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하신 제국의 태양
“어째서요?”
“타인의 입에서 그분의 이름이 함부로 오르내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십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주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절대 꺼내어선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올라오스는 이상할 정도로 미렌에게 다짐을 받아 냈다. 그녀가 처음으로 황제를 알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였다.
이올라오스의 반응이 아주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렌은 한편으론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언이 제게 예민한 듯 보이긴 했어도 이름조차 부르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황제였던가?
“폐하께서는 그리 두려운 분이십니까?”
“두려운 분?”
황제의 알현실로 갈 때까지 복도가 길었다. 복도에 난 창으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곳에서 이올라오스가 문득 멈춰 섰다.
“고작 두려운 정도였더라면 제 평생을 바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올라오스 경은 두려워하시는 것 같은걸요.”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 내는 이올라오스의 모습은 미렌을 걱정해 주는 것 같다가도 겁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명에 따라 사람을 죽이던 그 이올라오스가.
“두렵지 않다 한 적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우드 양의 말대로 저는 두렵습니다.”
“그렇군요.”
“다만 그 두려운 것보다도 더 폐하를 존경한다는 겁니다.”
“두 분은 친우…… 아니셨습니까?”
“세간에선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감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올라오스와 라이언은 태어나서부터 함께였다. 이건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라 아파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 황후 미렌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선황이 살아 계셨을 때부터 라이언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트리온 가문의 장남이었기에, 이올라오스는 단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하고자 하신 것은 기필코 이뤄 내시는 분입니다. 존경할 수밖에요.”
“워로덴의 가장 빛나는 태양, 이시니까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둘은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 한 명과 이올라오스가 몇 마디를 나누더니 그가 옆으로 물러섰다.
미렌에게 돌아온 이올라오스가 말을 걸어 왔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군요. 그런데 우드 양, 혹 기본적인 황실 예절은 아십니까?”
“아니요, 전혀요.”
물론 미렌은 공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황실 예절에 대해 배웠지만 그걸 이올라오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이올라오스가 가볍게 인사법을 가르쳐 줬다.
“귀족가의 영식이었다면 조금 더 복잡해지지만……. 우드 양은 평민이니 그저 최선을 다해 인사하시면 폐하께서도 크게 책잡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행이네요. 제가 실수할까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폐하는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실수에 관대하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달을 마친 이올라오스가 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 이올라오스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도록.”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미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미렌 에드가가 아닌 다른 이로서 라이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무척이나 낯선 일이었다.
마침내 이올라오스가 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간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바쳤다.
“고귀하신 제국의 태양,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미렌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올라오스를 따라 알현실로 들어갔다.
이올라오스가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문 앞에 서 있는 통에 미렌도 그 옆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입만 열었다.
“고귀하신 제국의 태양, 폐하를…… 윽!”
그러나 인사는 끝내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하던 중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미렌의 턱이 한 손에 붙잡힌 채 들어 올려졌기 때문이다.
이올라오스도 차마 예상하지 못했는지 곁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네가 미렌이 신뢰한다던…… 부하인가?”
낮다 못해 싸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턱이 잡혀 라이언과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 미렌이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그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맞, 맞습니다.”
“언제부터?”
“예?”
“두 번 묻게 하지 말거라.”
라이언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그는 버석한 얼굴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져 댔다.
결국 시선을 피하던 미렌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사실 대마법사님이 찾아오셔서 제게 시키셨습니다. 돈을 주겠다고요!”
“그래서, 황후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저,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
라이언은 미렌의 얼굴을 자세히 내려다봤다. 외모를 평한다기보다는, 무언가 살펴본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때였다. 라이언이 짧게 실소했다.
그 웃음소리에 미렌도 슬그머니 눈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그다음 순간 라이언이 손아귀에 힘을 주어 조여 왔기 때문이다.
“왜 거짓말을 하지?”
“컥, 커윽……. 그게, 무슨…….”
“황후는 내게 공작 성에서부터 함께해 온 이라 하였다.”
미렌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자 놀란 이올라오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것을 막은 것은 라이언이었다.
한 손으로 이올라오스를 제지한 라이언은 대신 손의 힘을 미약하게 풀어 주었다. 이올라오스 덕분이라기보다는 목이 조인 미렌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황후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냐?”
그 질문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라이언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단언했다. 황후가 제게 거짓말을 했으리라곤 전혀, 믿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 미렌의 목을 조른 것이다.
“그건, 저도 모르는…….”
“8년을 함께해 온 나의 아내다.”
이상하다.
분명 미렌은 그에게 목을 잡힌 채고, 조금 전까지 숨도 잘 쉬지 못해 두려웠었는데…….
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을까.
자신이 이제껏 라이언을 믿지 못해서? 아니면 죄책감에?
아니다. 모두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믿지 못한 적이 없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든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그토록 저를 믿어 준다는 사실이 주는 숨 막히는 안도감.
그래서 미렌은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제 목을 쥐고 있는 이 남자가, 밉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후 전하에게 여쭤 보십시오.”
“미렌! 무례한 발언은 하지 마십시오!”
곁에 있던 이올라오스가 결국 미렌과 라이언의 사이로 끼어들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라이언이 미렌에게 사형을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라이언에게 다르게 들렸다.
“……이올라오스, 지금 감히 황후의 존함을 부른 건가?”
“죄송합니다. 실언하였습니다.”
라이언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이올라오스였기에 그는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올라오스가 털썩, 라이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차라리 미렌이 아니라 제게 시선이 돌려지길 바랐다.
결국 미렌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올라오스 경, 왜 제대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마침 라이언의 시선이 돌아가며 그의 손아귀 힘도 느슨하게 풀어졌다. 미렌은 손을 올려 그런 황제의 손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싼 뒤 떼어 냈다.
그녀가 라이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이름 또한, 미렌입니다.”
***
알현실 소파에 앉은 라이언이 나른한 얼굴로 미렌과 이올라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도 미렌이라고?”
미렌의 거짓말에 관련해서는 일단락되었다. 그가 ‘미렌’이라는 이름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올라오스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 자신이 미렌을 대신해 대답을 이어 갔다.
“예, 폐하. 이자의 이름은 미렌 우드입니다. 프레니티 영지에서 올라왔습니다. 또한 프레니티 영지에서 잡아들였던 범죄자들의 구속에도 도움을 준 바가 있습니다.”
“아아, 헤겔 카르너와 함께 이올라오스를 도왔다는 그자인가.”
“예.”
톡, 톡.
라이언이 제 앞에 놓인 책상 위를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잠시 지나갔다.
마침내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기막힌 우연이군.”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후가 프레니티 영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지.”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러한가.”
라이언은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 표정에도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네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지?”
“어, 어머니십니다.”
“어머니?”
“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25년 전 프레니티가 제국에 귀속될 때에 이주민이 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렌은 침착하게 대답을 마쳤다. 사실 라이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테룬 공국 출신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그것에 대한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픽 웃어 왔다.
“네 이름이 예뻐 조금 전 무례는 용서하도록 하겠다.”
“감……사드립니다.”
미렌의 심장이 작게 뛰어 댔다.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해 볼이 붉게 상기되기도 했다.
이올라오스가 그런 미렌을 얼핏 걱정스럽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라이언은 더 이상 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황후는 왜 아직 오지 않지?”
“아직 일어나지 못하셨답니다.”
알현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시종 하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라이언은 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은 먹은 건가?”
“그게……. 폐하.”
시립해 있던 시종이 곤란한 얼굴로 라이언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그가 라이언의 귓가에 직접 속삭였다.
“……아르테미스를 도둑맞아?”
“황후 전하의 시녀장이 다급하게 찾고 있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요.”
“분명 관리에 신중을 기하라고 했을 텐데.”
“마법사의 소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나야겠군.”
라이언이 벌컥 자리에서 일어섰다. 겉옷을 입은 그는 밖에 나가기 전 미렌과 이올라오스를 한번 돌아보더니 가볍게 명령했다.
“할 일에 대해선 이올라오스를 통해 하달하겠다. 황후가 지금 움직일 수 없으니 모두 이만 돌아가도록.”
“예, 폐하.”
라이언은 쓰러진 황후의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어딘지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렌이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라이언이 문득 돌아서 미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미렌 우드라고 했나?”
“예.”
“황후의 일이 끝난 뒤에는…… 황궁에 남아라.”
뜻밖의 제안에 그녀가 입을 벌렸다. 분명 그는 미렌 우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째서……?
“실례지만 그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닮았으니까.”
“……네?”
“말하는 어투가, 높낮이가, 그 말버릇이.”
모두.
라이언은 누구와 닮았는지에 대해선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굴 뜻하는지는 이올라오스도, 미렌도 알았다.
그녀가 재빠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일개 평민이라……. 복숭아를 키우며 사는 삶이 더 좋습니다.”
“그런가.”
“죄송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야.”
알현실에 들어온 뒤로 싸늘한 미소나 무미건조한 표정밖에 짓지 않던 라이언이었다.
그는 나가기 직전,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는 이가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마디를 남긴 채였다.
“내가 좋아하는 이를 위해 복숭아를 심으며 사는 쪽이, 더 행복할 것 같군.”
그의 뒷모습이 이내 사라졌다. 미렌은 그 너른 어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