 웃으며 미렌을 안아 왔다. 그녀도 하는 수 없이 라이언을 마주 안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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