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51)화 (51/133)

맹수 주의 사항

늦은 밤.

라이언과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잠이 들었던 미렌은 또 다른 몸으로 깨어났다.

일어난 그녀가 쉴 새 없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저녁 식사 때부터 ‘부하’ 역할을 해 줄 사람을 생각하느라 도통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던 탓이다.

“일단…… 마탑으로 가는 마차부터 취소시켜야겠어.”

똑똑.

미렌이 중얼거린 순간 그녀는 제 옆에 있는 창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흠칫 떨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여자라 생각하기엔 어깨가 넓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미렌이 눈을 크게 떴다.

창문으로 다가간 그녀가 벌컥 창을 열어 버렸다.

“헤겔 씨!”

상대를 확인한 미렌이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음색으로 그를 불렀다.

창문턱에 앉아 있던 헤겔의 뒤로 그의 백색 머리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헤겔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찾았다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올라오스 경에게 들었어요?”

“그래.”

미렌은 일부만 열었던 창문에 힘을 줘 완전히 창을 열었다. 그런데 헤겔은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긴커녕 처음 보는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미렌이 먼저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그런데 왜 직접 오진 않았어?”

그 한마디에 그녀는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어쩐지, 헤겔의 한마디가…….

무척이나 서운해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황후의 삶도 포기하지 않기로 한 뒤부터 시간이 많이 없었어요. 남쪽 마탑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도 시간이 꽤 걸리니까요.”

“황후의 삶……. 그래, 겨우 되찾았는데 포기할 순 없겠지.”

“이해해 준다면 고맙고요. 헤겔 씨도 바빴던 거죠?”

“나?”

헤겔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힘 빠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빴어.”

“헤겔 씨, 바쁘신 거 아는데요. 절 조금만 도와줄 수 없으신가요?”

“야, 넌 내가 필요할 때만 날 찾지?”

헤겔이 웃으며 미렌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자신이 필요하지 않고서야 그녀가 먼저 저를 찾아올 리 없다는 것을, 헤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렌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제 상황을 모두 아는 사람은 헤겔 씨뿐이잖아요.”

이렇게 말해 오는 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형, 나는 형밖에 없어.’

10년 전 죽었던 헤겔의 동생 또한 그랬다. 아이는 많이 아팠고, 또 약했기에 언제나 형인 헤겔에게 기대었다.

헤겔은 그래서 이번에도 미렌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라이언이 제가 부리는 사람을 알고 싶어 해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동안 헤겔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미렌의 긴 설명이 끝나자 헤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럼 네가 하면 되잖아.”

“예? 황후가 어떻게 함부로 밖을 돌아다녀요?”

“아니, 너. 미렌 우드 말이야.”

순간 벙찐 미렌은 말없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저어 보였다.

“라이언의 앞에 미렌 우드로 나서라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차라리 공작 성에서 아무 시종이나 골라 시키는 게 낫죠.”

“왜 말이 안 돼? 황제는 네 존재 자체조차 모를 텐데. 거기다 공작 성에서 아무나 시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네 뜻대로 움직일 것 같아?”

“그러다 들키면요? 제가 사실 테룬 공국의 피가 흐르는 평민이라는 걸…….”

“내가 도와줄게.”

헤겔의 손에서부터 흰빛이 일렁였다. 그가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들키지 않게 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누구에게도 미렌 에드가와 미렌 우드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

“어차피 넌 2주 뒤에는 이 수도에서 사라질 사람이야. 걱정할 게 뭐가 있냐.”

“이올라오스 경과 함께 움직여야 해요. 그가 의심하면요?”

“이올라오스에겐 헤겔 카르너가 시켰다고 해. 넌 그냥 당장 돈이 필요해서 하는 거라고.”

“으……. 당장 아침이 밝으면 황성에 들어가야 한다고요.”

“에스코트라도 해 줘?”

“됐어요!”

라이언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미렌에게 다음 날부터 내기를 행하자고 했었다. 그러려면 일단 서로를 소개시켜 줘야 하니, 이올라오스와 자리를 만들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구할 수도 없었다. 시간도 없었고, 헤겔의 말대로 제 뜻대로 움직이려면 자신만 한 적임자가 없을 테니까.

“이올라오스는 저택에 없나?”

“오늘은 퇴근을 안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아마 아침에도 저택엔 안 올걸요.”

“그래. 넌 미렌 우드로 미리 황성에 가 있어. 내가 미렌 에드가가 지금 당장 일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줄 테니까.”

“헤겔 씨가요? 어떻게……?”

“아르테미스를 잠깐 훔치지, 뭐.”

“네?!”

“누가 아예 훔쳐 간대? 다시 돌려놓으면 되잖아. 너희 만남이 끝나고 나서.”

확실히, 헤겔의 말대로 하면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미렌 에드가가 조금 늦게 일어나도 괜찮을 터다. 그동안 미렌 우드는 빠르게 라이언과 이올라오스를 만나고 오면 됐다.

“끝나고 나면 미렌 우드는 구석진 곳에서 잠들어 있어. 내가 주워 줄 테니까.”

“알겠어요. 헤겔 씨,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근데 저 그냥 이대로 가도 될까요? 변장 같은 건.”

“변장을 왜 해? 애초에 미렌 에드가랑 전혀 닮지도 않았는데.”

“그렇죠? 안 닮았죠? 아무도 모르겠죠?”

“그래. 미렌 우드는 예쁘잖아.”

“네?”

아. 헤겔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고개를 모로 돌리며 말했다.

“아니, 네가 예쁘다는 게 아니라. 미렌 에드가보단 예쁘다고.”

“그야 미렌 에드가는 오랫동안 아팠으니까 그렇죠. 저도 못생긴 거 알아요.”

미렌은 남에게 외모 평가를 하는 건 실례라며 투덜거렸다. 그동안 헤겔은 고개를 돌린 채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볼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저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내뱉어 버려서.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올게요. 그리고 1층 황성 복도를 쭉 따라가면…….”

그 뒤로도 해가 뜰 때까지 미렌과 헤겔은 자세한 계획에 대해 나누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아침 해가 뜰 때면, 아마도 미렌 우드는 황제 라이언을 만나고 있을 터다.

***

“어머, 우드 양. 아침부터 어딜 가나요?”

창문으로 몰래 트리온 백작가에 침입했던 헤겔은 새벽이 지나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를 따라 방에서 준비를 마치고 나가던 미렌이 우연히 마주친 백작 부인에게 짧게 인사를 전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돈을 벌러 나가 볼까 해요.”

“으응? 돈? 간단한 일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드 양인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할 일은 제가 해야죠.”

“우드 양은 참 씩씩하네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요.”

최근 들어 백작 부인은 유난히 미렌에게 호감의 표시를 전해 왔다. 아마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이올라오스가 미렌과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난 뒤부터일 것이다.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이야길 꺼내더니, 백작 부인은 서슴지 않고 미렌을 며느리 대하듯 아껴 줬다.

물론 미렌은 눈치만 보며 이올라오스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할 기회만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올라오스가 그 뒤로 저택에 오질 않는 바람에 말할 기회가 없었다.

“아, 그렇지. 우드 양, 오늘 오후에 티 파티가 하나 있는데…….”

“실례하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요!”

“우드 양?”

미렌은 백작 부인을 지나쳐 순식간에 도망쳤다. 더 잡혀 있다간 정말 백작 부인을 따라 티 파티마저 가게 될지도 몰랐다.

저택에서 황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는 알프레도가 준비해 주겠다는 마차마저도 마다한 채 걸어갔다.

황성의 문 앞에 다다르자 경비병들이 미렌에게 다가왔다.

“방문 목적을 말하시오.”

“아, 황후 전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증서는?”

“증서요?”

그런 게 있을 리가.

황후가 아닌 신분으로 황성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던 미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평민은 황성에 입성하려면 증서가 필요한가 보다.

미렌이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드 씨?”

저 멀리 걸어가던 누군가가 갑자기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자 미렌이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이올라오스 경!”

“황성엔 어쩐 일입니까? 내게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면 저택에서 기다…….”

“아니요, 황후 전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황후…… 전하요?”

“예. 자세한 건 들어가서 설명을 드릴게요.”

미렌 우드의 입에서 황후 전하라는 말이 나오자 이올라오스가 미간을 좁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인 것이다.

그래도 그는 미렌을 버리지 않고 경비병들에게 명령했다. 겨우 무사히 입성하게 된 미렌이 말했다.

“사실 헤겔 씨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일거리를 줘서요, 이올라오스 경도 아시죠? 내기.”

“……내기? 그게 뭡니까?”

“……모르세요?”

라이언이 아직 이올라오스에게 설명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렌은 말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폐하와 황후 전하께서 내기를 했다고 하셨어요. 내기의 수행은 저와 이올라오스 경이 하고요.”

“그렇습니까? 전 아직 들은 바가 없군요.”

“아, 네.”

“하지만 마침 폐하께서 부르셔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드 양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함께 가면 되겠군요.”

“……이대로요?”

“예, 이대로.”

“저, 전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요……?”

아니, 심호흡도 좀 하고, 할 말도 생각해 놓고…….

미렌 우드는 한 번도 황제를 만나 본 적이 없는 평민이었다. 이올라오스도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잠시 복도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아, 우드 양은 폐하를 뵙는 게 처음이겠군요.”

“네, 그럼요. 저 같은 평민이…….”

“그럼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던 이올라오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의 앞에서 황후 전하를 부르지 마십시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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