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55)화 (55/133)

첫 번째 내기

“헤겔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게.”

헤겔이 곤란한 얼굴로 제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라고 해서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황성에 침입한 뒤 아르테미스를 훔치는 것까지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물론 시녀들이 시간마다 주방을 지키고 있는 탓에 공을 들이긴 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아르테미스를 집어 든 헤겔은 곧바로 누군가 주방에 들어오는 소리에 은신 마법을 실현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주방에 들어온 이는 마침 아르테미스를 가지러 온 마리아였다.

사라진 것을 확인한 마리아는 곧장 제 뒤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에게 명령해 주방을 잠갔다. 그리고 곧바로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사라진 아르테미스의 범인을 찾으라고.

마리아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범인을 수색해 갔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놀라거나 머뭇거렸다면 헤겔은 그 즉시 이동 마법을 외우고 말았을 것이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렴.’

마리아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시녀들이 움찔거렸다. 물론 숨어 있던 헤겔도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날 선 상황에서 함부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간 누군가 공간이 미세하게 어그러지는 감각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헤겔은 일단 은신 마법을 유지한 채 그곳에 머물렀다.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시녀장님, 수상한 사람을 목격한 자가 없습니다. 또한, 들어왔던 외부인들 중에선 아직 아무도 나간 이가 없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폐하께 보고를 올리렴.’

‘……!’

놀란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헤겔도 숨을 들이켰다. 마리아가 저토록 빠르게 결정을 내릴 줄 몰랐던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빠져나간 후에 황제의 귀에 들어가야 했다. 헤겔의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시녀장님, 폐하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시다는 보고입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 현장을 유지해야 한다. 다들 몸가짐에 유의하렴.’

‘네!’

시녀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현장을 유지했다. 그들이 어떤 소리도 내지 않자 헤겔이 안쪽 볼을 짓씹었다.

감각이 예민한 이라면 공간 마법을 눈치챌 수도 있는데……. 그러나 태생부터 검사인 황제의 앞에서 마법을 실현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헤겔이 마침내 축축해진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쾅!’

‘수상한 이를 잡았습니다!’

‘고프리도 경, 당신……!’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기사들에게 억압된 채 끌려 들어왔다. 헤겔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그는 눈을 똑똑히 뜬 채 이동 마법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기우였을까.

‘…….’

‘…….’

은신 마법을 사용한 채 이동 마법을 실현시키는 도중 마리아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기분은.

분명 헤겔의 자리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텐데, 마리아는 그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이동할수록 마나의 파동이 커지기에 헤겔은 당장 황성 바깥까지 워프 할 수는 없었다. 내부 정원에 굴러 떨어지듯 이동한 헤겔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가 은신 마법으로 기사들의 눈을 피해 외부 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없어졌다, 고요?”

“그래! 이미 여기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어. 너 정말 여기서 잠든 것 맞아?”

“약속했었잖아요! 더군다나 제가 이곳에 왔을 땐 기사들도 없었다고요.”

마주 선 헤겔과 미렌이 언성을 높이는 듯하다가도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시녀들과 기사들에게 들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지금 여기서 잠들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황후인 제가 여기서 잠들었다간 마리아가 기겁할 겁니다!”

“그럼 어떡해? 네 몸이 사라졌다고! 누가 납치한 걸지도 모르는데?”

“기다려요, 당장 침실로 돌아가서 잠을 잘 테니. 헤겔 씨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요.”

미렌은 혹시 수풀 너머에 있는 마리아가 이곳으로 다가올까 자꾸만 제 뒤를 힐끔거렸다. 헤겔은 일단 숨어든 입장이니까.

“그럼 잠든 네 몸은?”

“몸이 좋지 않아 낮잠을 잔다고 한 다음, 알아서 빠져나갈게요. 제 걱정은 마세요.”

“그게 말처럼 쉽……!”

“전하, 괜찮으십니까? 걸음이 힘들진 않으세요?”

마리아의 한마디에 헤겔과 미렌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다시 은신 마법으로 스르륵 사라졌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 조금만 더…… 바람을 쐬다 들어가지.”

“그럼 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네. 곧 돌아갈 생각이야.”

“네, 전하.”

미렌은 조금 전까지 헤겔이 서 있던 방향을 응시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당장, 탈출하세요.

라이언의 태도로 보아 이 일을 쉽사리 넘길 기색이 아니었다. 미렌은 먼저 헤겔을 빠져나가게 하는 게 급선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 순간.

주변을 돌아보던 미렌은 직감적으로 헤겔이 이곳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이만 돌아가지.”

“바람은…… 잘 쐬셨습니까?”

“물론. 머리가 한결 나아진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전하.”

침실로 향하며 미렌은 라이언이 돌아올 시간을 짐작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귀족 살인 사건이니 아마 늦은 밤에나 겨우 돌아올 것이다.

그럼 당장 조금 잠이 들었다 깨어나도 걱정 받을 일은 없을 터다. 그녀는 마리아에게 한숨 자고 일어나겠다고 말을 전했다.

“아직 점심 식사도 하지 않으셨어요. 간단하게 식사만 하고 난 뒤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 전하의 식사를 확인하실 겁니다.”

“……아아. 그래, 그럼 식사부터 부탁하지.”

“네, 알겠습니다.”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며 외부 정원을 빠져나가던 미렌은 저 멀리 어딘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자 마리아가 먼저 다가와 보고했다.

“기사들이 황성을 나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폐하의 명으로 황성이 봉쇄되었지 않나?”

“하지만 밖에서 귀족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까요. 아마 따로 폐하의 명을 받고 나가시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자신과 상관없다 결론지은 미렌은 천천히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물론 마음 한편엔 자신의 또 다른 몸에 대한 걱정을 담은 채.

***

“전하, 그럼 커튼을 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마리아의 손짓 한번에 시녀들이 기다란 커튼을 모두 당겼다. 방 안에 어둠이 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시녀들이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미렌은 그제야 겨우 손을 모은 채 가지런히 누웠다. 눈을 감을 시간이었다.

…….

…….

….

“읏…….”

눈부셔.

속으로 생각한 그녀는 눈을 뜨기 위해 애썼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자신이 현재 반쯤 앉아 있다는 것과 엉덩이 아래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렌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머리를 들었을 때였다.

“일어났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묘할 정도로 다정한 말투지만, 어딘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

그녀는 겨우 햇빛에 익숙해져 눈을 떴다. 미렌이 목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악!”

이올라오스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이올라오스의 얼굴이 있었다.

미렌이 서둘러 고개를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서야 주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그닥,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며 풍경이 그들의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렌은 말 위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잠드셨던 겁니까?”

“……예?”

“분명 나간다던 사람이 외부 정원으로 가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가 보니 당신은 그곳에서 준비한 것처럼 잠이 들더군요.”

미렌을 앞에 태운 채 말을 움직이던 이올라오스가 평연한 얼굴로 물어 왔다.

그녀는 납치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 것도 잠시, 이올라오스의 질문에 답을 고민해야만 했다.

“피, 피곤해서요. 낮잠을 자기 좋은 것 같아서…….”

“우드 씨.”

“예?”

꽈악.

고삐를 쥐고 있던 이올라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말이 크게 울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폐하의 개입니다.”

“…….”

“쉽사리 넘어갈 생각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이올라오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굽혔던 허리를 폈다. 미렌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아, 우드 씨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베르디움 공작가로 가고 있습니다. 아직 제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아 백작가로 데려다줄 수는 없었어요.”

“베르디움 공작가요?”

“예.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 명령을 받고 가는 중입니다. 귀족 살인 사건은 기사들의 영역이라서요.”

“하지만 저는 기사가 아닌데 그곳에 가도 될까요?”

아마 라이언도 그곳에 있을 터였다. 미렌은 은근히 빠져나가기 위해 질문을 던졌지만 이올라오스에겐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축제를 틈타 들어온 사람들의 범행입니다. 그러니 우드 양도 가셔야죠.”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직 제가 전달을 안 드렸군요. 폐하께서 첫 번째 내기의 내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올라오스의 뒤로는 그 말고도 여러 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모두가 말을 탄 채였지만, 유일하게 앞에 누군가를 태운 이올라오스를 슬쩍슬쩍 훔쳐보는 중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올라오스가 누군가를, 그것도 여자를 제 앞에 태운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베르디움 공작 부인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 그게 첫 번째 내기입니다.”

“제, 제가요? 전 그저 평범한 약초꾼인데요.”

“그래서 제가 도와 드리기 위해 함께 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 참고로 우리는 앞으로 같이 움직일 겁니다.”

“언제까지요?”

“언제까지긴요.”

이올라오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말이 아주 가볍게 뛰었다. 아마 그녀가 떨어질까 싶어 잡아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기사들이 짓궂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려 여자를 태운 이올라오스가 먼저 허리까지 잡았으니까.

“단장, 업무 중에 연애는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휘익!”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자 결국 이올라오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를 따라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던 미렌은 목격하고 말았다.

이올라오스와 눈이 마주친 기사들이 순식간에 기가 죽어 눈을 내리까는 모습을.

그러나 다시 앞을 향한 이올라오스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의 내기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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