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2)화 (42/133)

밤놀이

“네 아버지도 마법사였어?”

미렌으로부터 책을 건네받은 헤겔이 건성으로 몇 장을 넘겼다.

그렇게 해서 훑은 책들만 벌써 수십 권이 넘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재에는 유난히 마법에 관련한 책들이 많았다. 특히 왼쪽 벽면을 오롯이 채운 서재가 유난했다.

“그럴 리가요. 아버지는 검술을 배우셨지만 대단히 유명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정치에 일가견이 있으셨죠.”

“하긴, 발리오딘 에드가라면 나도 만나 본 적이 있으니까. 검을 쥘 사내는 아니었지.”

“헤겔 씨가, 아버지를요?”

“어. 탄신 기념일에 한 번.”

헤겔은 문득 몇 년 전 보았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작 열아홉 살에 불과했던 그는 그때 아직 마탑주가 아니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마탑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이미 차기 마탑주로 고대되고 있던 차였다.

때문에 마탑주를 대신해 연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차기 남쪽 마탑주?’

‘예, 뭐. 그쪽이 공작 전하?’

‘건방진 놈이군.’

‘못 배워서 그럽니다, 못 배워서.’

사실 그 당시 헤겔은 무척이나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위급한 동생을 위해 아르테미스를 찾아다니기도 바쁜 참인데 쓸모도 없는 공작의 탄신 연회에 참석해야 했으니까.

귀족파의 수장인 에드가 공작의 눈빛에는 기백이 담겨 있었다.

헤겔이 조금만 덜 어렸다면 아마도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을 터다.

그러나 헤겔은 그때, 지금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물론 내가 그쪽보다 더 똑똑하긴 하겠지만.’

불세출의 천재. 마법사들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헤겔이었다. 아마도 그보다 똑똑한 자는 세상에 많지 않을 터다.

감히 공작을 얕잡아 보는 말에도 에드가 공작은 쉽사리 발끈하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보다 더 똑똑하다라.’

‘그쪽은 늙었잖아.’

‘나이엔 그만큼의 지혜가 쌓이는 법이지.’

시답잖은 대화에 헤겔이 자리를 뜨려는 때였다.

문득 에드가 공작이 그에게 술 한 잔을 건네었다.

‘필요한 게 있다지?’

‘아르테미스를 알아?’

‘모를 수가 없지. 나 또한 10년을 넘게 찾아 헤맸으니까.’

툭, 툭. 에드가 공작이 습관처럼 테이블 위를 검지로 두드렸다.

‘도움을 주마.’

‘……어째서?’

‘대신, 약속하지.’

에드가 공작은 헤겔에게 아르테미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르테미스가 피는 때는 정해져 있다. 10년마다 단 한 번씩.

다만 그 시기가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헤겔의 동생은 죽었다.

헤겔이 당시 아르테미스를 구하지 못한 이유였다.

“약속……. 그래, 약속을 했었지.”

“무슨 약속 말입니까?”

“중요한 건 아니었어. 아르테미스에 대한 정보를 함부로 알리지 말라는 이야기였지.”

그러니 헤겔이 직접 라이언의 명을 듣고 아르테미스를 찾아간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제 아래에 있는 놈을 시켜 찾게 하면 되었으니까.

죽은 자와의 약속이었지만, 헤겔은 당시 도움을 주었던 남자의 말을 지키고 싶었다. 그가 어떤 이였는지와는 별개로.

“아무튼 이 책들은 슬슬 정리를…….”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아, 마리아. 들어오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헤겔이 어깨를 으쓱하며 하려던 말을 말았다. 그가 등을 돌려 읽던 책에 시선을 집중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마리아의 손에는 트레이가 쥐어져 있었다. 조그만 찻잔이었다.

“아르테미스를 마시는 날이십니다.”

“벌써 그리되었나? 아르테미스는 이제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20잔은 내올 수 있습니다. 사실 아르테미스는 아주 조금만 들어가다 보니…….”

고개를 끄덕인 미렌이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쓰디쓴 맛에 혀가 아릴 정도였지만 이제는 이것에도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끝으로 찻잔을 정리한 마리아는 나가기 전 헤겔을 힐끗 바라봤다.

물론 미렌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헤겔 씨, 하려던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이 책들은 슬슬 정리를 하자고. 곧 해가 완전히 지겠어.”

고개를 끄덕인 미렌이 헤겔과 함께 서재의 정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책을 빼낼 때와 달리 넣을 때는 마법이 얌전했다.

혹시 몰라 마지막 권마저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자 서재는 들어올 때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헤겔이 먼저 서재 밖으로 나가자 미렌도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문득, 책상에 눈길이 갔다.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저 앞에 서서 달빛을 한껏 맞고 계실 것만 같았다.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언제나 정정하셨으므로.

달칵.

서재의 문이 닫히며 곧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그래서 미렌은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달빛을 받은 마법진이 띄엄, 띄엄. 깜빡이고 있는 모습을.

***

“이만 가야겠다.”

“벌써요?”

“여기서 자고 갈 수는 없잖아. 무려 황후께서 계시는데.”

‘무려’라는 말을 강조하듯 말한 헤겔이 히죽 웃었다.

반대편 몸이 평민인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대체 오늘은 왜 오신 겁니까?”

“그냥, 수도에 들렀는데 네가 황성에서 나왔다기에. 알고는 있냐? 나 황성 출입 금지당한 거.”

“예?”

“하긴, ‘그’ 폐하께서 말하셨을 리가 없지.”

뭔가를 떠올렸는지 헤겔이 사납게 웃어 보였다. 이윽고 미렌에게 고자질하는 어투로 말했다.

“황성에서 함부로 마법을 사용한 죄란다. 말이 되냐? 어? 안 썼으면 내가 의자에 맞아 죽었을 텐데!”

“뭐……. 쓰긴 하셨잖습니까?”

“너 지금 네 남편 편드냐?”

“아닌데요.”

쯧! 헤겔이 크게 혀를 찼다.

“그래서 왔어.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더 어기고 싶잖아?”

가벼운 헤겔의 어조에 미렌도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종종 헤겔이 자신보다 연상인 게 놀라울 때가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헤겔을 배웅하기 위해 미렌이 문까지 따라나섰다.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사일런과 마리아는 보이지 않는 채였다.

문 앞에 다다른 헤겔이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미렌을 바라봤다.

“같이 갈까?”

“어딜 말입니까?”

“시장. 너, 수도에 있는 야시장은가 본 적이 없지?”

“……네.”

킬킬 비웃은 헤겔이 ‘촌사람이 가 봤을 리가.’라며 속닥였다.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미렌은 곧바로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지금은 미렌 우드가 아니었다.

함부로 그를 따라갔다가 누군가의 눈에 보였다간, 어떤 소문이 날지 몰랐다.

“다음에요. 프레니티 영지에도 시장은 있습니다.”

“거기랑은 비교가 안 될걸? 매일 열리는 야간 극장만 가도 네 눈이 돌아갈 거다.”

“괜……찮다니까요.”

야간 극장? 수도에는 그런 것도 열렸었나.

미렌 에드가는 몸이 아파서, 미렌 우드는 기회가 없어서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었다.

헤겔과의 일탈은 매혹적이었지만 미렌은 겨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예, 괜찮습니다.”

“그럼 이건?”

따악.

헤겔의 손가락이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미렌의 머리 색이며 옷차림이 바뀌었다.

미렌은 제 허리 부근으로 떨어지는 연분홍색 머리칼을 손 위로 올려 보였다.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헤겔 씨!”

“그건 선물. 난 이만 간다?”

“이건 돌려놓고……, 이봐요, 헤겔 씨!”

스르륵. 헤겔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새까만 유리 위로 그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메마른 황후는 사라진 채 연약해 보이는 평민만이 존재했다.

“…….”

미렌은 뒤로 돌아 저택을 한 번, 그리고 바깥의 까맣게 물든 전경을 한 번 바라봤다.

이내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문 쪽이었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보고 오는 거야.

“사일런과 마리아가 걱정하기 전에…….”

자신에게 약속하듯 중얼거린 미렌은 후드를 뒤집어쓰며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던 저택과 달리 시원한 바람이 그녀를 맞았다.

거리로 나온 미렌은 저 멀리 보이는 시끄럽고 반짝이는 풍경에 이끌렸다.

혹시 몰라 뒤집어쓴 후드는 한 손으로 꾹 잡고 있는 채였다.

왜인지 걸음이 빨라졌다. 누군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조급했다.

미렌이 다리가 아픈 것도 모르고 떠들썩한 거리로 나갔을 때였다.

“선물은 어때.”

팔이 붙잡혔다.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후드를 둘러쓴 헤겔이 화려하게 웃었다.

그는 아프지 않게끔 미렌의 팔을 붙잡았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으나, 미렌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알았으므로.

***

한편, 에드가 공작 성.

“폐, 폐하!”

기골이 장대한 남자 두 명이 공작 성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주인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제 손으로 직접 문을 연 것이다.

말에 올랐던 남자는 머리에 깊게 눌러쓰고 있던 페도라를 벗으며 내려왔다.

그는 승마용 장갑도 벗지 않은 채 저택의 안쪽 문을 열었다.

황제를 처음 마주했던 사일런은 마리아의 놀란 목소리에 움찔했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숙여 왔다.

“황후는.”

“전하께서는 잠깐 외출을 하셨습니다.”

“……외출?”

마침 미렌을 보았다는 시녀의 보고를 들었던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느라 마리아의 심장이 불안할 정도로 요동쳤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황제의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몹시도 불안했다.

“예, 공기가 답답해 잠시 산책을 가신…….”

“네가 따라붙지 않고, 혼자.”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녀의 실책을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누가 따라갔지?”

“……오전에 오셨던 손님이 계셨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배웅을 하러 가신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방금 전 본 게 헛것이 아니었군.

하하. 짧은 실소가 마리아의 귓가를 울렸다.

그 무거운 목소리에 질끈 눈이 감겼다.

“이올라오스.”

“예, 폐하.”

“분홍색 머리의 여인을 찾아.”

“……분홍색, 말씀이십니까?”

이올라오스는 문득 미렌 우드가 떠올랐다.

황후와 이름이 같은 여인. 이번엔 머리 색마저도 같아진 모양이었다.

우연인가?

“같이 있는 이는 남자다. 흰머리의.”

“존명.”

황제는 나른한 눈으로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인 시종들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나갔다.

그가 타고 온 거대한 말이 아직 정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장갑을 벗지 않아 다행이지. 다시 낄 수고로움이 없어졌으니.

고삐를 힘주어 쥐자 말이 거세게 울었다. 짐승 또한 아는 것이다. 제 주인이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를.

제 아내와 함께 밤놀이를 나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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