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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4)화 (44/133)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폐하께선…… 아니, 라이언은 제게 비밀이 없으십니까?”

“비밀?”

라이언은 미렌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그녀가 아는 익숙한 라이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왜인지 미렌은 자꾸만 라이언이 의심스러웠다.

제국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자 죽어 가는 황후에게마저 다정한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제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미렌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운을 띄웠다.

“조금도 없어요?”

“음……. 비밀이라. 물론 있지.”

“말해 주세요, 라이언.”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 몰래 침대에 들어갔다가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나온 적이 있어. 우리가 결혼한 지 1년이 채 흐르지 않았을 때.”

“네?”

미렌이 작게 입을 벌렸다.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면 라이언과 이렇다 할 관계도 쌓지 않았을 때다.

매일 저녁에나 얼굴을 보는 게 겨우였던 시절 아닌가.

“그때는 내가 당신에게 매일 저녁마다 꽃을 들고 갔었잖아.”

“그러고 나면 침소로 돌아가셨고요.”

“어느 날은 일정이 취소되어서 낮에 시간이 남았어. 그래서 당신에게 갔더니 잠들어 있더군.”

손을 맞잡은 채 걸어가던 라이언이 갑작스레 그녀를 당긴 것은 그때였다.

영문도 모른 채 라이언의 품에 안긴 미렌이 고개를 들자 그 옆으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때도 당신이 꽃처럼 예뻐서 사랑에 빠졌지.”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야, 내가 비밀로 하라 명했으니까.”

미렌은 순간 눈을 찌푸렸다.

그녀는 마리아에게 자신이 잠든 동안 라이언이 오거든 꼭 자신을 깨우라 명했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 어떤 말을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잠든 동안에는 시녀들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리아가 내 명을 어겼다니.

“마리아를 혼내야겠습니다. 7년이나 제게 비밀로 하다니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7년이 아니라 7일이 맞지.”

“네? 라이언, 얼마나 자주 제 침실에 들어오셨던 겁니까?”

“음…… 낮에 시간이 날 때면 가끔.”

라이언은 품에 안았던 미렌을 놓아주며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사실 가끔이라 표현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잦았던 탓이다.

특히나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뒤로는 더더욱.

‘미렌은 오늘도 자고 있는 건가?’

‘예, 폐하.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도 자는군. 한번쯤은 잠깐씩 일어나 주어도 좋을 텐데.’

침대 가에 앉은 라이언이 손을 뻗어 그녀의 볼 위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마리아는 그의 뒤로 고개를 숙인 채 시립해 있었다.

사실 마리아에겐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황후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보러 왔으니까.

‘오늘도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말까요, 폐하.’

‘그래.’

조심스레 질문을 올린 마리아는 눈을 내리깐 채 물러섰다.

그걸 붙잡은 것은 라이언이었다.

‘미렌이 묻지는 않나?’

‘……네?’

‘내가 따로 찾아올 때가 없느냐고 묻지 않냐는 말이다.’

‘아직까진 물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라이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마리아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서 보고하지 않았지?’

‘폐하께서 비밀로 하라 명하셨으니까요.’

‘오직 그것 때문인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라이언은 마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마리아를 무감각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예, 폐하. 명하셨기에 따를 뿐입니다.’

‘충실한 신하로군.’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에 라이언이 픽 웃었다.

그는 미렌의 방을 떠나며 마리아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남겼다.

‘대체 누구의 신하인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떠올렸던 라이언은 문득 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이언, 이만 황성으로 돌아갈까요?”

“그럴 순 없지. 당신과 길거리를 걷는 건 처음이잖아.”

“……예전에는 이렇게 걷는 것도 꿈꾸지 못했으니까요.”

“아르테미스가 효과가 있긴 한가 보군.”

확실히 미렌의 병색은 예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전에는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는데, 이제는 라이언이 속도를 맞춰 주면 제법 따라오지 않는가.

라이언은 그 사실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아르테미스를 마신 뒤로 많이 나아졌습니다. 의원도 이제는 진통제만 주시니까요.”

“진통제는 아직인가?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다던데.”

“가끔 두통이 생길 뿐입니다. 그것도 걷지 못하던 시절에 비하면 대단히 나아졌어요.”

라이언은 점차 건강해지는 제 아내를 보고 심장을 다독였다.

그녀는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니다. 제 옆에서 건강히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다독여야만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문득 미렌이 라이언의 손을 꽉 잡아 왔다.

손길에 놀란 그가 미렌을 내려다보자 그녀는 이미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평민으로 보이는 몇 명이 길을 지나는 중이었다.

“황후께서 일어났다더라. 오늘은 공작 성으로 나들이도 갔다는데?”

“뭐어? 그 황후 아직도 안 죽었나? 쯧쯧. 황제 폐하만 고생이지.”

눈살을 찌푸린 라이언이 서둘러 그녀의 귀를 덮어 버렸다. 그러며 속삭이듯 말했다.

“미렌, 듣지 마. 당신이 들을 이유가 없는 말들이야.”

기가 죽은 듯 눈을 내리깔고 있던 미렌이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제가 들어야 할 말들입니다.”

“당신이 어째서!”

“저는 앞으로도 폐하의 황후로서 살 거니까요.”

그 한마디에 라이언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그에게 미래를 약속해 준 적이 없었다.

황후의 자리는 물론 심지어는 속삭였던 사랑마저도.

언제나 죽음을 받아들인 듯 보였던 그녀가 변한 것이다.

“……그 말, 약속할 수 있어?”

“홀로 걷지 않게 해 드린다고 했잖아요.”

미렌이 따스하게 웃었다.

라이언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아 버린 것이다.

예뻤다.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제 온몸과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라이언은 미렌의 앞에 서면 한없이도 약해지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그 사랑을 그만두지 못했다.

***

밤놀이를 마친 뒤 황성으로 돌아온 미렌은 먼저 마리아를 찾았다.

“마리아, 초대장은 모두 무사히 도착했나?”

“예, 전하. 대부분의 가문에게서 답신을 받았답니다.”

“사교 파티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해. 특히 자선 파티를 명목으로 하니 이쪽으로 홍보를 확실히 하고.”

“물론이지요. 파티에 참석하신 부인들의 성명으로 모든 기부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미렌은 마리아가 내밀어 온 아르테미스가 담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간 꽤 익숙해진 쓴맛이었기에 그녀는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삼켰다.

입에 쓰더라도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니 이제는 미렌이 먼저 약을 챙겼다.

확실히 이제껏 복용해 온 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든 병을 치유한다는 전설의 꽃은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전하, 찻잔을 이만 치우겠습니다.”

“부탁할게.”

빈 찻잔을 들어 올린 마리아가 그것을 제 아래 시녀에게 건넸다.

미렌은 의자에 앉아 자선 파티 관련 서류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그때였다. 마리아에게 누군가 다가와 귓속말을 하더니 이번엔 마리아가 미렌에게 다가왔다.

“전하, 손님이 오셨답니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손님? 누가……. 그래, 자리하지.”

마리아가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미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치장을 한 뒤였던 미렌은 이번엔 마리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응접실로 향했다.

아르테미스를 마신 직후엔 조금 더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응접실로 가는 동안 복도는 고요했다.

미렌이 드레스 자락을 들고 한걸음 내딛자 안쪽에서 누군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트리온 경.”

“예.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올라오스는 절도 있게 인사했지만 말과는 달리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후와 그가 따로 시간을 가진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리아의 손을 잡고 응접실 한편에 놓인 소파 위에 앉았다.

이올라오스는 아직 앉지 않은 채였다.

“곧 사교 파티를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경의 어머니께 들으신 겁니까? 오늘 오전에 백작 부인께서도 참석해 주신다는 답장을 받았어요.”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렌은 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녀가 명하지 않는 이상 이올라오스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필요하지 않은 파티는 그만두십시오.”

“어째서요?”

“……외람되지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필요하지 않다고 하시는 겁니까.”

미렌은 고개를 들어 이올라오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죠.”

“…….”

“그런 이유에서입니까, 이올라오스 경?”

입을 다물고 있던 이올라오스는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의 눈 속에서 황후를 향한 반감은 죽지 않은 채였다.

“아닙니다.”

“그러면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황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폐하의 업적으로 남을 테고, 이런 시기에 사사로운 파티를 하는 것은…….”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폐하의 업적으로 남겠죠.”

“맞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만두십시오.”

“그러니 하겠다는 겁니다.”

미렌이 가볍게 손짓해 시립해 있던 마리아와 시녀들에게 나가라 종용했다.

마침내 응접실에 둘만 남게 되자 그녀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선대 황후께서 선황보다 먼저 돌아가신 뒤, 황후의 살롱은 수십 년간 없었습니다. 황후가 주최하는 사교 파티도 마찬가지죠.”

“그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요.”

미렌의 단호하고도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황후가 없기 때문에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황후께선 지난 8년간…….”

“지난 8년간 귀신처럼 떠돌았으니까요.”

건강하지 않았던 황후는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렌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옳은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사실 자신은 모든 책임을 미루고 있던 것일 뿐이었다.

라이언에게 제 할 일을 모두 떠맡긴 채 죽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제가 한 모든 일이 폐하의 업적이 된다고 하셨습니까?”

황후는 황제의 정치적 동반자다.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렌은 이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폐하를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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