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41)화 (41/133)

사람 차별 서재

“……공작 성에 가겠다고?”

“예, 폐하.”

“폐하가 아니라 라이언.”

미렌은 일부러 당일 아침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목적지를 알렸다.

라이언에게 미리 말했다간 그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말렸을 테니까.

기실, 미렌이 공작 성에 다녀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자칫 그녀가 귀족파로 완전히 돌아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탓이다.

하지만 라이언은 단지 그것 때문에 미렌을 붙잡는 게 아니었다.

“호위를 더 붙여야겠어.”

“라이언, 그만. 걱정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길을 걷다 쓰러지면? 그곳에선 당신이 넘어져도 내가 잡아 주지 못해.”

낮게 한숨을 내쉰 라이언이 연신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걱정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사실 그저 자신이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싫은 것이었다.

미렌은 꼭 엄마 잃은 아이처럼 구는 라이언이 귀여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키가 월등히 커서 발돋움을 해야 했지만.

“라이언.”

“응, 미렌.”

“분리 불안은 안 돼요.”

라이언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러고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자신이 분리 불안의 초기 증세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분리 불안이라고? 사실인가?”

그의 질문은 미렌을 향한 게 아니었다. 제 뒤에 시립하고 있는 그의 친위대를 향해서였다.

고개 돌린 라이언의 눈빛을 받은 친위대가 움찔 몸을 떨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그저 라이언의 편을 들기 위한 대답이었다.

라이언도 그것을 알기에 깊게 팬 제 미간을 펴지 못했다.

“잠시 다녀올 뿐입니다. 내일이면 오니까요.”

“내일? 내일이면 언제쯤? 오전인가? 설마 오후? 밤에는 함께 자기로 했잖아.”

음, 그런 약속은 한 적이 없는데.

미렌은 그 사실을 짚는 대신 라이언의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러느라 그녀가 쓴 챙이 넓은 모자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를 올려다보는 미렌의 입가에는 야트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다정한 시선에 결국 라이언은 참지 못하고 미렌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강아지가 그러하듯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라이언이 웅얼거렸다.

“……응. 어서 다녀와.”

“밤에는 이불을 덮으시고요. 아직 바람이 차니까.”

“당신이 없으면 챙기지 않게 돼.”

“감기에 걸리면 제 곁에 오지 못하잖습니까.”

목덜미에서 나는 미렌의 잔향에 라이언은 두 눈을 깊게 감았다.

그녀에게 받는 오롯한 사랑이 기꺼워서, 숨이 벅찰 정도였다.

미렌은 이 마음을 알지 못하니 이러는 것이다.

알았다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을 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후와 황제의 긴긴 작별 인사는 이제야 끝났다. 둘을 모시는 각자의 시종들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로, 황후가 되고서 하는 첫 외출이었다.

***

에드가 공작 성은 황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본성은 가문의 영지에 있으나, 대개는 수도 내에 있는 저택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전하, 날이 춥습니다. 창문을 닫으시는 게 어떨까요?”

“괜찮아, 이 정도는.”

마차에 난 조그만 나무창 너머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주 볼 수 없는 구경이었다.

“저택에는 지금 아무도 계시지 않답니다.”

“로렌트는?”

“얼마 전 영지로 내려가셨다는군요.”

“마침 잘되었네.”

로렌트는 미렌을 대신해 에드가 가문을 맡고 있는 사촌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미렌의 편을 들어 주기로 약속했지만, 아쉽게도 정치적으로는 귀족파의 색을 띤 이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에드가 가문은 겉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로렌트 개인의 성향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바깥으로부터 말이 우는 소리가 들리며 타고 있던 마차가 멈췄다.

문을 연 마리아의 손을 붙잡은 미렌이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8년 만에 돌아온 공작 성이었다.

“아가씨!”

“사일런?”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춥지요? 일단 어서 안으로 드세요.”

그녀를 맞이한 것은 에드가 가문의 오랜 집사장, 사일런이었다.

“사일런,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기엔 제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많아졌지요.”

“응, 그것만 빼고 말이야. 내가 출가를 할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아.”

“아가씨께선, 아니, 전하께서는 더욱 우아해지셨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벌써 내가 스물다섯이 되었으니까.”

냉정한 아비 대신 어린 그녀를 키운 것 또한 사일런이었다. 그는 사랑받지 못하는 미렌을 언제나 가엽게 여겼다.

“몸도 좋지 않으신 분께서 이리 귀한 걸음을 해 주시다니요.”

“내 안색이 그리 별로인가?”

씁쓸하게 웃은 미렌이 모자의 챙을 끌어 얼굴을 가렸다.

사일런의 안쓰러운 눈빛을 보아하니 오늘도 그리 좋은 낯빛은 아닌 모양이었다.

슬퍼지려는 사일런의 모습에 미렌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사일런, 아버지의 서재는 아직 그대로인가?”

“그럼요. 로렌트 님께선 그 무엇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선대 가주분의 유지셨으니까요.”

“……아버지께서?”

“예. 듣지 못하셨습니까?”

“글쎄. 로렌트가 황성에 다녀간 건 워낙 오래전이니까.”

“선대 공작께서는 아가씨가 아니면 공작 성의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요.”

사일런의 말을 듣고 보니 로렌트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다만, 부녀간의 감정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당시 미렌은 아버지의 어떤 소식도 듣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 유지를 남기셨을 줄은 몰랐는데.

에드가 공작은 무척이나 갑작스레 사망했다. 밤중에 심장이 멈춘 것이다.

무척이나 정정한 사내였기에 그런 죽음을 맞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비로 인해 팔려가듯 결혼한 미렌조차도.

“서재로 가지.”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식사는…….”

“오랜만에 사일런이 만들어 준 감자 수프가 먹고 싶어. 서재에 있을 테니 가져다주겠어?”

“예, 그럼요.”

다정하게 웃은 사일런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서재 앞에 도착한 미렌은 마리아에게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다.

가문의 중요한 서류들도 있는 곳이기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

끼익.

경첩에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녹슨 쇠 소리가 났다.

아버지께서 계실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일런의 말대로 로렌트는 정말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듯했다.

내부는 창문 너머로 해가 지느라 온통 붉은빛이었다.

“……오랜만이네.”

미렌의 아버지, 에드가 공작은 언제나 서재에 계셨다.

‘아, 아버지.’

‘……미렌인가? 사일런, 아이를 데리고 나가도록.’

‘아빠, 제가 복숭아를 들고 왔는데요…….’

‘아빠? 누가 저토록 교양 없는 말을 가르친 게야!’

사일런과 함께 정원에서 소중히 키운 복숭아는 놀란 마음에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무르디 무른 복숭아는 바닥에 닿자마자 철퍽, 하고 깨져 버렸다.

어렸던 미렌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미렌은 그 뒤로 서재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크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 이곳은 어릴 적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지끈.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미렌은 두통을 감내하며 분주히 서재를 둘러봤다.

한편에 마련된 책상 위에는 조그만 금고도 있었다.

다가간 그녀가 금고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철컥!

“……응?”

그녀가 금고에 손을 대자마자 자동으로 열렸다.

어째서 아버지의 금고가 자신의 손으로 열린단 말인가?

미렌은 의아한 마음을 안고 금고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안쪽엔 조그만 액자가 있었다.

가족사진이었다.

“…….”

미렌과 닮은 여자가 액자 속에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이제 막 태어난 듯한 갓난아기가 안긴 채였다.

미렌은 말없이 사진을 응시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중앙 계단 앞에는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니까.

다만, 제 아버지의 금고에서 가족사진이 나온 게 놀라웠을 뿐이다.

그것도 어머니의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까지 담긴 사진이.

그때였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로렌트가 아니라?”

“예,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금고를 정리한 미렌이 밖으로 나가자 고개 숙인 시종들이 보였다.

손님이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손님이라니. 아마도 그건 제 손님이 아니라 로렌트의 손님일 텐데.

생각은 미뤄 둔 채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소파에서 다리를 꼰 채 앉은 자세는 귀족이라기엔 무척이나 교양이 없어 보였다. 거기다 풀어진 셔츠 위로 겉옷조차 없었다.

“헤, 헤겔?”

“어, 오랜만이다?”

“헤겔 씨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남쪽에 계시지 않고…….”

“이올라오스 따라서 왔는데.”

그러다 문득 이올라오스가 그녀의 생각보다도 일찍 도착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솜씨가 좋은 마법사를 고용했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출처가 헤겔인 모양이었다.

“데저트 영지까지만 데려다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처음엔 그래서 헤어졌는데, 마침 거기가 축제 기간이더라고. 남는 손이 없다나.”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습니까?”

“버려진 신문에 커다랗게 쓰여 있던데. 건강해진 황후의 첫 외출!”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미렌이 제 이마를 붙잡고 헤겔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녀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서재에서부터 이어져 온 두통이 잠깐 심해진 탓이다. 아마 헤겔을 이곳에서 봐서 놀라서겠지.

“역시 신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게 건강해진 모습이야?”

“오늘은 집에 오느라 화장을 덜 해서 그런 겁니다. 사람을 만날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요즘 화장은 병도 고쳐 주나?”

“말장난은 그만하시죠.”

콜록. 헤겔을 슬쩍 노려보던 미렌이 짧게 기침했다.

모든 사실을 아는 헤겔의 앞이라 그런지 자꾸만 긴장이 풀어졌다.

“그래서 여긴 어떻게 오셨는데요.”

“너 심심할까 봐. 놀아 주러 왔지.”

“심심해 보이는 건 헤겔 씨 같으신데요. 저도 놀아 드리고 싶긴 한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아버지께서 남기신 것들 중에 국경에 대한 게 있나 찾는 중인데요.”

“아아, 국경.”

미렌은 결국 헤겔을 데리고 서재로 왔다.

마리아가 묘한 눈으로 보기는 했지만, 전에 봤던 적이 있는 덕분에 의심을 사진 않았다.

그와 함께 서재에 돌아온 순간이었다.

“뭐야.”

“예?”

“무슨 마법이……, 잠깐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헤겔은 서재의 정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엔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헤겔이 발끝으로 대강 카펫의 끄트머리를 뒤집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펫 아래를 가득 채운 어지러운 마법진이었다.

“보아하니 네 아버지께서 재미난 장난을 쳐 두신 모양인데.”

“장난이요?”

“이거.”

툭툭. 카펫은 헤겔의 손길 한 번에 완전히 뒤집어졌다.

마법에 무지한 미렌이 보기에도 제법 복잡한 문양이었다.

“보호 마법이잖아.”

“자세히 좀 말해 봐요.”

“이 방, 서재 전체에 걸려 있어. 그 어떤 물건도 움직이지 못하게.”

서재는 아버지가 사용하셨던 책상을 제외하고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헤겔은 그 책들 중 한 권도 빼낼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믿지 못하는 눈치자 헤겔이 먼저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책장에 꽂힌 책을 빼냈을 때였다.

파직!

“아.”

“헤겔 씨!”

책을 건드린 헤겔의 손에 조그만 스파크가 터졌다. 놀란 미렌이 서둘러 다가올 정도였다.

헤겔이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웃긴 서재네. 책을 읽을 수 없는 서재가 세상에 어디 있냐?”

발갛게 달아오른 헤겔의 손끝을 바라보던 미렌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조금 전, 그녀는 이곳에서 금고를 만졌었다.

설마 싶어 그녀가 헤겔이 만졌던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미렌의 손에 두꺼운 양장본 하나가 딸려 나왔다.

“…….”

“……이거 사람 차별하냐?”

미렌의 손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손에 쥐어진 책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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