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다
“황성에서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뭐?! 어서 안으로 모시게!”
사람들이 모여든 저택의 앞. 이올라오스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린 미렌이 문 앞에 서서 그곳을 살폈다.
넓디넓은 정원과 함께 3층 정도의 거대한 저택은 베르디움 가문의 사유지였다. 수도 내에서 이 정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대단한 부자라는 의미기도 했다.
‘하잘것없는 아이지만, 제국에 힘이 되기 위해 열심히 수양 중이랍니다.’
상속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공작 부인은 아이의 이야길 꺼내며 자그맣게 웃었다. 비록 정치적으로 함께할 수는 없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으며 차를 마시던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 이가 죽었다.
그것도 황성 다음으로 보안이 철저하다는 공작가의 저택 내부에서.
“어머니, 어머니……! 모자란 아들을 두고 가십니까? 으흐흑…….”
이올라오스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렌도 들어 본 바가 있는 이였다.
다이오스 베르디움.
그는 공작 부인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약관의 나이를 넘어 곧 베르디움 가문을 물려받는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기도 했다.
다만, 최근 들어 어머니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언가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 못한 그는 자주 이올라오스와 비교 당했는데, 어머니와 이것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황성에서 왔습니다. 용의자들의 소재는 파악되었습니까?”
“이미 수도를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바로 어제 제 아들이 데려온 손님들이었는데, 아침이 되니 모두 사라져 있더군요.”
대답을 한 이는 울부짖는 아들 대신 그의 아비인 베르디움 공작이었다. 다소 초췌하긴 했지만 그나마 아들보다는 나은 상태였다.
“아드님께선 그들을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다이오스! 그만 울고 대답하거라!”
“……흐윽, 어제 들어간 선술집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워낙 취해 있던 터라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공작 각하, 시종들을 모두 모아 주십시오. 그들의 인상착의를 물어야겠군요.”
이올라오스가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미렌은 피가 흩뿌려진 공작 부인의 방을 관찰하고 있었다.
시체는 이미 치워진 듯 없었지만 침대 위에는 피가 낭자했다. 베개며 이불이며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살피던 미렌은 제 발치까지 튄 핏자국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미렌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어허, 시종들은 모두 조사를 위해 정원에 모이라 했을 텐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아, 아니. 전 시종이 아닙니다. 저는…….”
“시종도 아니야? 이런 의심스러운 녀석을 봤나! 기사님들, 기사님들!”
뒷덜미가 잡힌 미렌이 고개를 들자 그곳엔 공작 가문의 병사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누가 봐도 평민처럼 옷을 입고 있던 미렌이라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가 손까지 내저어 가며 부정했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목덜미를 잡은 채 움직이려 들었다.
“제 말 좀……!”
“그 손 놓지.”
“누구, 윽!”
남자의 손이 단번에 뒤로 꺾였다. 겨우 손아귀에서 벗어난 미렌이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 선 순간이었다.
이올라오스가 저 멀리서 황급히 달려왔다.
“폐하! 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폐…… 폐하?”
손이 꺾였던 남자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미렌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라이언의 검은 눈은 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햇빛에도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숨조차 멈춘 채 그 눈을 응시하다,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눈을 함부로 바라보는 것은 엄연한 모독죄에 해당했다.
“폐하께서……!”
“폐하, 불미스러운 일로 노신의 저택에 방문하시게 해 황송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아아, 먼저 사라 베르디움에게 태양신의 가호가 있길 빌지. 자네는 괜찮은가, 베르디움 공작.”
사라 베르디움은 공작 부인의 이름이었다. 죽은 제 부인의 이름이 불리자 공작은 담담히 눈을 내리깔며 적당히 예의 있는 답을 전했다.
이올라오스를 필두로 모여든 기사들은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곧 무릎마저 꿇을 기세에 라이언이 먼저 한 손을 들었다.
“그만. 이올라오스, 공작과 더 대화를 나눌 테니 조사를 속행하도록.”
“예, 폐하.”
라이언은 공작과 함께 돌아섰다. 구해 준 미렌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오히려 미렌이 홀로 남아 잡혔던 목덜미만 쓰다듬었다. 그는 꼭 감정이 사라진 인형 같았다. 자신이 알던 다정한 남편, 라이언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은…….
“우드 씨?”
“네! 부르셨어요, 이올라오스 경?”
“괜찮습니까? 오해를 받은 것 같던데. 내가 우드 씨에게 더 신경을 써 주지 못했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시종처럼 입고 있긴 했잖아요.”
“무엇을 구경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아, 그게…….”
미렌은 양문이 모두 열린 곳에 서서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가 너무 많이 튀어 있어서요. 저 넓은 침대뿐만 아니라 문 앞까지 튀어 있잖습니까?”
“흐음, 아직 공작 부인이 살해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복수를 위해서라 가정한다면 과시하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쪽을 보세요.”
미렌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핏방울들이 꼬리를 그리며 길게 흩뿌려져 있었다. 위치는 문의 정중앙이었다.
“그리고 저기도.”
“창문……에도 있군요?”
“문과 창문뿐만 아니라 바닥에도 드물게 있어요. 경께서도 검을 배웠으니 아시겠지만 이건 사람을 베거나 찔렀을 때 나오는 핏자국이 아닙니다.”
“그렇죠. 보통 그럴 때는 좀 더…….”
“핏자국이 두껍고 길죠.”
“잠깐, 그럼 이건 일부러 피가 묻은 검을 휘둘러 낸 자국이란 겁니까?”
“아마도요.”
몸싸움을 하다 피가 튀었다기엔 침대에 묻은 피가 너무 많았다. 저 정도 피를 흘렸다면 침대에서 이미 중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만일 복수를 위한 과시가 목적이었다면요.”
“…….”
“조금 더 대담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이건 너무.”
“너무 은밀하군요.”
미렌이 하려던 말을 이올라오스가 가로챘다. 확실히, 그녀가 말을 하기 전까진 알아챌 수도 없을 정도로 은밀한 흔적이었다.
이올라오스가 잠시 고민에 빠진 사이 미렌은 침대에 조금 더 다가갔다. 누군가 그녀를 말리려 하는 것을 이올라오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시트를 잡지 않은 채 침대를 내려다보던 미렌이 순간 코를 움찔거렸다. 가득한 피 냄새 사이로 무언가…….
무언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단장, 시종들로부터 조사를 마쳤습니다. 테룬 공국 출신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혀 제국 억양이 아니었다더군요. 영식께서 가셨다는 선술집에 가 봐야 알겠지만, 테룬 공국의 말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어디서 맡아 보았지?
어지러울 정도의 피 냄새에 미렌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피 냄새가 너무 지독해 희미하긴 했지만 이건 분명 그녀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자주 맡아 본 향.
“선술집에 기사들을 보내십시오. 일단 그들의 소행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으니 내부 조사는 이쯤…….”
“아뇨, 이올라오스 경.”
침대 앞에 주저앉은 채 계속해서 향을 맡던 미렌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올라오스의 말을 멈추게 한 그녀는 뒤돌아서 그를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미렌이 씩 웃었다. 언젠가 복숭아를 수확할 때와 같은, 뿌듯함이 담긴 미소였다.
“내부 조사를 조금 더 하셔야겠습니다.”
“어째섭니까?”
“경께서도 맡아 본 적 있으시잖아요.”
“예?”
“수면초. 피 냄새 아래에 깔려 있는 향이에요.”
***
미렌이 수면초를 언급한 뒤부터 조사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야 당연했다.
시종들의 말에 따르면 공작 부인은 불면을 앓은 적이 없었다. 그 말은 결국 누군가 공작 부인에게 수면초를 일부러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것마저 외부의 소행일 리가 없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공작 부인이었으니만큼 그녀는 자신이 아는 얼굴이 건넨 것들만 먹었으니까.
“알아낸 게 저자라고?”
“예, 폐하. 우드 씨가 알아내셨습니다.”
라이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렌은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예의를 갖춘 자세로 라이언을 응대했다.
“수면초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군.”
“아, 네. 영지에서도 약초꾼으로 조금씩 활동하고 있는 터라…….”
“약초라……. 그럼 아르테미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아르, 테미스요?”
미렌은 슬쩍 이올라오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함부로 대답을 해도 되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올라오스는 그녀의 눈길에 신호도 주지 않았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라이언의 뒤에 시립해 있었다.
결국 속으로 한숨을 내쉰 미렌이 입을 열었다.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피는 전설의 꽃이라고요.”
“약초꾼들 사이에선 유명한 소문인가 보군.”
“예, 약초꾼이라면 모를 수 없는 꽃입니다. 만병을 치유한다니까요.”
소파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가볍게 다리를 꼬았다. 그는 팔걸이 위를 검지로 툭, 툭 치며 말했다.
“카르너는 프레니티 영지의 약초꾼과 함께 그것을 찾아내었다고 말했었는데.”
그 한마디에 미렌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녀가 방금 한 말이 거짓말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숨기려 든 것은 아니었는데, 괜히 눈에 띄기 싫어 말하지 않은 게 독이 됐다.
“헤겔 카르너가 말한 분홍색 머리의 약초꾼이…… 네가 아니었나?”
망할, 헤겔 카르너!
흔치 않은 분홍색 머리까지 말할 이유는 대체 뭔가? 물론 그도 이 보고를 올릴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예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래도 원망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렌은 고개를 숙인 채 짧게 이를 악물었다가 평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제가 맞습니다. 하하, 그 일을 깜빡하고 있었네요.”
멍청해 보이는 제 대답에 미렌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생각나는 변명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래, 황제가 두려워서 잊어버린 거라고 치자. 그러면……!
그때였다. 라이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봐, 미렌 우드.”
“……예?”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한 미렌이 슬쩍 눈만 들어 라이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미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저 멀리, 창문 너머 보이는 황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곳에 가면 자신을 지루하지 않게 할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그야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겠죠?”
“틀렸어.”
그 순간 라이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잠깐이나마 흥미로운 얼굴로 미렌을 바라봤다.
라이언이 느릿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거짓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