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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54)화 (54/133)

사라진 몸

“미렌, 식사는? 아직이라면 어서 들어. 나는 범인을 조금 더 찾아봐야겠군.”

온 황성에 기사들이 순찰을 돌게 된 뒤부터 아랫입술을 짓씹던 미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온통 헤겔의 걱정을 하느라 제 앞에 있던 라이언을 잊고 말았다. 아니, 헤겔도 헤겔이지만 버려져 있을 제 또 다른 몸도 걱정이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저녁은 함께하지. 그 전까지는 오늘 일을 마무리할 테니.”

“라이언, 제 식사는 마리아를 시켜…….”

이제 막 미렌의 손에 붕대가 감긴 참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미 내 시종을 통해 명령을 내려 두었어.”

그 대답에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라이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리아도 떼어 둔 채 홀로 움직이려 했던 계획이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있는 라이언을 바라봤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가 설핏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려다줄게.”

“……네.”

붕대가 감기지 않은 손이 그에게로 내밀어졌다. 라이언은 그녀가 아프지 않도록 힘을 빼 손을 잡으며 미렌이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그때였다. 순간 미렌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물론 힘없이 바닥에 내려앉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이언이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온 덕분이다.

“미렌!”

“아……. 미안해요, 라이언. 일어나자마자 움직였더니 잠시 현기증이 왔습니다.”

“식사는 천천히 하지. 일단 당신의 침실로 돌아가야겠어. 아직 오늘 치 아르테미스를 복용하지 못했었지?”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표정이 날카로워진 라이언은 그대로 미렌을 제 품에 안아 올렸다.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쌌다. 라이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립해 있던 시녀들에게 아르테미스를 준비하라 이르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단단한 팔이 미렌의 등과 다리를 받쳤다.

“……라이언, 내려 주세요. 황제가 누군갈 안아 들다니요. 예법에 어긋납니다.”

“누가 뭐라 하거든 내게 일러.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해 주지.”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을 아시잖아요.”

“몇 번이고 내가 말했잖아.”

라이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제 품에 안긴 미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딱딱하게 내뱉었다.

“당신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침실에 도착한 뒤에야 라이언은 그녀를 내려 주었다.

미렌은 죄책감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사실 그녀가 쓰러진 것은 건강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막 깨어난 터라 잠은 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수면제를 찾았다간 라이언과 마리아가 기겁을 할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어떻게든 라이언을 붙잡아 두어야 했다. 헤겔이 잠든 몸을 챙겨 이 황성을 빠져나갔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러고 보니, 미렌.”

시녀들이 아르테미스를 준비하는 사이 라이언이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그가 나지막한 어투로 물었다.

“당신이 고용한 이가 당신과 이름이 같다지.”

“그랬……었죠. 미렌은 그다지 특별한 이름이 아니니까요.”

‘미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여성은 제국을 뒤져 보면 수십, 수백 명은 나올 터였다.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헤겔 카르너를 시켜 고용했느냐고.”

그사이 라이언의 앞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미렌의 앞에는 데운 아르테미스가 놓였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툭 말했다.

“내게는 어째서 공작 성에서부터 함께해 온 이라 하였어?”

“……사실 헤겔 씨를 공작 성에서부터 알았습니다.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인연이 있으셨거든요.”

“그런가.”

“그래서 마리아도 미처 몰랐을 겁니다. 마리아는 제가 황성에 들어온 후부터 알게 되었으니까요.”

미렌은 손이 떨리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주어 찻잔을 들었다. 그녀가 말한 것 중 일부는 거짓이었고, 또 일부는 진실이었다.

그에게 숨긴 것은 분명 하나뿐이었건만, 그것을 가리기 위해 거짓이 자꾸만 늘어났다. 그게 답답했다.

“저와 헤겔 씨가 얼마 보지 않았는데도 가까워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일…….”

“또 그러는군.”

또 그를 헤겔, 이라 불러.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순간 그녀는 목덜미가 움츠러들 정도로 소름이 돋아났다.

라이언의 표정은 덤덤했다. 화난 기색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8년을 함께해 온 나의 아내다.’

‘단 한 번도, 믿지 못한 적이 없어.’

미렌은 문득 그 말을 하던 라이언이 떠올랐다.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는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믿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든 순간, 미렌은 이 모든 일이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라이언에게 제 또 다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때였다.

“폐하!”

“무슨 일이지?”

황후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앞은 마리아가 분명 지키고 있었을 테니, 이토록 다급하게 들어왔다는 건 마리아조차도 묵과할 정도로 다급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들어온 이는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그가 벌벌 떨며 외쳤다.

“수도 내에서 살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피해자는 베르디움 공작 부인입니다!”

“……!”

그 한마디에 라이언조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시종장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되물었다.

“제대로 말하라.”

“수도 내에 있는 거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범인은 축제를 핑계로 들어온 테룬 공국의 이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

테룬 공국, 이라는 한마디에 라이언이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화를 참아 내듯 손톱이 박힐 정도로 주먹을 쥐더니 이내 빠르게 명령했다.

“황성 기사단을 보낸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모든 테룬 공국인들을 철저히 감시하라.”

“하지만 폐하, 그랬다간 백성들의 축제로 하여금 들뜬 분위기가 망가질 것입니다.”

“나는 백성들을 감시하라 하지 않았다.”

라이언이 한마디, 한마디를 짓씹듯 내뱉었다.

“오로지 테룬 공국인들만을 감시하라고 하였지.”

침대 위에 있던 미렌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저도 모르게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 마리아. 폐하는 무사히 가셨나?”

“예. 떠나실 때까지 전하의 건강을 당부하셨습니다. 오늘은 부디 쉬시라고요.”

“그래…….”

결국 이번에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터다.

이 일은 분명 프레니티 영지에도 영향이 갈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미렌은 최대한 빠르게 수도의 일을 해결하고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려면 먼저 마리아에게 명령을 내려야 했다.

“잠시 바람을 쐬어야겠군. 마리아, 외부 정원으로 가지.”

“내부 정원이 아니라요?”

황후의 정원은 내부에 있었다. 미렌이 그곳이 아니라 외부 정원으로 산책을 가겠다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곧 수긍했다. 최근 들어 그녀의 상전은 누워만 있던 예전보다 더 넓게 움직이고 계셨으니까.

“어서.”

“예, 전하. 대신 날이 추우니 겉옷을 조금 더 두르셔야겠습니다.”

마리아의 보필로 나선 미렌은 말없이 복도를 지나 밖으로 걸어갔다.

외부 정원은 마법으로 꽃을 키우는 곳이라 다른 곳과 달리 유난히 화려했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미렌이 우뚝 멈춰 섰다.

“아직 정원에 기사들이 서 있군.”

“네, 전하. 폐하께서 아직 기사들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폐하께선 여전히 범인을 찾고 싶어 하시는가?”

마리아는 속으로 그 질문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의 피해자는 그녀였건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능숙한 시종답게 구태여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물며 조금 전 이상하게 여겼던 일조차도.

“베르디움 공작 부인 살인 사건 때문에 직접 탐문은 하고 계시진 않으시나, 일단 오늘까진 누구도 황성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시녀들도?”

“그럼요. 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고생이군.”

마리아의 설명상 헤겔도 탈출이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는 잠든 몸이라는 짐 덩이도 하나 있지 않던가.

그녀는 결국 자신이 직접 제 몸을 챙기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면 헤겔이 해냈다는 의미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정원을 가볍게 둘러보던 미렌이 문득 말했다.

“마리아, 지금은 잠시 혼자 있고 싶군. 시녀들과 함께 이곳에서 기다릴 수 있겠어?”

“갑자기요? 전하,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라도 혼자 모시겠습니다.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으셨잖습니까.”

“괜찮아. 오늘 치 아르테미스도 조금 전 마셨잖나. 홀로 생각할 일이 있어 그래. 정 걱정되면 이곳에서 대기해도 좋아.”

마리아를 돌아본 미렌이 안심시키기 위해 짧게 웃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기사들도 곳곳에 서 있어서 그리 위험할 일도 없었다.

결국 마리아의 동의를 얻어 낸 미렌은 한 걸음씩 나아갔다. 걸어갈 때마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심장이 두 방망이질 쳐 댔다.

드디어…… 제 또 다른 몸을 만나는 것이다.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제껏 시골에서 살아온 미렌 우드와 시한부 황후인 미렌 에드가는 마주칠 일이라곤 전혀 없는 두 삶 같았으니까.

메마르는 입술을 축인 그녀가 마침내 처마가 있는 테이블 앞에 도착했다. 살포시 드레스를 걷어 올려 들어갔을 때였다.

그녀는 멍하니 제 앞을 바라봤다.

“…….”

그곳엔 잠든 미렌 우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찾으러 온 남자만이 있었을 뿐이다.

“헤겔……?”

헤겔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황후가 된 미렌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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