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8)화 (48/133)

능력이 출중한 부하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예, 그럼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집사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손님처럼 제게 예의가 바른 분은 처음 뵙습니다.”

“제가요? 특별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알프레도는 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깔끔하게 정리된 집사복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프로페셔널한 집사인지 알 수 있었다.

“대개 귀족분들께서는 신분이 다르니 제게 예의를 차리지 않으시고, 평민들은 보통 예절을 배우지 않지요.”

방의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킨 알프레도는 날이 추우니 곧 창을 닫으라 말했다.

미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금 전 하던 말을 이었다.

“우드 양은 어쩐지…… 예절이 몸에 밴 사람 같달까요. 그렇군요. 혹 몸가짐에 대해 배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부모님께서 예의를 중시하셔서요, 아마 그래서인가 봅니다.”

“그렇습니까? 우드 양의 어머니께서는 레이디 우드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물론 미렌은 우드가의 부모님께 예절을 배운 적이 없었다.

아마도 알프레도가 말하는 몸가짐이란 모두 에드가 공작 성에서 배운 것일 터다.

그녀가 애매하게 웃자 알프레도도 곧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동시에 긴장이 풀린 미렌도 침대에 털썩 앉았다.

“여우 굴에 들어와 있는 것 같네.”

중얼거린 미렌은 침대 위를 매만졌다. 폭신한 감촉이 우드네와는 전혀 다른 침대였다.

미렌 우드의 몸으로 이렇게 호강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곧 몸이 뒤로 넘어갔다.

곧 저녁 시간이긴 했지만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다닌 덕분에 몸이 피곤했다. 더군다나 웬 지갑 도둑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았던가.

이올라오스 경이 없었다면 귀족을 상대로 도둑질을 했다고 끌려갔겠지.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전해야 하는……데…….

쿠……. 쿠…….

가물거리던 미렌의 눈이 곧 굳게 닫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미렌의 방문으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부인께서 식사를 권하셨습니다.”

“…….”

“손님?”

기다리던 알프레도는 잠시 문 앞에서 대기했다. 그러던 중 얇은 문 너머로 일정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그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잠이 많으신 손님이로군.”

한적한 복도로 알프레도의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

“좋은 저녁이야, 미렌.”

아직 미처 눈조차 뜨지 못했을 때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미렌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떴다.

침대 가에 앉은 이의 덩치는 무척이나 커다랬다.

미렌의 얼굴 위로 그늘이 질 정도였다.

“라이언?”

“그래, 오늘은 낮잠을 오래도 자는군.”

“어쩐 일이십니까?”

정신을 차린 미렌이 뒤늦게 자리에 앉았다.

라이언이 미렌의 귓가로 머리칼을 넘겨주며 말했다.

“내 아내가 오늘따라 유달리 게으르게 누워 있다는 소식에 달려왔지. 나도 거기에 동참할까 해서.”

“……낮잠을 조금 잔다는 게 시간이 이리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잠은 이미 충분히 자 버렸나?”

“그럼요. 이만 일어날…… 앗.”

침대에서 일어나던 미렌은 라이언에게 허리가 잡혀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앉았다.

라이언이 목 안으로 웃으며 물었다.

“내가 늦은 건가?”

“피곤하십니까, 폐하?”

“설마. 다만 당신과 함께 잘 수 있는 시간을 놓쳐서 아쉬울 따름이야.”

라이언은 몹시도 아쉽다는 듯 미렌의 어깨에 제 볼을 기대었다.

그녀가 손을 뒤로 뻗어 그런 라이언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자선 파티는 어땠어?”

“재밌었습니다. 데뷔탕트도 제대로 치르지 못해서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게 처음이었으니까요.”

“당신, 데뷔탕트 때는 많이 아팠다고 했었나?”

“네, 몹시도요. 열다섯 살 때 고열을 한번 앓고 건강이 더 나빠졌었죠.”

물론 그 전에도 건강은 나빴지만 열다섯의 고열이 이후의 건강을 심히 악화시켰다. 내장이 녹아내릴 뻔했을 정도의 고열이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미렌을 찾아온 이는, 놀랍게도 그녀의 아버지 에드가 공작이었다.

미렌은 침대에 누워 희미한 시야로 그런 아버지를 확인했었다.

‘아버……지.’

‘……건강했어야지.’

침대에 다가온 아버지는 눈조차 뜨지 못하는 미렌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프로스를 내게서 데려갔으면, 너는 건강했어야지. 그렇지 않느냐?’

아프로스는 미렌의 어머니였다.

미렌은 시야가 흐릿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제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딘가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내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간 거냐.’

‘…….’

‘대체 왜…….’

어린 미렌은 그런 아버지의 목소리가 두려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옷소매를 잡기도 전에 에드가 공작은 방을 나가 버렸다.

“미렌?”

“아, 라이언. 부르셨습니까?”

“그래서, 연회에 참석할 수 있겠어?”

순간 기억에 사로잡혀 라이언의 말을 모두 듣지 못했다.

미렌은 결국 라이언에게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요?”

“그래. 자선 파티에 다녀온 부인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했나 봐. 올해 사절단이 참석하는 연회에 자리해 줬으면 한다더군.”

“사절단이라면…… 곧 제국의 축제 기간입니까?”

“맞아. 그리고 이번 사절단엔 테룬 공국 측도 참석할 예정이야.”

“테룬 공국에서 말입니까? 아직 사이가 좋지 않을 텐데요.”

모두가 쉬쉬하고는 있지만 테룬 공국과 워로덴 제국이 냉전 상태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일전의 국경 문제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터다.

이런 와중에 테룬 공국에서 사절단의 참여를 알리다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숨기고 있는 바가 있겠지. 그러니 미렌,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건강해야 라이언의 자리도 공고해질 테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야?”

“시한부 황후가 폐하의 약점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순간 공기가 가라앉았다. 라이언이 싸늘하게 물어 왔다.

“누가? 대체 누가 당신더러 시한부라 하였어?”

“제 단어 선택에 불찰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건강하지 못한 저는 폐하의 약점이라는 겁니다.”

“나의 약점? 헛소리. 그건 모두가 나를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야, 미렌.”

미렌이 먼저 시정하자 라이언도 분위기를 풀었다.

그는 그녀가 시한부라 불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라이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약점이 아니라 역린이겠지.”

똑똑.

방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언의 허락과 함께 들어온 이는 남자 시종이었다.

“폐하, 명령하신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이쪽으로.”

침대의 캐노피로 인해 라이언과 미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재빨리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혹여 이상한 소문이 날까 걱정된 탓이다.

미렌이 비켜 주자 자리에서 일어선 라이언은 시종이 두고 나간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축제 기간이라 테룬 공국의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는군.”

“벌써요? 축제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을 텐데요.”

“당신의 말이 옳아. 축제 기간엔 수도 여관이 남아나질 않으니 미리 오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유난히 테룬 공국 사람들이 많다는 이올라오스의 보고야.”

“혹 평소와 달리 거리에 근위대가 많이 다니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맞아.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

라이언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거리에서 근위대를 직접 보고 왔던 미렌은 자신의 실수를 직감했다.

의심을 덮기 위해 미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이언.”

“부리는 자가 따로 있었어?”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라면 응당 누구나 부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마리아처럼 곁에 두고 시종으로 쓰지 않아도 고용인은 있을 수 있으니까.

“공작 성에 있을 때부터 부리던 사람입니다.”

“그리 오랫동안 함께했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내가 몰랐을까.”

“폐하께 따로 말씀을 드린 적이 없으니까요. 아마 모르셨을 겁니다.”

호, 그래?

라이언이 조그맣게 감탄했다. 기묘한 반응이긴 했지만, 미렌은 일단은 넘어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능력이 출중한 자를 부리는 모양이지. 내가 알지 못할 정도면.”

“……그럼요. 라이언, 그런데 테룬 공국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미렌이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계속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간 실수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순순히 미렌의 말에 따랐다.

“아무래도 곧 한 번 더 잠행을 나가야겠어. 백성들이 동요하진 않을지 걱정되는군.”

“얼마 전에도 잠행을 다녀오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우연히 당신을 마주친 덕분에 모든 계획이 무너졌지.”

그는 계획이 무너졌다고 말하면서도 그때를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둘이 함께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라이언이 문득 미렌의 손을 맞잡았다.

“같이 갈까?”

“잠행을요?”

“그때는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했잖아.”

“나들이가 아니라 백성들을 살피기 위해 가시는 거잖습니까. 제 걸음이 느려 폐만 끼칠 겁니다.”

미렌은 슬며시 라이언으로부터 제 손을 빼내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붙잡기 전에, 한 번 더 확신하듯 말했다.

“백성들의 동태는 사람을 시켜 살피겠습니다.”

“그 유능한 부하 말인가? 당신이 그 정도로 신뢰를 할 정도면, 상당히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

“그런…… 편이죠.”

그야 또 다른 자신이니까.

그런데 그 순간 라이언이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그럼 나도 이번 잠행은 직접 나가지 않겠어. 대신 이올라오스를 시키지.”

“트리온 경을 말입니까?”

“그래. 당신의 부하와 내 충신 중 누가 더 유능한지 살펴볼까. 내기라고 해도 좋아.”

라이언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더 유능한 부하를 가진 쪽이 이기는 걸로 하지. 보상은……. 그래. 지는 쪽이 이기는 자에게 제 부하를 맡기는 걸로.”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부하가 무척이나 궁금해.

라이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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