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
자리를 비운 라이언을 따라 미렌과 이올라오스도 알현실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복도에 나오자 이올라오스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미렌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엄중해서 그녀도 순간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네?”
“폐하께서 당신의 사형을 명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려고 그러신 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사실 이올라오스가 이런 일로 언성을 높일 줄은 몰랐던 터라, 미렌은 그저 고개만 숙였다. 혼이 나서 억울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웃음기를 지운 채 화내는 이올라오스의 모습이 어쩐지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 됐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하필이면 우드 씨의 이름이 황후 전하의 존함과 같아서 살아남은 겁니다.”
“말씀이 좀 이상하십니다. ‘하필이면’이라니요?”
언제까지 알현실 앞에서 떠들 순 없던 터라 복도를 걸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미렌은 문득 그의 말이 어딘가 이상해 되물었다.
“그야 ‘하필이면’이지요.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폐하의 눈에 띄셨잖습니까?”
“눈에…… 띄어요?”
“폐하께서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우드 씨가 원하는 대로 평범하게 농사나 짓고 살기에 좋은 일은 아니죠.”
“어차피 전 2주만 지나면 프레니티로 돌아갈 건데요.”
픽.
앞서가는 이올라오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짧게 웃었다는 것쯤은 미렌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프레니티에 가면 폐하의 눈이 닿지 않는 줄 아십니까.”
얼마 가지 않아 미렌과 이올라오스는 처음 만났던 그곳까지 다다랐다.
이올라오스는 다시 업무를 보러 돌아가야 한다며 말했고, 그녀도 수긍했다. 마찬가지로 미렌도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헤겔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럼 우드 씨, 이따 저택에서 봅시다.”
“오늘은 집으로 퇴근하시는 겁니까?”
“예. 오늘 밤에는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고개를 숙여 보인 미렌이 먼저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이올라오스를 확인했다.
그는 이미 멀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렌은 바로 황성 밖으로 나가는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인적이 드문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은 미렌이 한숨을 푹 내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수면초였다.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하지만 시간상 어서 황후 미렌의 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는 결국 헤겔의 뒤처리를 믿기로 결심하며 따로 준비한 수면초를 복용했다.
머리가 멍해진다는 기분이 들 때쯤.
어느 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
“전하께서 일어나셨어요!”
“마리아 시녀장님을 모셔 오거라!”
“음……. 무슨 일인가?”
침대에서 일어난 미렌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아무 일도 모르는 양 물었다. 웬일로 그녀의 곁에는 마리아 대신 아래 시녀들이 모여 있는 채였다.
시녀 한 명이 미렌에게 고했다.
“전하, 아르테미스를 도난 맞았습니다.”
“뭐?! 그게 사실인가?”
“면목 없습니다. 저희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어요.”
아무래도 이쪽은 헤겔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렌이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오늘은 아르테미스 대신 원래 복용하던 약을…….”
벌컥.
문은 아무 예고도 없이 단번에 열렸다. 뛰어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마리아였다.
“전하! 도둑을 찾아냈습니다!”
“……뭐라고?”
이제까지만 해도 고개만 설레설레 젓던 미렌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평소와 달리 다소 흐트러진 모양새의 마리아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현재 범인은 폐하께 데려간 상태입니다.”
뭐?!
미렌은 입을 여는 대신 눈만 끔뻑거렸다. 입을 열었다간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간단하게 치장하고 방을 나서야만 했다. 어쩐지, 라이언이 알현실을 나간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제 침실에 오지 않은 것에 이상하다 싶던 차였다.
“도둑의 이름이 뭐라고?”
“고프리도 바리온 경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
고프리도 바리온 경이라면 폐하의 침실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가 아니던가.
뜬금없는 이름에 미렌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헤겔은?
“다른 용의자는 없던가?”
“네, 전하. 없었습니다. 바리온 경은 곧 폐하께서 직접 신문하신다고 합니다.”
“어서, 어서 가지.”
치맛자락을 손에 쥔 미렌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엔 호위 기사 수십 명과 함께 고프리도가 정중앙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라이언이 그 앞에서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하라.”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 폐하, 제가 그럴 이유라곤 하등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이유를 고하라 하였다.”
바리온의 얼굴 위로 억울함이 묻어나듯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주름진 얼굴은 폐하의 곁에서 오랫동안 충성을 바쳤음을 증명하듯 한없이 순수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시간에 황후의 주방에 있었느냐.”
“그건…….”
고프리도는 아주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다른 기사 한 명이 검을 꺼내 고프리도의 목 바로 앞으로 가져갔다.
“죄인은 폐하의 물음에 거짓 없이 답하라.”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냐.”
“그건, 그것은……!”
고프리도의 얼굴 위로 갈등이 오갔다.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지금 꺼내었다간 그녀마저도 다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꼬리로 기나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렌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메마른 손을 뻗어 고프리도 목 앞에 다가온 검을 밀어냈다.
채앵!
“미렌!”
갑작스러운 미렌의 등장에 놀란 라이언이 서둘러 다가와 기사의 검을 빼앗아 내던졌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미렌이 검날을 밀어낸 탓에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검이 그녀의 손에 깊숙한 상처를 냈다. 뼈밖에 남지 않은 황후의 손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의원을 불러라, 어서!”
“예, 폐하!”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던 라이언이 결국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피가 멈추지 않자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고프리도를 신문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기사가 라이언의 앞에 쿵, 무릎을 꿇었다. 조금 전 바리온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던 이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어째서 내게 목숨을 바치느냐?”
“예……?”
“손을 다친 이는 황후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 사과를 하느냔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황후 전하. 용서해 주십시오.”
기사를 나무라면서도 라이언의 두 눈은 미렌의 손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었다간 미렌의 손목이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라이언, 너무 화내지 마세요. 함부로 나선 제 잘못도 있습니다.”
“몸도 약한 사람이!……하아, 미렌. 대체 언제 온 거야. 온다면 말을 하고 오지 그랬어.”
“당장 눈앞의 바리온 경이 억울해 보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폐하, 범인은 마법사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바리온 경은 마법엔 무지하지 않습니까.”
미렌의 낮은 물음에 함께 듣고 있던 마리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제가…… 황후 전하께 마법사의 소행이란 말을 전한 적이 있던가?
그사이 미렌과 라이언의 대화가 이어졌다.
“바리온, 네 말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을 말하라. 네 말이 사실임이 증명되면 아무 해도 끼치지 않겠다.”
“……!”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바리온은 이내 순순히 여인의 이름을 실토했다.
“황후 전하의 아래에서 일하는 레이니 하트 양입니다.”
“미렌, 당신의 아래에 저 이름을 가진 시녀가 있나?”
“예, 폐하. 레이니는 오래된 제 시녀입니다. 그렇지, 마리아?”
“맞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순조로웠다. 불려 온 레이니는 눈물을 흘리며 바리온의 무죄에 대해 입증했고, 마리아도 그것을 거들어 주었다.
오늘 아침부터 레이니가 바리온과 만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가 제법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리온과 레이니는 무사히 돌아갔다.
“폐하, 이번 일은 그냥 넘겨 주십시오.”
“무려 당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야. 더군다나 명약인 아르테미스지. 어서 범인을 찾아야 해. ……당신이 또 쓰러지기 전에.”
“제 건강은 이제 괜찮습니다. 아르테미스가 없다 하더라도…….”
“안 돼.”
“라이언!”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어.”
어차피 아르테미스가 곧 돌아올 것을 아는 미렌은 그를 달래 보았지만 라이언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오늘 황성에서 일하던 이들을 모두 뒤집을 기세로 범인을 찾고 있었다. 미렌이 그것을 어떻게든 말려 보려 할 때였다.
“폐하, 사라졌던 아르테미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녀들이 잠시 주방을 비운 사이 아르테미스가 돌아왔다고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하?”
라이언의 입가로 비뚜름한 미소가 올라왔다. 미렌이 서둘러 그에게 말했다.
“폐하, 아르테미스도 돌아왔으니 이번 일은…….”
“건방진 놈이군.”
“……네?”
“감히 아르테미스로 나의 시선을 돌리려 해?”
의자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는 앞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에게 단호히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황성을 폐쇄한다. 범인을 찾기 전까지 모든 이들을 감시하도록. 움직임이 수상한 자는 모두 데려와라.”
“예, 폐하!”
미렌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헤겔 씨, 이미 잘 빠져나간 거죠?
***
한편, 헤겔.
“죽을 뻔했네. 황제의 침실도 저 정도는 아니던데. 보안에 미친 거 아니야?”
로브의 모자를 거둔 헤겔이 투덜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로브에 은신 마법을 걸어 뒀던 터라 모자 아래론 투명한 채였다.
아무튼 아르테미스도 돌려놨으니 이제 정원에 누워 있을 미렌 우드의 몸만 주워 가면 끝이었다.
그렇게 헤겔이 움직이려던 때였다. 바로 앞길이 꺾이는 지점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 그가 서둘러 다시 로브를 썼다.
기사 두 명이었다.
“쯧, 오늘도 퇴근은 글렀군. 범인을 찾기 전까지 회의도 미루실 모양이야.”
“다른 이도 아니고 황후 전하와 관련된 일이잖나. 폐하께선 황후 전하의 일이라면 쉽게 넘어가는 때가 없으니.”
“내 주변에서도 그런 애처가는 없을 거야. 귀족들은 다들 무늬만 결혼이고 연애는 정부랑 한다던데, 우리 폐하도 참.”
“특이하신 분이지. 하지만 그만큼 국정에도 예사롭지 않잖나.”
“맞아, 그렇지.”
기사 한 명이 혀를 끌끌 찼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벽에 붙어 있던 헤겔이 숨조차 참아 냈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간부로 황성의 각 길마다 사람을 세운다는군. 자네는 어딘가?”
“나는 이 앞 복도. 자네는?”
“아아, 실내라니 부럽구만. 난 외부 정원이야.”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헤겔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미렌, 내가 잠든 널 주워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