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5)화 (45/133)

미렌 에드가 워로덴

“베르디움 공작 부인, 귀한 시간을 내 주어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전하께서 부인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답니다.”

파티장에 들어온 공작 부인이 미렌을 향해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해 왔다. 그 뒤를 시녀 서너 명이 따르고 있었다.

곧이어 트리온 백작 부인도 안으로 들어왔다.

화려하게 치장한 공작 부인과는 달리 검소한 미를 살린 드레스가 돋보였다.

“트리온 백작 부인, 어서 와요. 부인들께서 좋아하는 차로 준비했습니다.”

정각에 맞춰 도착한 이들은 백작 부인과 공작 부인밖에 없었다. 그보다 지위가 낮은 이들은 모두 미리 도착해 자리한 지 오래였다.

모두 모이자 미렌이 먼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부인들도 하나둘씩 손을 움직이기 바빴다.

“이건 서부 사막에서 나는 꽃잎이 아닌가요?”

“맞아요, 트리온 백작 부인. 사막의 영애들이 주로 마신다더군요.”

“힘겹게 생명을 틔운 꽃은 참 아름답네요.”

그때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공작 부인이 찻잔을 내려 뒀다.

힐끗 안쪽을 확인하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공작 부인, 어째서 들지 않습니까?”

“어머. 송구합니다, 전하. 서부에서 나는 꽃에는 제가 미약한 알레르기가 있어…….”

생긋 웃어 보인 공작 부인이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그에 백작 부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황제파는 황성을 중심으로 수도 서쪽에 머물렀고, 귀족파는 반대로 대부분 동쪽에서 지냈다.

베르디움 공작 부인은 그 사실을 꽃에 빗대어 먹을 수 없다 말한 것이다.

즉, 황제파가 있는 서쪽에서 나는 모든 것은 입에도 대기 싫다는 말이었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요, 공작 부인. 다른 이들은 괜찮습니까?”

“전 향긋하기만 한걸요, 전하. 어렵게 공수하셨을 텐데, 공작 부인께서 마시지 못한다니 참 아쉽습니다.”

눈을 내리깔며 조근조근 대답한 백작 부인이 찻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뒤엔 희미한 비웃음이 숨어 있었다.

공작 부인도 그것을 봤지만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다만 서로 싸늘한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그 아래 부인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배신자로 낙인찍힐 게 뻔한 자리였다.

“사막의 영애들은 다들 경건한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더군요. 아직 물이 귀한 곳이니까요.”

“척박한 사막이라면 그럴 만도 하죠.”

“물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 이들이 대단스럽네요.”

공작 부인과 백작 부인 중 누구도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마도 이 싸움은 황후인 미렌이 둘 중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만 끝이 날 터였다.

그와 동시에 이 사교 파티도 두 번 다신 열리지 않겠지만.

“오늘은 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마셔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겐 귀중한 물일 테니까요. 공작 부인, 대신할 차를 드릴까요?”

질문은 물 흐르듯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공작 부인도 거절하긴 힘들 터였다.

황후인 미렌이 꽃잎의 출처에 대해서 말한 게 아니라 제국 어디서나 마시는 물을 이야기했으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별말씀을요. 우리가 오늘 모인 것도 그 때문이잖습니까. 누군가에게 귀중한 물과 양식을 자선하기 위해서요.”

“전하의 깊은 뜻에 감탄했답니다. 척박한 곳에선 물과 양식이 귀중할 수밖에요.”

미렌으로 인해 대화의 분위기가 환기되자 조용히 있던 다른 부인들도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언제나 별생각 없이 마시던 물과 차였는데,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경건해지는걸요.”

“그러게요. 전하의 뜻이 닿아서인지 달게 느껴지는 것만 같아요.”

“그렇습니까, 에버하트 부인?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요. 부인의 시종 편으로 꽃잎을 전달해 두겠습니다. 게롯 부인에게도요.”

어머, 하는 작은 외침이 들려왔다. 황후가 전해 준 값비싼 꽃잎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친근하게 불러 준 이름 한번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미렌은 평소와 다름없이 작게 웃어 주었다.

불안해하던 하위 귀족 부인들은 그 웃음으로 겨우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공작 부인이 문득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전하께선 정말 다정하시네요.”

“이제껏 베풀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제가 몸이 좋았다면 부인들에게 더욱 신경을 썼을 텐데요.”

“누구에게나 베풀 수 있는 그 아량이 진심으로 부럽답니다.”

공작 부인의 한마디에 백작 부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결국 공작 부인의 말은 미렌이 황제파와 귀족파를 가리지 않고 제 편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백작 부인도 이번만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작 부인 또한 황후의 대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내가 부인들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다행입니다. 공작 부인께서도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저는 상속세의 폐지를 원합니다.”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은 거리낌 없이 말을 내뱉었다. 백작 부인의 제지에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라 하지 않으셨나요?”

“필요하시다는 게 상속세의 폐지입니까?”

“곧 개편되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상속세가 너무도 높으니까요. 재산의 거의 절반에 가깝답니다.”

미렌이 잠시 찻물을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동안 공작 부인은 부채도 내려놓은 채 미렌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작 부인께선 영식이 있으셨죠.”

“하잘것없는 아이지만, 제국에 힘이 되기 위해 열심히 수양 중이랍니다.”

“그렇다면 상속세의 폐지는 영식 분을 위해서인가요?”

“……설마요. 모든 귀족들을 위해서이지요.”

공작 부인의 말에 미렌이 공감한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공작 부인께서도 무척이나 아량이 넓으시군요. 모든 귀족들을 헤아려 주시다니요.”

그 한마디에 부채를 매만지던 공작 부인의 손이 움찔 떨렸다.

공작 부인이 고개를 들자 저보다 아래에 앉아 있던 모든 부인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파와 귀족파 할 것 없이 모두.

미렌이 짚은 점은 그것이었다. 언제나 꼿꼿하게 귀족파의 입장을 고수하던 베르디움 공작 부인이 처음으로 ‘모든 귀족’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큰 파란을 불러올 한마디였다. 부채를 잡던 공작 부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나, 안타깝게도 상속세 문제는 당장 제가 나설 수 없습니다. 다만 귀족들을 대표해 말해 준 공작 부인의 마음을 보아서라도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렌이 은은하게 웃었다.

결국 수면 위로 올라왔던 상속세 문제는 뒷전이 되었고, 오늘 일은 베르디움 공작가가 모든 귀족을 대표해 발언했다는 이야기만이 떠돌 것이다.

공작 부인은 지끈 아파 오는 머리에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면 제 남편이 어떤 말을 해 올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파티를 끝낼 때가 되자 미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듯 오늘은 참석해 주신 부인들의 이름으로 기부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또한 이 자선 파티는 지속적으로 운영할 생각이에요.”

“좋은 생각입니다, 전하. 우리 부인들끼리는 이렇다 할 자리가 없었잖아요?”

“남편들이야 황성 대회의장에서 보겠지만요.”

어느 남작 부인의 한마디에 여자들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여성들의 사교 파티라곤 백작 부인과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것뿐이었는데, 둘 다 정치색이 명확한 탓에 참가자가 정해져 있던 탓이다.

미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는 들었던 찻잔을 내려 두며 말했다.

“다만, 기부할 금액은 부인들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그 순간 어색한 침묵이 지나갔다.

부인들의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부인들이 참석한 자선 파티,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기부 금액이 많은 부인…….

가문의 위명을 드높일 기회였다. 그것도 부인들 본인의 이름으로.

미렌은 모두 생각에 잠겨 있느라 바쁜 부인들을 보고 짧게 웃었다.

그녀가 가장 보고 싶었던 광경이었다.

귀족파, 황제파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가문을 드높이기 위해 움직일 터였다.

금액은 파티가 끝난 후 사적으로 받을 예정이고, 그럼 모두 눈치껏 물밑으로 움직일 테니까.

또한 그 눈치 싸움으로 인해 높아진 기부 욕심은 백성들의 배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결국 황제의 편이다.

“그럼 오늘 자선 파티는 이만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인들께선 시종을 통해 기부 금액을 전달해 주세요.”

미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어선 부인들이 하나둘씩 우아하게 인사를 해 왔다.

그녀가 자리를 떠나자 부인들도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을 내야만 할 것이다.

미렌이 사교장을 나서자 마리아가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미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마리아에게 명했다.

“마리아, 기부 증서를 가져온 시종들이 오거든 반응을 보이도록 해.”

“뭐라고 떠들면 될까요?”

“말은 필요 없고, 흐음……. 하는 한숨 한 번?”

딱 그 정도.

그 한숨 한 번으로 시종들은 돌아가 부인들에게 보고를 올릴 것이다.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고.

그럼 다음 기부 파티에서는 평균적인 기부 금액이 올라가게 된다.

미렌은 복도를 걸으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

“어머니, 자선 파티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트리온, 말도 말렴.”

“예?”

이제 막 퇴근한 이올라오스는 아직 예복도 벗지 않은 채였다.

저택 복도에서 만난 어머니가 평소와 달리 표정을 굳히고 계시기에 말을 건 참이었다.

“황후 전하께서 귀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었지 않니.”

“예, 그랬었죠. 실제로 만나 뵈니 어떠셨습니까?”

질문을 던지면서도 이올라오스는 며칠 전 만났던 황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의 병색은 소문보다는 옅어 보였지만 그래도 한없이 약해 보였었다.

“귀신이 맞는 것 같구나.”

오늘 자선 파티를 떠올린 백작 부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부인들을 다루는 방법이 정말 귀신같지 뭐니.”

“……그 황후 전하께서 말입니까?”

“폐하처럼 위압적이지도, 네 아버지처럼 다정하지도 않으셨단다.”

“그러면요?”

“친근하셨지. 그 어떤 귀족보다도 말이다.”

“태생부터 귀족이셨던 그분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분과 대화를 나눈 게 두 번밖에 되질 않았는데, 몇 번이나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셨단다. 이상하지?”

어머니의 말을 곰곰이 되짚던 이올라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높은 자리에만 있던 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꼭 마음 편한 평민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벼워 보이셨다는 겁니까?”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누구나 마음이 편하게끔 만드셨지.”

그건 정말 대단한 기술이야.

어머니의 감탄 섞인 읊조림이 이어지자 이올라오스도 그제야 황후와의 대화를 되짚었다.

분명 그는 황후에게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말을 돌려 전하기 위해 갔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편해져 그만 직접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티는 진행되긴 했지만, 그 대화로 하여금 황후와 처음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죠.’

‘…….’

오랫동안 기사로서의 입지를 다지며 정치에 휘말리기도 했던 이올라오스도 처음 보는 방식의 정치였다.

이올라오스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시감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하던 이올라오스는 그날 신문 일면에서 그런 기사를 보게 된다.

<부인들만의 자선 파티, 가장 큰 기부자는 황후 미렌 에드가 워로덴>

미렌 에드가는 워로덴의 이름으로 신문에 올랐다.

그 신문을 보며 이올라오스는 또 한 번 황후의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폐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기시감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또한.

‘저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을 위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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