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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9)화 (49/133)

“허억!”

심장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 우드가 눈을 홉떴다.

백작가의 저택에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채였다.

망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라이언과는 밤이 늦도록 ‘유능한 부하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재미난 놀이라도 하듯 점점 더 자세한 조건을 걸었다.

첫 번째. 서로의 부하는 함께 백성을 시찰한다.

공정성을 위해 똑같은 조건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함께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미렌은 여기서 반박하지 못했다.

두 번째. 날짜는 축제 기간이 끝날 때로 한다.

테룬 공국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더 자세하게 얻어 오는 쪽이 승리였다. 미렌은 여기서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세 번째. 패배한 쪽은 승리자에게 자신의 부하를 맡겨야 한다.

“누구로 하지? 대체 누구로, 아니, 라이언이 모르는 내 부하가 있긴 했나?”

초조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손톱까지 물어뜯던 미렌은 ‘라이언이 모르는’ 제 사람을 생각해 내기 바빴다.

공작 성에서부터 알던 사람, 라이언은 잘 모르는……. 집사인 사일런을 불러 볼까?

하지만 사일런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사람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인 에드가 공작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마 라이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일런이 그녀를 친딸처럼 대해 준 것과는 별개로 그는 귀족파 출신의 사람이었다.

“……진짜 없는데?”

떠오르는 사람을 하나씩 나열해 봤지만 해 봤자 마리아, 사일런, 그리고 시녀 몇 명뿐이었다. 이 중에서 라이언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따로 사람을 부릴 새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라이언도 이 사실을 알아채고 이상하게 여겼던 걸까?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헤겔!”

번뜩이는 생각에 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자신과 인연이 있으면서도 라이언은 잘 모르는 이. 그건 헤겔이다.

그런데, 헤겔 씨는 지금 어디 있지?

미렌은 이제껏 자신이 먼저 헤겔을 찾아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헤겔이 먼저 그녀를 찾아와 도움을 줬었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얼마 전 밤놀이를 나갔을 때였다.

라이언을 따라가느라 어영부영 헤어진 뒤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그와의 만남은 우연인 적이 없었다.

늘 헤겔이 그녀를 찾아왔으므로.

똑똑.

“누구세요?”

“…….”

이제 막 닭이 울 때였다. 미렌은 혹시 백작가의 집사인 알프레도가 찾아온 것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있는 사람은 알프레도가 아니라 이올라오스였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미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드 씨.”

다정하게 웃어 보인 이올라오스가 먼저 인사를 해 왔다.

미렌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네요.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알프레도가 당신이 어제 저녁부터 잠이 들었다고 해서요. 식사도 걸렀다던데.”

“아……. 막 수도에 올라와 피곤하다 보니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할 예정입니까?”

“그럼요.”

오늘은 오전 중에만 이 몸으로 움직인 뒤 오후엔 황후의 몸으로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녀가 속으로 차근히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이올라오스가 문 앞에서 비키며 그 문을 조금 더 활짝 열었다.

“그럼 함께하시죠.”

“아침 식사를요? 이올라오스 경과 제가요?”

“따로 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따라오세요.”

이올라오스의 한마디에 미렌은 주저하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식사 자리는 미리 지시를 해 뒀는지 소박하게 차려져 있었다.

식당에 들어와 의자를 빼고 앉은 미렌이 문득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그는 말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고 나면 다시 황성으로 출근할 예정입니다. 음식이 식지 않게 어서 드세요.”

“아, 네. 이올라오스 경께서도요.”

한동안 조용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났다. 한참 식사를 이어 가던 와중 미렌이 입을 열었다.

“저, 이올라오스 경.”

“말씀하십시오.”

“최근 헤겔 씨를 본 적이 있나요?”

“헤겔 카르너 말입니까? 아니요, 그와 제가 따로 만날 일은 드무니까요.”

미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기사와 마법사가 따로 만날 일이 무어 있겠는가.

헤겔에 대한 정보를 다른 곳에서 얻어 봐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그는 어째서 찾으십니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사실 수도에 와서 이렇다 할 연고지도 없으니까요.”

그녀는 뉘앙스상 수도에 올라온 것 때문에 헤겔을 찾는 척 대답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라이언과의 내기 때문이었다.

“제가 있는데도요.”

이올라오스의 눈매가 긴 호선을 그렸다.

깊은 웃음이 지어지자 다정해 보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왜인지 싸늘해 보였다.

미렌은 제 팔에 돋은 소름 탓에 그곳을 슥슥 문지르며 대답했다.

“이올라오스 경이 절 도와주시는 건 모두 프레니티에서의 일 때문이니까요.”

“그럼 카르너가 당신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겁니까?”

“……아직 도와줄지도 모르는데요. 이올라오스 경보단 편하게 부탁드릴 수 있겠죠.”

첫 만남부터 별로 인상이 좋지 않았던 이올라오스보다는 확실히 헤겔이 편했다.

그에 이올라오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질 더러운 그 대마법사가 저보다 편하시다는 겁니까?”

“성질이 더럽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군요.”

흐음. 그는 미렌의 말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대놓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식사를 마친 그녀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황성에서 남쪽 마탑과 연락할 수 있습니다.”

“도와주시려고요?”

이올라오스가 냅킨을 들어 가볍게 입매를 닦았다. 그도 식사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그는 웃는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미렌에게 다가왔다. 웃음이 저토록 뱀처럼 보이는 이는 아마 저 기사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요.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제 와 도움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그의 속눈썹은 머리칼만큼이나 눈부신 황금색이었다.

이올라오스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가를 접어 웃어 보였다.

“황제의 기사보다 남쪽 마법사가 더 신뢰가 간다니, 제 명성이 부끄럽습니다.”

***

“아, 이올라오스 경!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가 아니라 들고 올 정보를 기다리셨던 것 아닙니까?”

이올라오스의 물음에 미렌은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했다.

그는 아침에 황성으로 출근한 뒤 점심 중에 잠깐 돌아오겠다는 말을 전했었다.

미렌이 헤겔에 대한 소식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미렌은 저택의 철문 앞에서부터 이올라오스를 반겨 주었다.

“헤겔 씨는 지금 어디 있다던가요?”

“소식을 듣긴 들었습니다만…….”

“다만?”

이올라오스는 일을 하던 중에 나온 것인지 기사들이 훈련을 할 때 입는 갑옷을 입은 채였다.

투구를 허리에 낀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쪽 마탑에서 칩거 중이라더군요.”

“칩거요?”

“공식적으론 연구 중이라지만 그 성격에 틀어박혀 연구 따위를 할 리도 없고. 그저 두문불출하는 모양입니다.”

“그 사람이요? 대체 왜?”

“그건 저도 알 수 없군요.”

미렌이 생각해도 헤겔의 성격상 칩거 따위와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턱을 감싸 쥔 채 고민하던 그녀가 이올라오스에게 물었다.

“그럼 헤겔 씨를 만날 방법은 남쪽 마탑에 찾아가는 것뿐인가요?”

“당장은 아마도 그렇습니다.”

“하아. 당장 멀리 가기엔 좀 힘든데…….”

“시간이 많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미렌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물론 자신이 한량 같아 보이긴 하겠지만, 아주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오늘 오후에도 황후의 몸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몇 개인데.

물론 이것을 이올라오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적당히 변명해 댔다.

“시간이 많아도 돈은 없어서요. 남쪽 마탑까지 가려면 마차도 타야 하고.”

“마차는 제가 집사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도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올라오스 경.”

미렌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이올라오스를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의 보답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 상담에 대한 보답입니다.”

“네?”

“전에 제게 그러셨잖습니까. 고민 상담이었다고.”

“그렇다 해도 보답이 과한걸요.”

“친구잖습니까.”

“친구요?”

“고민 상담은 친구 사이에나 하는 것이라고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덧붙이듯 물어보며 이올라오스가 미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그녀는 왜인지 고개를 저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끄덕이고 말았다.

“친구……죠, 네. 그렇죠.”

싱긋.

대답을 들은 이올라오스는 미소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황성에 가기 전 알프레도에게 마차를 대기시켜 놓으라는 명령을 내린 뒤였다.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는 이올라오스를 보며 미렌은 눈썹을 모았다.

왜인지 요즘 들어 그가 가깝게 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보답하기 위해 다가오는 줄 알았지만 점점…… 제게 뭔가를 바라는 것 같지 않은가?

미렌은 이올라오스와 거리를 둬야겠다고 판단했다.

그가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했다간 곤란했다.

“우드 양?”

“헉!”

미렌은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는 경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백작 부인이 미렌을 불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올라오스가 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미렌에게 다가왔다.

“부인, 어째서 여기 계세요? 이올라오스 경은 지금 막 떠나셨습니다.”

“알고 있답니다. 우리 아이가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쑥…… 네?”

뭐라고요?

쑥스러워?

미렌은 제 앞의 부인이 쑥스러움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진지하게 해 보았다.

물론 교양 높은 백작 부인이 그럴 리는 없었다.

“어쩜, 그 아이가 우드 양 앞에서는 제대로 웃지도 못하던 걸요. 습관처럼 웃는 아이인데.”

“아이……가 이올라오스 경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내 아이가 또 있었나요?”

이올라오스는 미렌의 앞에서 아주 잘 웃었다.

그런데 어머니인 백작 부인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남쪽 마탑으로 간다고 했나요?”

“네, 그렇게 됐어요. 저녁에야 돌아올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위대한 남쪽 마법사는 남자였던 것 같은데.”

“그렇죠. 여성 마탑주는 서쪽이 유일하지 않나요?”

“맞아요.”

흐응. 백작 부인은 잠시 미렌을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백작 부인이 미렌의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결혼은 신중히 해야 한답니다, 우드 양.”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부인.”

“그래야죠. 하지만요, 남쪽 마법사는 성질이 너무 별로예요.”

찡긋. 백작 부인의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그녀의 다음 말은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그 마법사보단 우리 애가 낫지 않겠어요?”

“네?”

“얼마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데요.”

다정하고 사랑스럽다는 부인의 한마디에, 미렌은 문득 얼굴에 피를 묻힌 채 사람을 도륙하던 이올라오스를 떠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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