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6)화 (46/133)

시골 미렌의 상경 일기

깜빡, 깜빡.

자리에서 눈을 뜬 미렌은 제 앞의 현실을 목격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 낡은 나무 창문, 내동댕이친 옷가지들까지.

그녀는 지금 평민인 미렌 우드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안색이 영 좋지 못했다.

최근 며칠 동안 연달아 수면초를 복용했기 때문이다.

미렌 에드가의 삶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그녀는 미렌 우드를 조금씩 내려놓아야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걱정하실까 싶어 여행을 간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근처 여관으로 오긴 했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이제는 편지 한 통이라도 쓸 때가 된 것이다. 아니면 어머니께서 미렌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닐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그리고 그렌. 저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할까?

데저트 영지로 떠난다고 했던 게 당장 일주일 전이었다.

계속 데저트 영지에 있으면 이만 돌아오라고 할지도 몰랐다.

“저는 지금 수……도로 향하고 있어요.”

앞으로 수도에서 살 생각은 아니지만,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여행은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아요. 곧 돌아갈 테니 기다려 주세요.

맏딸 미렌 올림.

마침표를 찍은 미렌이 깃펜을 내려 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지개를 켰다.

“으……. 진짜 피곤하네. 왜 잠을 자면 잘수록 피곤한 거야.”

미렌이 편지를 들고 일어섰다.

우체국으로 향해 일단 편지를 보낸 뒤, 오늘 하루는 계속 누워 있기만 하던 이 몸을 위해서라도 움직일 계획이었다.

편지까지 무사히 보내고 나온 미렌은 잠시 길거리에 서서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다.

프레니티 영지는 너무 좁아서 계속 이대로 지내다간 부모님의 귀에도 들어갈지 몰랐다.

그녀는 이제 슬슬 정말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가까운 데저트 영지로 갈까?”

고민하던 미렌의 시야로 마침 잡화점 아저씨의 짐차가 보였다.

미렌이 서둘러 다가가 그를 불렀다.

“아저씨! 데저트 영지 가시죠?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어어, 그래. 어서 타렴!”

“감사합니다, 아저씨! 짐칸에 탈게요!”

아직 느린 마차의 속도에 맞춰 달리던 미렌이 짐칸으로 뛰어올랐다.

짐 사이로 몸을 웅크린 그녀는 지나가는 바깥을 구경하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짧은 낮잠을 잘 시간이었다.

***

눈을 뜬 미렌은 먼저 마리아를 찾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미렌 우드의 몸으로 지낼 계획이니, 다른 이들에겐 쉬고 싶다고 말을 해 두어야 했다.

“마리아, 거기 있나?”

“예, 전하. 찾으셨습니까?”

“오늘은 내가 피곤해 쉴 예정이야.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겐 그렇게 말해 두어.”

“폐하께서 오시면 어떻게 할까요?”

아.

미렌이 작게 입을 벌렸다.

지금은 낮이었지만 문득 라이언이 낮에도 가끔씩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제껏 그 사실을 자신에게 비밀로 해 왔었다는 것 또한.

“마리아, 왜 그랬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내게 낮에 폐하가 오셨다고 알리지 않았지?”

침대에 반쯤 기대 있던 미렌이 고개를 돌려 마리아를 확인했다.

그녀는 다소곳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오가다, 마리아가 결국 실토했다.

“전하께 보고를 올리지 말라는 폐하의 명을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미렌이 평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내린 명은 폐하께서 오시거든 나를 깨우라는 말이었잖나.”

“…….”

“어째서 그러지 않았어, 마리아?”

똑똑한 마리아니만큼 그녀의 명을 헷갈렸을 리도, 잊어버렸을 리도 없었다. 미렌은 단지 그것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누구보다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 마리아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때였다. 뚝, 뚝.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미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마리아의 발치에 깔린 카펫이 점점이 젖어 들고 있었다.

미렌이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그때 미쳐 그만 실수를 해 버렸습니다.”

“무슨……, 아니, 마리아. 눈물을 그치고 말하도록 해. 숨을 쉬기가 벅차잖나.”

토닥, 토닥.

미렌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리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호흡이 가빠 보였기 때문이다.

그 눈물에선 진심이 묻어났다. 미렌은 섣불리 마리아를 혼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최선을 다해 전하를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전하를 사랑하시는 폐하의 모습이요.”

“폐하…… 말인가?”

“폐하께선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하시지만, 때때로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도 무서웠어요.”

미렌이 작게 입을 벌렸다.

마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리아는 언제나 어른스러운 언니의 모습으로 미렌을 보필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가끔 마리아는 미렌과 라이언이 멀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언제였더라, 한번은…….

“그 사랑이 전하의 목을 조일까 두렵습니다. 이토록 연약하신 분의 목을요.”

눈물을 머금은 마리아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미렌의 손을 조심히 감쌌다.

닿아 온 온기에 움찔 놀란 미렌은 떠올리려던 생각을 덮었다.

대신 아직도 어깨를 떠는 마리아를 끌어안아 주었을 뿐이다.

“나는 괜찮아.”

“전하…….”

“나는 그 사랑이 조금도 벅차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이네, 마리아.”

“아니요, 전하께서는 모르십니다. 아직도 모르세요.”

폐하께서 전하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속삭이듯 진심이 닿아 왔다.

마리아는 미렌이 그 사랑을 모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걸 알아채고 도망가길 바랐다.

마리아가 보기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그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겨우 눈물을 그친 마리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을 떨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마리아. 걱정 마. 그대의 충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까.”

“……알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

미렌은 한 번 더 마리아의 어깨를 둘러 안아 주었다.

미렌보다 키가 작은 마리아는 그 품에 안겨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새 마리아의 눈가는 메마른 지 오래였다.

***

“미렌, 미렌! 얘!”

“……잡화점 아저씨?”

“아휴, 이제야 일어나니? 도착한 지가 언젠데. 어서 나가자.”

“아저씨가 깨우셨어요?”

“그래. 한참을 깨워도 일어나질 않으니, 원.”

짐마차에 실려 눈을 비비적거리던 미렌이 아저씨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잡화점 아저씨는 짐을 하나씩 밖으로 내리며 말을 걸어 오셨다.

“너는 마차가 그렇게 움직이는데 잠이 오던?”

“제가 원래 잠이 많잖아요. 여기가 데저트 영지예요?”

“데저트? 데저트는 무슨! 수도인 워로덴이지!”

“네……?”

그 한마디에 놀란 미렌이 서둘러 짐칸을 빠져나갔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에 미렌도 손을 들어 잠시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점차 눈이 빛에 익숙해지며 들어온 광경은…….

“넌 목적지도 모르고 따라왔니?”

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평민들 말고도 드문드문 귀족들도 걸어 다녔다.

저 멀리선 미렌도 아는 수도 근위대가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중이었다.

미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데저트 영지에 가시는 줄 알았어요…….”

“데저트 영지에 가긴 했지, 게이트 타러! 매번 그렇게 워로덴에 갔는걸.”

“여기 진짜 워로덴이에요, 아저씨?”

“그래, 인마! 너 이제 어떡할래. 난 딱 2주 뒤에 돌아간다. 아저씬 일하느라 바쁘니까 너까지 못 챙겨 줘!”

아저씨는 바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미렌과 대화를 하면서도 짐칸을 정리하기 바빴다.

미렌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자신의 남은 돈을 확인했다.

여관에서 머무르느라 돈을 제법 쓴 터였다. 그래도 숙박비 정도는…….

퍼억.

누군가에 의해 밀려 뒤로 넘어진 미렌이 눈을 크게 떴다.

미렌을 넘어뜨린 꼬마 한 명이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꼬마의 손에는 미렌의 하나뿐인 지갑이 들려 있는 채였다.

“내, 내 돈!”

“미렌! 어디 가니! 2주 뒤에는 여기로 와야 한다, 응?!”

“내 돈 돌려줘!”

허겁지겁 일어선 미렌이 도망친 꼬마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저 돈이 없으면 2주 동안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소매치기 꼬마를 따라가던 미렌은 골목 안에서 결국 힘이 다해 무릎을 짚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녀석은 이 근방 지리를 꿰고 있는지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일단, 일단 인상착의를 기억해 보자. 그리고 놈을 찾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미렌이 꼬마의 빵모자가 무슨 색이었는지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덥석, 미렌의 뒷덜미가 잡혔다.

달랑 들어 올려진 미렌이 고개를 돌려 제 목덜미를 잡은 주인을 바라봤다.

“돈.”

“누구세요?”

“여길 지나가려면 우리한테 돈을 내야지.”

“네?”

수도에는 통행세도 있었나?

남자들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그녀는 발견했다.

미렌을 둘러싼 일행들 사이로 방금 전 그녀의 지갑을 들고 도망갔던 꼬마 아이를.

“거기 내 지갑 훔쳐간 녀석, 이리 안 나와?”

아이를 발견한 미렌이 성큼 발을 내딛자 무리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제 주변을 둘러보던 미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갑을 훔쳐간 아이는 그렌 정도 되는 나이 같았고, 무리의 대장도 아무리 많아 봤자 성인이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꼬마야, 내가 정말 바빠서 그래. 너희들이랑 놀아 줄 시간이 없어.”

“아, 그러세요? 그럼 돈만 두고 가세요. 저희 사탕 값 필요하거든요.”

그 덩치로 사탕을 사 먹을 것 같진 않은데?

요즘 애들은 도대체 뭘 먹고 자라기에 이렇게 큰 건가. 미렌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그냥 이대로 제 지갑만 가져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돈이 없는데요.”

미렌이 아무리 스물다섯 살에, 정신적으로는 고등 교육까지 받았다지만 이 무리를 홑몸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항복을 선택했다.

지갑만 뺏기면 차라리 다행이다. 두드려 맞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야, 진짜 거지 같아. 그냥 가자.”

“에이, 재수 없어.”

미렌은 ‘거지 같다’는 말에 속으로 발끈했다.

물론 돈이 없는 게 맞긴 한데, 그래도 저 길거리 승냥이 떼 같은 애들보단 가진 게 많았다.

물론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버텼다.

그리고 혼자가 된 지금.

“나 진짜 돈이 없어……!”

골목 한가운데서 미렌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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