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3)화 (43/133)

마지막 기회

“토끼?”

앞서가던 헤겔은 제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자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야시장에서 특별한 공연이라도 진행하는지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헤겔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미렌과 손을 잡고 싶어 했지만, 그녀가 거절한 터였다.

그래서 헤겔은 미렌이 제 눈에 띄지 않을 때면 수시로 돌아봐야만 했다. 이번에도 그래서였다.

“네, 헤겔 씨.”

“안 오고 뭐 해?”

“아뇨, 그냥…….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어서 가죠.”

잘못 봤나?

저 멀리 유난히 키가 큰 사내가 보였는데, 그 실루엣이 어쩐지 라이언 같아서 미렌은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그럴 리가. 황제가 이런 야시장에 있을 이유라곤 조금도 없었다.

미렌은 헤겔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걸어갔다.

그녀를 기다려 주고 있던 헤겔도 마침내 인파를 뚫고 움직였다.

“여긴 원래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아니,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닌데. 아무래도 곡예단이라도 왔나 봐.”

“곡예단이요?”

“그래. 넌 본 적도 없어?”

“어릴 적엔 아파서 저택에만 있었…… 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쳤다.

가냘픈 미렌의 몸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작 부딪친 남자는 고개만 한번 까닥이고선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놀란 헤겔이 서둘러 돌아와 팔을 붙잡아 주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그녀가 넘어져 인파에 깔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자식이, 앞도 안 보고 다니나?”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렇게 다치지도 않았어요.”

“그냥 내 손 잡지 그래? 여기서 넘어졌다간 너 바로 깔려 죽어.”

헤겔이 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어서 잡으라는 듯 손가락을 꿈지럭댔지만 미렌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황후의 몸으로 다른 남자의 손을 잡을 순 없죠.”

“황제가 당장 곁에 없으면 잡을 수도 있지.”

“그건 바람이에요, 헤겔 씨.”

미렌이 짧게 웃으며 농담하듯 말했다.

그러나 듣고 있는 헤겔도, 언급한 미렌도 순전히 농담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헤겔은 순순히 인정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이윽고 몸을 돌린 그는 미렌이 지나가기 쉽도록 먼저 길을 트기 위해 앞서갔다.

그때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크게 요동치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유랑단이다!”

“와아!”

유랑단을 따라다니는 인파로 인해 헤겔과 미렌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부딪쳤다.

몸이 약한 미렌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리에서 힘이 풀려 버렸다.

“토끼!”

“……헤겔 씨?”

사람들을 신경질적으로 밀쳐 낸 헤겔은 놀라운 힘으로 그녀를 당겨 제 품속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미렌을 감싸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이러면 헤겔 씨가 부딪칠…….”

퍽!

미렌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헤겔의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미안합니다, 하고 지나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겔 씨, 괜찮아요?”

“됐어. 동생이랑 야시장에 나왔을 때도 이러고 있었으니까.”

“동생이요?”

“그래. 걔도 너처럼 작고 약해서 잡아 주지 않았다간 사람들한테 깔려 죽을 것 같았거든.”

헤겔은 여상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미렌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꽉 껴안았다.

두어 번, 헤겔의 어깨가 휘청거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헤겔의 팔이 움찔 떨렸다.

그 사실을 눈치챈 미렌이 먼저 그의 팔을 밀어내고 품속에서 나왔다.

“감사합니다.”

“……내가 끌고 나온 건데, 뭐.”

“제가 나오고 싶어서 따라온 거예요. 헤겔 씨가 데려와 주신 거죠.”

미렌은 반쯤 벗겨질 뻔한 후드를 다시금 꾹 눌러썼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죠? 유랑단은 이미 지나간 것 같은데. 뒤늦게라도 따라갈까요?”

“유랑단을 보러 온 건 아니잖아. 그것 말고도 볼 건 많으…….”

“헤겔 씨? 왜 말을 하다 마세요?”

헤겔의 입이 다물어짐과 동시에 그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표정이 좋지 못하자 미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마주 선 헤겔의 눈빛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이상했다.

그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렌을 보고 있다기보다는, 어쩐지.

그녀의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미렌.”

쿵.

나지막한 그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졌다.

미렌은 왜인지 요란할 정도로 뛰어 대는 심장 박동에 차마 뒤돌아보지도 못한 채 손만 움찔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선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렌, 어서.”

그럼에도 그녀가 놀라 움직이지 못하자 결국 움직인 것은 상대였다.

미렌은 제 허리를 감싸는 두꺼운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귓가에 따스한 숨이 닿아 왔다.

“……폐하?”

“라이언이라 부르기로 했잖아.”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그건 내가 물을 말이지.”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있어?

라이언에게 뒤로 안긴 미렌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 위치에서 라이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이는 헤겔밖에 없을 터였다.

헤겔은 아직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자 미렌이 담담하게 말했다.

“평민들의 야시장이 궁금해서 헤겔 씨를 따라 나왔습니다.”

“미렌, 네가?”

“그게 무슨 말이세요?”

“네가 직접 나왔냐는 말이야.”

미렌은 라이언의 말 기저에 깔린 물음을 눈치챘다.

그는 지금 헤겔로 인해 강제로 나온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미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발로 직접 따라 나왔습니다.”

“……그게 더 싫군.”

“예?”

하아.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이언은 그제야 미렌에게서 떨어졌다.

대신 그는 미렌의 옆으로 서며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밤놀이가 하고 싶으면 내게 말했어야지.”

“폐하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요. 거기다 최근엔 건강도 좋지 않으셨잖습니까.”

“당신이 나와 가고 싶다는 말을 해 줬다면, 나는 전쟁이 나도 함께 왔을 거야.”

라이언은 의도적으로 헤겔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것을 미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인사시킬 새가 없었다.

라이언이 먼저 미렌의 손을 잡은 채 돌아섰기 때문이다.

“가자.”

“어딜요?”

“밤놀이가 하고 싶었다며. 아직 밤은 많이 남았잖아.”

“하지만, 헤겔 씨가…….”

“헤겔 씨?”

아아.

라이언이 그제야 헤겔의 존재를 눈치채었다는 듯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 대신 당신을 안내하러 온 게 아니었던가?”

“그건, 그러니까.”

“아니야?”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미렌은 헤겔의 눈치를 살피려다 제 손이 꽉 쥐어지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맞잡은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에 미렌은 더는 대답을 미루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라이언이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그럼 이만 가도 좋네, 카르너.”

“……예, 폐하.”

굳은 얼굴로 서 있던 헤겔은 뒤돌아 저벅저벅 걸어갔다.

미렌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그녀가 헤겔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

“라이언, 그런데 어쩌다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이올라오스와 함께 시찰을 나온 참이었어. 오늘은 유랑단이 수도에 오는 날이라 백성들이 어떤지 볼 수 있거든.”

“그렇습니까? 그럼 이올라오스 경은요?”

“저 뒤에. 저기, 보이지?”

라이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말 그대로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이올라오스가 보였다.

그도 라이언의 손길을 봤는지 가볍게 묵례를 해 왔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묻지. 당신은 어쩌다 이곳에 있어? 분명 공작 성에 다녀오고 싶다 한 사람이.”

“공작 성에 머무르던 중 헤겔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황성 출입을 금하셨다면서요.”

“……응.”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조치입니까?”

미렌은 아닌 척했지만, 눈치가 빠른 라이언은 그녀가 추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째서요?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당신이 헤겔이라 부르잖아.”

“예?”

라이언이 귀엽게 미렌을 흘겨 댔다. 자신이 지금 서운하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그렇지. 방금도 그를 ‘헤겔 씨’라 불렀지? 마리아에게도 하대를 하면서.”

“……그야 마리아는 궁정 예절을 중요시하니까요.”

“난 그가 싫어. 당신이 그와 친하게 지내는 건 더욱더.”

“친구로 지내는 게 아닙니다. 목적이 있었어요.”

“어떤 목적?”

“국경 마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도 마법사니까요.”

이야길 들은 라이언이 조그맣게 자신도 마법을 배웠어야 했다며 한탄했다. 검술을 배우는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미렌.”

“예.”

“그와 밤놀이를 나간 건, 국경 마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한 게 아니잖아.”

미렌의 입이 다물렸다. 그의 말이 옳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간 건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제가 실수했습니다. 라이언의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응.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다음부터요?”

“나 몰래…… 내가 모르게 하지 말아 줘. 그럼 카르너의 황성 출입 금지도 풀어 주지.”

라이언이 씩 웃었다.

“다만 내게 알려 달라는 말이야. 그건, 해 줄 수 있지?”

쉬운 일이잖은가. 헤겔을 만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막는 것도 아니다.

그저 라이언은 미렌에 대해 자신이 모두 알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에도 미렌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당신과 내 사이에 비밀이 없었으면 좋겠어.”

“어떤 비밀도요?”

“그래. 어떤 비밀도.”

미렌은 순수하게 웃어 오는 라이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몇 번이고 말로써 다짐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 남편을 달래 주어야만 했다.

“알겠어요. 라이언, 당신이 원하신다면.”

미렌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이, 이번이 그녀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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