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다
데저트 영지에 도착한 이올라오스는 정신을 잃거나 다친 죄인들을 단단히 구속했다.
그를 바라보던 헤겔도 이제 그만 가도 되겠다며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우드 씨는 정말 평민이 맞습니까?”
“뭐?”
헤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걔 부모님은 프레니티 영지에서 평생을 살았다던데.”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상하네요.”
“뭐가?”
“말투나 태도며……. 가끔 평민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고귀한 이처럼 행동하십니다.”
지독한 놈.
헤겔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검, 속된 말로는 황제의 개라고도 불리는 이올라오스였다.
그 별명답게 수상한 냄새를 맡는 코도 극도로 발달한 모양이었다.
“뭐, 조부 중에 몰락한 귀족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원래는 테룬 공국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올라오스도 헤겔의 의견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럼 내 일은 여기까진가. 데저트 영지라면 사설 마법사들도 있겠지.”
“예, 도움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마법사님, 부디 조심히 가십시오.”
헤겔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저 멀리 걸어갔다.
방향은 프레니티 영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 기다란 뒷모습을 이올라오스는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다 툭,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런데, 마법사님.”
이올라오스의 얼굴 위로 스멀스멀 다정한 미소가 펼쳐졌다.
아니, 다정하다기엔 이상했다.
꼭 뱀처럼 싸늘해 보였으므로.
“그 한낱 평민에게 어째서 그토록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
자리를 털고 일어난 라이언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모습으로 황좌에 돌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비단 라이언의 힘이 아니라, 그 옆자리를 채운 미렌의 덕분일지도 몰랐다.
라이언이 정무를 보러 간 사이, 오랜만에 쉴 틈이 난 미렌은 침대에 눕는 대신 정원에 있는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평민 미렌의 시간을 줄인 지 사흘째였다.
낮에도 오랫동안 일어나 있는 황후의 모습에 반색한 것은 물론 라이언이었다.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마리아, 무슨 일인가?”
시녀들로부터 무언가를 들은 마리아가 황급히 달려왔다.
허리를 숙인 마리아는 다른 시종들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이올라오스 경께서 돌아오셨답니다.”
“벌써? 빨리도 왔군.”
“이올라오스 경을 이쪽으로 모실까요?”
미렌은 미리 마리아에게 이올라오스가 황성에 도착하거든 언질을 주라 이야기한 터였다.
그를 도운 것도 자신이었으니 곧 올라오리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머나먼 시골 영지에서 이토록 빨리 달려올 줄이야.
미렌은 마리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다만 폐하를 마중하러 가야겠네.”
“폐하를요?”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상전이 먼저 폐하를 뵈러 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남들에게 그 모습이 보였다간 추문이 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느린 걸음으로 대회의장까지 가는 길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회의는 이미 끝자락에 다다랐던 모양인지, 그녀가 기다리지 않아도 문이 열리며 대신들이 빠져나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빈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아직 막 돌아온 듯한 이올라오스와 라이언만이 존재했다.
“잡은 놈들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만, 그는 잡지 못했…….”
웃지 않는 얼굴로 보고를 올리던 이올라오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도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미렌을 발견한 탓이었다.
이올라오스의 눈에는 선명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이미 황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은 바가 있던 미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렌은 황좌에 가까이 가는 대신 신하의 자리 한 곳을 차지하며 그곳에 멈춰 섰다.
“미렌, 어째서 그곳으로 가는 거야. 거긴 너무 추울 텐데.”
“저 또한 폐하의 신하입니다. 제 자리는 이곳이 맞아요.”
“나는 부인을 신하로 둘 생각은 없어.”
짐짓 단호하게 말한 라이언이었지만 미렌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그녀에게 지고만 라이언이 보고를 속행하라는 듯 이올라오스에게 턱짓했다.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들으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 죄인들의 상태에 대한 보고입니다.”
이올라오스는 그녀가 듣기에 잔인한 이야기라며 에둘러 말했지만, 사실 그저 라이언의 편인지 확실치 않은 미렌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속내를 짐작한 미렌이 눈썹을 꿈틀거렸을 때였다.
라이언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이올라오스를 내려다봤다.
“이올라오스 트리온 경.”
“예, 폐하.”
“죽고 싶은가?”
채앵!
라이언의 한마디에 이올라오스가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번뜩이는 칼날에도 이올라오스는 개의치 않고 그것을 제 목전에 가져갔다.
이미 눈을 감은 태도는 자신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 듯 보였다.
“황송할 짓을 하지 마.”
“목숨으로 답하겠습니다.”
“아니. 미렌이 보기엔 심히 좋지 못하니, 이만 집어넣도록.”
그 한마디에 이올라오스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제자리로 돌렸다.
다만 그의 목에는 날카로운 칼날에 이미 베였는지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고를 속행하지.”
“……붙잡은 10명 중 8명은 반신불수이며, 2명은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토해 내게 해.”
“존명.”
이올라오스의 고개가 땅에 처박힐 듯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로도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상하게도 국경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끝끝내 이올라오스는 국경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물러갔다.
둘만 남게 되자 라이언이 서둘러 황좌에서 내려와 미렌에게 달려왔다.
“미렌, 의자가 춥지 않던가?”
“라이언, 대회의장만큼 따뜻한 곳은 황궁에도 몇 없습니다.”
“그래도…….”
그가 속상한 듯 제 옷을 벗어 주려 들었다.
그러나 미렌은 라이언을 막아섰다.
“회의에선 별일이 없으셨습니까?”
“이미 급한 건 모두 처리가 되어 있었으니까. 내가 할 게 이토록 없던 적은 황제가 되고서 처음이야.”
“정말이요?”
라이언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오히려 미렌이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금 물었다.
“그런 분이 제가 들어왔을 때 그토록 표정이 좋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봤어?”
“보지 못했을 리가요. 분위기가 싸늘했는데.”
“시종들을 혼내야겠군. 황후가 들어오는데 알리지도 않다니.”
“제가 그러라 했습니다. 혹여나 방해가 될까 싶어서.”
“당신이 방해될 일은 없어. 적어도 내게는.”
거기까지 말한 라이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미렌과 눈이 마주치자,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국경이 뚫렸다는군.”
“……국경이요?”
“그래. 선대에도, 선선대에도 굳건함을 과시했던 국경이 뚫렸어. 베르디움 공작가에선 이때다 싶어 나서더군.”
회의 중 돌아온 이올라오스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대신들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0명을 붙잡았으나 도망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절 도와준 평민이 말하기를, 그가 달아난 방향이 테룬 공국이라더군요.’
‘잠깐. 이올라오스 경, 그 말인즉슨 국경이 뚫렸다는 건가? 자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제가 마법에 무지하여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현재 심증은 그뿐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던 국경일세. 그게 지금 뚫렸다고?’
베르디움 공작의 고함에 결국 라이언이 손을 들었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이올라오스 경이 쉽사리 놓쳤을 리가 없지. 목격자도 있는 모양이고.’
‘폐하, 황송하오나 경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한낱 테룬 공국이 어떻게 제국의 국경을 넘는단 말입니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문제겠지.’
베르디움 공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이끄는 귀족파들도 대부분 석연치 않은 것처럼 수군거렸다.
결국 회의는 이렇다 할 결과를 이끌지 못하고 끝났다.
귀족파 대신들은 물론 황제파들도 국경이 뚫렸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국경이 갑작스레 밖에서 뚫렸을 리는 없어.”
“그 말씀은…….”
“분명 내통자가 있었을 테지.”
이제껏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던 국경이 갑작스레 뚫린 것은 역시 이상했다.
만약 그랬다면 몇 년 전부터 눈치를 챘을 터다.
“그것도 꽤나 권력이 있는 이야. 한낱 소귀족이 벌이기엔 꽤나 큰일이니까…….”
“베르디움 공작가를 의심하십니까?”
“아니라곤 못 하겠군. 회의장에서 오늘처럼 직접 움직이는 양반은 아니라.”
미렌의 얼굴이 슬며시 어두워졌다.
귀족파의 수장인 베르디움 공작이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 에드가 공작의 자식인 자신도 의심을 거둘 수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였으리라. 이올라오스의 경계심 어린 태도는.
“찾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국경이 뚫린 방법…… 말입니다.”
“황실에서도 알 수 없는 방법이야. 아마 알아내는 게 쉽지는 않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
이제껏 고심에 찼던 모습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라이언이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미렌의 이마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
“서로의 걱정을 하는 건 나로도 충분해.”
***
“전하, 괜찮으십니까?”
황후의 목욕 준비를 마치고 다가오던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 오전, 회의장에 다녀온 미렌은 그 뒤로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뒤늦게 마리아의 말을 들은 미렌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아, 벌써 준비가 끝났나?”
“물이 식고 있습니다. 다시 데울까요?”
“되었어. 그렇게 할 필요까지야.”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은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무거운 예복을 벗었다.
한 자락씩 옷이 벗겨질 때마다 그녀의 안쓰러울 정도로 메마른 몸이 드러났다.
목욕 시중은 보통 아래 시녀에게 맡기지만, 마리아는 언제나 그녀를 직접 도왔다.
미렌이 남에게 못난 자신의 몸을 함부로 보여 주기 싫어할뿐더러 마리아가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팔을 닦겠습니다, 전하.”
“아,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팔을 닦겠다는 말에도 영혼 없는 대답을 할 뿐, 코 아래까지 물에 담근 채 나오지 않는 미렌의 모습에 결국 마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제가 팔도 주지 않고 팔을 닦으라 했다는 것을 알곤 머쓱하게 왼팔을 물에서 꺼냈다.
그러며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국경을 멋대로 넘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국경이요? 지금은 해제 방법을 찾을 수도 없는 고대 마법으로 걸려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기는 한데……. 만약 방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뭘까 싶어서.”
테룬 공국이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넘었는가였다. 그 방법만 안다면 내통자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마법이니 마탑이 가장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마탑과 황실은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그런데 초기 황실이 만든 마법에 대해 마탑이 알고 있을 리가 없지.”
헤겔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해 봤지만, 헤겔도 이미 당한 적이 있는 국경의 마법이었다.
만약 그가 알았더라면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다쳤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잖습니까?”
“하나?”
“황실이지요.”
하지만 라이언도 알고 있는 바가 없다고 했었는데…….
그 순간이었다. 문득 미렌은 에드가 공작가가 떠올랐다.
에드가 공작가는 대대로 제국의 황후를 만든 집안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이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그녀가 문득 물속에서 일어났다.
팔을 닦고 있던 마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미렌을 올려다봤다.
“공작 성에 다녀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