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우드
터덜터덜.
터덜터덜.
미렌은 저도 모르게 힘이 빠져 신발을 끌며 걸었다.
당장 그녀의 머리 위로는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자꾸만 다리가 풀렸다.
이러다간 머리카락도 빠져 버릴 것 같았다.
미렌은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돈은 되었다. 당장 오늘 밤 잘 곳이라도 구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에드가 공작가의 재산을 나눠 봐……?”
미렌의 두 눈에 순간 독기가 흘렀다.
오늘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더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에드가 공작 성이나 황후의 침실에 잠입만 하면 어떻게든 돈을 훔칠 수 있을 텐데.
근데 그건 도둑질 아닌가?
아니,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 돈이잖아.
어렸을 때도 하지 않던 생각이었다.
미렌이 그렇게 하릴없이 수도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퍽.
어깨가 부딪쳤다. 몸이 휘청할 정도로 흔들린 미렌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오늘 재수 한번 더럽게 없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도둑이야!”
“네? 네, 네?”
“지금 자네가 내 지갑을 훔쳐 갔잖나! 주머니에서 지갑이 없어졌어!”
“제가요?”
눈을 둥그렇게 뜬 미렌이 자신을 가리켰다.
중년의 신사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자 그들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건 삽시간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미렌을 두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해 양손을 번쩍 들었다.
“전 진짜 안 훔쳤어요!”
“그거야 확인해 보면 알겠지. 마침 잘되었네. 저기 근위병들이 지나가니 저들에게 묻지! 이보시게!”
근위병? 근위병이면 황성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거기까지 떠올린 미렌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저 멀리, 남자가 부른 근위병의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이었기 때문이다.
근위병들의 선두에는 이올라오스 트리온이 있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잘 지내었는가, 트리온 경? 내 확인할 것이 있어 불렀네. 저 여자가 아무래도 내 지갑을 훔쳐 간 것 같으니,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치해 주시게.”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왔던 이올라오스는 남자의 앞에 서 있는 미렌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미렌은 일단 모든 설명을 차치하고 고개부터 저었다. 자신은 절대 아니라는 간절한 고갯짓이었다.
“잠시 수색이 있겠습니다.”
이올라오스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여기사 한 명이 미렌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철저하게 미렌의 옷 안을 뒤졌다.
그럼에도 나오는 게 없자 물러선 여기사는 이올라오스에게 몇 마디를 전했다. 미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럴 리가 없어! 저 여자와 어깨를 부딪치고 지갑이 없어졌단 말이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건가?!”
“각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일을 대충 넘어갔다간 나 레이튼 남작의 이름을 걸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억울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이올라오스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는 줄로만 알았다.
이올라오스는 그대로 남작을 지나쳐 그 뒤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엔 가죽 지갑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각하의 지갑이 이것이 맞습니까?”
“그, 그게 왜 거기……! 이런!”
서둘러 지갑을 챙긴 남작은 미렌과 이올라오스에게 인사도 대충 한 채 자리를 떠나 버렸다.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시원치 않은 결과에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다.
결국 근위대와 함께 남게 된 미렌이 눈치를 보다 자신도 슬쩍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우드 씨, 수도엔 어쩐 일입니까?”
“……아, 그게. 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어요. 마차를 잘못 타서요.”
“마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수도까지 왔다는 겁니까? 프레니티 영지에서 수도까지는 적어도 이틀은 걸릴 텐데.”
“게이트를 이용하게 돼서요. 그, 트리온 경. 바쁘신 것 같은데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만 가 보세요.”
미렌이 꾸벅 인사를 하자 이올라오스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제 뒤에 있던 근위대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근위대만 훌쩍 떠나 버렸다.
이올라오스는 남겨 둔 채였다.
“트리온 경?”
“상황이 난처한 것 같은데, 제가 예전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트리온 경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제 부하가 당신에게 지갑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보통 사람들은 본인의 지갑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는 편이니까요.”
이올라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건 곧 그가 퇴근을 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보통은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예, 머리도 좋으시고요. 그러니까 근위대장을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제가 근위대장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색깔이 다르니까요.”
미렌이 트리온의 팔뚝에 차고 있는 완장을 가리켰다. 아까 전 다른 근위병들은 모두 남색인데 반해 이올라오스는 붉은색을 차고 있었다.
“보답은 얼마나, 어떻게 해 주실 건가요?”
“……뭐에 대한 보답인지는 안 묻습니까?”
“헤겔 씨와 제가 도와준 일에 대한 보답이겠죠. 그때 꽤 큰일을 해낸 것 같으니까 도움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예, 그러시죠. 그리고 그것 외에도 보답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그럼 먼저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정말 너무 배고파요.
미렌의 간절한 눈동자가 이올라오스를 향했다.
그는 미렌과 멀찍이 거리를 두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걸어갔다.
***
“생각했던 것보다 잘 드시는군요.”
“원래 이렇게 많이 먹는 편은 아닌데 정말 배고팠거든요. 그리고 지금 많이 먹어 둬야 버티죠.”
“수도엔 언제까지 계십니까?”
“2주간이요. 같이 올라온 아는 분이 2주 뒤에 보자고 하셨어요.”
“2주 동안은 어디서 지낼 계획이십니까?”
“글쎄요……. 공작 성보다야 황성의 담 아래가 그나마 밤에도 따뜻하겠죠?”
“근위대에게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그렇겠군요.”
이올라오스의 단호한 대답에 미렌이 스푼도 내려놓고 시무룩해졌다.
노숙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거긴 근위대가 지키는 모양이었다.
당장 잠을 자지 않으면 폐하와 마리아도 걱정할 텐데. 할 일도 잔뜩 쌓였을 터다.
시무룩해진 미렌을 바라보던 이올라오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잘 곳이 전혀 없습니까?”
“네. 정말 한 곳도 없네요. 수도엔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우드 씨 앞에 있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말에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이올라오스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렌은 잠시 고민했다. 이 몸이야 이올라오스와 사이가 괜찮았지만, 저 반대편 몸으로는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올라오스에게 신세를 져도 되는 걸까?
그러나 미렌의 입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재워만 주신다면 설거지부터 청소까지 모두 자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일단 이 몸을 누일 잠자리 하나였다.
미렌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저택엔 어머니만 계십니다. 아버지는 영지를 위해 늘 출타 중이셔서, 우드 씨가 잠깐 지내기엔 괜찮을 겁니다.”
“트리온 백작가로 가나요?”
“예. 다만 저도 최근엔 업무로 인해 황성에서 지내고 있으니 마주칠 일이 없을 겁니다.”
“……트리온 경이 있는 편이 더 편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요.”
미렌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올라오스 경보다 트리온 백작 부인이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이올라오스가 조금 더 여우처럼 진화했다면 그의 어머니처럼 되지 않았을까.
“그럼 편지를 한 장 써 드릴 테니 이걸 들고 백작가로 가십시오. 전 오후엔 다시 황성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리온 경.”
“그런데.”
슬슬 식사를 마치는 듯한 분위기에 미렌도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걸 멈춘 건 이올라오스의 한마디였다.
“왜 이젠 트리온이라 부르시는 겁니까?”
끔뻑, 끔뻑.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미렌은 대답하길 망설이다 겨우 대답했다.
“평민인 제가 감히 황성 근위대장의 성함을 함부로 불러도 되는 겁니까?”
“전에는 이올라오스 경이라 부르셨잖습니까.”
“그때는 프레니티 영지였으니까요. 다들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익숙하다 보니.”
“그럼 앞으로는 이름으로 부르십시오.”
“예? 어째서요?”
“그편이 더 듣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미렌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지 오래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지는 꼭 챙겨 가십시오.”
“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식당 앞에서 이올라오스와 미렌은 헤어졌다.
그녀가 주소가 쓰인 편지 한 장을 들고 트리온 백작가에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가는 중이었다.
트리온 백작가는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의 저택이었다.
물론 수도에서 이만한 저택을 마련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땅값을 감당한다는 말이긴 했지만, 공작 성이나 황성보다는 소소했다.
저택의 철문 앞에 선 미렌이 가볍게 종을 울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님. 트리온 백작가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트리온 백작가의 자제분이신 이올라오스 트리온 경의 안내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이건 그분이 전해 주신 편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노집사는 미렌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을 구했다.
얼마 가지 않아 돌아온 그가 철문을 열어 미렌을 반겨 주었다.
“도련님께서 손님을 데려오시는 게 드물다 보니 시간이 걸렸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레이디를 데려오시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전 트리온 경의 레이디가 아니라…….”
“우리 아들이 레이디를 데려왔다고요?! 알프레도, 그게 사실인가요?!”
계단에서부터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내려온 건 간단한 드레스를 입은 트리온 백작 부인이었다.
미렌이 잠시 멈칫했다.
호들갑을 떨던 트리온 백작 부인도 미렌을 발견하곤 멋쩍었는지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러면서도 슬금슬금 미렌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아우사 트리온이랍니다. 영애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미렌…… 우드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부인.”
미렌이라는 말에 순간 백작 부인이 멈칫했다. 황후의 이름과 똑같았던 것이다.
이윽고 들려온 우드라는 성씨에 생각을 바꾼 것 같긴 했지만.
“우드? 제가 처음 들어 보는 가문이군요. 지방에서 오셨나요?”
“지방에서 온 건 맞습니다만, 들어 보신 적은 없으실 거예요. 저는 귀족 출신이 아닙니다.”
“……그래요?”
순간 백작 부인의 눈매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미렌의 싹싹하고 예의 바른 태도에 그녀는 사실 높은 점수를 매기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이올라오스 경과는 부인께서 생각하시는 사이 또한 아닙니다.”
“이런, 내가 오해할 여지를 주었나요? 실례했군요.”
“괜찮습니다, 부인. 2주 동안 조용히 머무르다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알프레도, 레이디 우드에게 방을 알려 주도록 해요.”
“예, 부인.”
짧게 눈인사를 전한 미렌이 집사 알프레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문득 백작 부인이 미렌을 불러 세웠다.
“그런데요, 레이디 우드.”
“네?”
“이름으로 부르라 한 건 제 아들이었나요?”
고개를 돌렸던 미렌은 백작 부인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방은 원하는 곳을 편하게 사용하도록 해요, 우드 양.”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침내 미렌은 복도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제 어미도 이름을 못 부르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