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50)화 (50/133)

설마 아니지?

결과적으로 미렌은 그날 바로 헤겔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당장 어제도 낮에 황후 미렌 에드가로서 움직이지 못한 탓에 일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간 미렌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백작 부인도 자신의 볼일을 보러 저택을 비운 참이었다.

눈을 감은 채 할 일을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니 잠이 쏟아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오후, 마리아.”

“오늘따라 유달리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런가?”

자연스레 일어난 미렌이 제 몸을 훑어 내렸다.

그녀의 말대로 최근 들어 이 몸으로 깨어날 때에 힘든 적이 없었다.

미렌은 점차 두 몸 모두 건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곧 그녀는 건강의 원인이기도 한 아르테미스를 찾았다.

“마리아, 아르테미스를 부탁하지.”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마리아가 손짓하자 곁에 시립하고 있던 시녀 한 명이 트레이를 들고 미렌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빠르게 찻잔을 들어 단숨에 삼켜 냈다.

이제 슬슬 마시는 방법도 통달하여 최대한 쓴맛을 느끼지 않고 마실 수 있었다.

“건강해지는 게 눈에 보이니 이 쓴맛마저도 맛있게 느껴져.”

“전하께서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다니…… 너무도 기뻐요.”

“정말 다행이지. 폐하께서도……. 그래, 정말 다행이야.”

제가 쓰러졌을 때의 라이언을 떠올린 미렌은 씁쓸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 뒀다.

아직 그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도 외로워하는 이를…….

미렌이 침대에서 일어서자 시녀들이 빠르게 다가와 치장을 도왔다.

혼자 입기 힘든 드레스와 화장도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도 매일같이 치장하는 이 삶에 슬슬 적응해 가고 있었다.

전에는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던 몸이었지만, 최근엔 인형처럼 지낸 적이 드물었다.

“마리아, 폐하께선 집무를 보고 계신가?”

“예, 전하. 아직 집무가 끝나지 않으셨을 시간입니다.”

“폐하께 가지.”

미렌이 문 앞에 서자 시녀들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녀는 긴 복도를 걸어가며 마리아에게 연이어 말했다.

“두 번째 자선 파티는 축제가 끝난 후로 날짜를 잡아 줘. 다만 그때에는 부인들의 남편 몫까지 초대장을 만들도록.”

“부인들만의 시간이 아니셨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때때로 여자들은 제 남자를 과시하고 싶어 하니까. 저번 기부에서 1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니 다들 아쉬워할 거야. 슬슬 티 파티의 규모를 늘려야지.”

“알겠습니다. 저번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준비하란 말씀이지요?”

“부탁할게, 마리아.”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읊조리듯 답했다. 그리고 제 아래 시녀를 불러 몇 가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라이언의 집무실까지 가는 동안 미렌은 자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을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만 했다.

어느새 도착한 집무실 앞에는 기사들 말고도 대신 몇 명이 서 있었다.

그들과 가까워지자 미렌이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으신 모양이지?”

“요즘엔 언제나 그렇지. 다 황후 전하 때문 아닌…… 헉!”

“화,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마침 황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들은 그녀가 다가오자 허둥지둥 자세를 바로잡았다.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미렌은 이제껏 라이언의 집무실까지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반갑군요. 프레드릭 공, 발렌토르 공.”

그녀가 자신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인자하게 웃어 주자 그들도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짧게 눈가를 움직여 인사를 고한 미렌은 우아하게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마리아를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들어오도록.”

라이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미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며 집무실 문은 손바닥 한 뼘보다 작게 열어 둔 상태였다.

미처 닫히지 않은 문은 애매하게 열려 안쪽의 이야기를 모두 전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신하들도 그것을 발견하곤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미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상속세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렌? 당신이 어쩐 일이야? 어서 들어와.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나?”

상속세?

귀족파 대신이기도 한 발렌토르와 프레드릭의 귀가 쫑긋댔다.

그러나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문에 다가간 마리아가 조용히 조금 열린 문을 닫아 버렸다.

쿵. 커다란 소리가 나자 앞에 서 있던 발렌토르와 프레드릭은 더 이상 뒷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상속세. 그들이 들은 것은 황후가 황제의 앞에서 상속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일 뿐이었다.

시녀들과 함께 대기하던 마리아는 그 둘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프레드릭과 발렌토르는 곧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곳을 지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대신이 떠나자 마리아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황후가 부러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

“상속세? 마침 그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는데. 당신이 어찌 알았지?”

“부인들과의 자선 파티에서요. 베르디움 공작 부인이 모든 귀족들을 대표해 말해 주었습니다.”

“베르디움 공작 부인?”

그 한마디에 잠시 입을 닫았던 라이언이 곧 목 안으로 웃었다.

미렌의 한마디만으로도 그는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당신도 참 짓궂군. 공작 부인이 제법 곤란했겠어. 베르디움 공작의 성격이 영 너그럽지 못하거든.”

“전 그저 모든 귀족들을 대표해 무거운 말을 전한 공작 부인을 치하해 줬을 뿐인걸요.”

“그 점이 짓궂단 말이야. 황후에게 처음으로 치하받은 일이 하필 황제파를 도와준 일이잖나. 일부러 그랬지?”

미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웃었을 뿐이다.

성큼 다가온 라이언이 그런 미렌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그가 미렌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건강해진 것 같아 기뻐.”

“이렇게 짓궂은 일을 했는데도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좋아. 설령 그것이 나를 죽이는 일일지라도.”

“……모두 폐하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아시잖아요.”

“그래. 알고 있지.”

미렌이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제 아버지의 위치를 십분 이용해 귀족파를 휘두르고 있다는 것쯤은, 오랫동안 정치를 해 왔던 라이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최초로 모든 귀족의 사랑을 받는 황후가 될 것이다.

오랫동안 대립해 왔던 황제파와 귀족파 모두를 가리지 않고서.

라이언은 그 사실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건강에만 힘을 써도 부족할 미렌에게 점점 더 벅찬 권력을 쥐여 주게 될까 봐.

“그래서 상속세에 대해 ‘드릴 말씀’이라는 게 뭐지?”

“상속세를 분할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라이언의 품에서 벗어난 미렌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치솟는 상속세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많습니다. 특히 고위 귀족일수록 그렇고요. 마음이 급해진 베르디움 공작 부인이 실수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그야…… 그렇지. 이번 조세 개편은 특히 귀족 신분을 대상으로 진행하니까.”

“하지만 황제파 귀족들에게서도 좋은 반응은 아니지요?”

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미렌의 말이 정확히 중요한 점을 찔렀기 때문이다.

전처럼 그저 귀족파만이 반대하는 문제였더라면 라이언도 그리 골머리를 앓진 않았을 터다.

그런데 이번 상속세에 관련해서는 은근히 황제파 귀족들도 싫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야 당연했다. 그들도 결국엔 ‘귀족’이니까.

“상속세를 신분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나누는 건 어떻습니까?”

“다른 방식?”

“부동산. 신분이 아니라 토지 소유 여부에 따라 나누는 겁니다.”

미렌이 이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모두 자선 파티 덕분이었다.

오로지 황제파와 귀족파로 나눠진 정계를 다르게 나누기 위해 그녀는 자선 파티에 ‘부인’들만 불렀다.

상속세 또한 그런 식으로 다르게 나눈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 게 시작점이었다.

“고위 귀족들의 소득은 대부분 선대에서 물려받는 토지에서 얻는 세금입니다. 세율이 높은 토지일수록 상속세를 올려 받으시는 거예요. 그럼 귀족들도 어쩔 수 없이 과도하게 올라간 세금을 낮출 겁니다.”

“그리고 황제파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토지가 없지.”

“그들은 모두 폐하께서 직접 고르신 젊은 대신들이니까요.”

“하…….”

라이언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미렌의 방법은 오로지 황제에게 유리한 선택이었다. 상속세를 낮추기 위해 귀족들은 제 토지의 세금을 낮출 테고, 그럼 백성들은 이번 대의 황제를 경외할 것이다.

사실상 이번 조세 개편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 귀족은 전무했다.

“미치겠군.”

“……네?”

“당신은 어째서 일하는 모습마저도 사랑하게 만들지?”

“폐, 폐하. 이곳은 폐하의 집무실입니다. 사적인 발언은 그만……!”

“듣고 있는 이도 없잖나. 언제까지 폐하라 부를 생각이야? 불러 줄 이 없는 내 이름은 오늘도 쓸쓸히 썩어 가겠군.”

“썩다니요!”

“그럼?”

미렌이 눈썹을 모았다. 그리고 결국엔 그에게 졌다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

“그렇지 않아요, 라이언…….”

라이언으로부터 깊은 숨이 내뱉어졌다.

그는 때때로 제 사랑을 감내하기 벅찰 때면 저렇게 숨을 거칠게 내뱉을 때가 있었다.

흠. 그가 겨우 감정을 가다듬었는지 짧게 소리를 내었다.

라이언은 미렌의 손을 잡고 싶어 제 손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아, 라이언. 다만 이 방법은 황제파 귀족들에게 미리 고지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특히…….”

“트리온 백작 가문, 말이지?”

“네. 그들은 누구보다 비옥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 가문이니까요.”

“그래. 이올라오스를 따로 불러야겠군.”

“트리온 백작이 아니라요?”

“트리온 백작은 제 아내와 아들의 말이라면 죽고도 남을 사람이야.”

다른 몸이 트리온 백작가에 있던 미렌은 몰랐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아직 트리온 백작을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올라오스에게 아직 명을 내리지 않았군. 미렌, 당신의 부하는 아직인가?”

“네?”

“내기 말이야.”

미렌이 저도 모르게 입가를 바르르 떨었다.

그 일도 어서 처리를 해야 했다. 헤겔을 찾아가서 부탁을…….

“그런데, 그 부하가 설마 헤겔 카르너는 아니겠지?”

“……네?”

“맞나 보군.”

미렌이 온 뒤로 내내 웃음을 떼어 내지 못했던 라이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그의 너른 어깨가 축 처졌다.

“당신이 신용한다는 그 부하가…… 헤겔 카르너였나?”

“아니, 아니에요. 아닙니다.”

“정말?”

상황이 급해지자 미렌은 앞뒤 생각하지 못하고 일단 부정부터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저 시무룩해진 라이언의 태도를 되살릴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기다렸다는 듯 처진 어깨를 들어 올리며 미렌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 숨을 내리쉬었다.

“난 또……. 당신이 헤겔 카르너와 대체 언제 그렇게 가까워진 것인가 싶었어. 사실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새도 없었잖아.”

“그렇……죠. 네.”

“이거, 점점 당신의 부하가 궁금해지는군. 대체 누굴까.”

즐거운 기색의 라이언은 손에 턱을 괸 채 기대에 빠졌다.

그리고 미렌은 그런 라이언을 바라보며 절망했다.

오늘 밤 출발하기로 했던 트리온 백작가의 마차를 취소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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