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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9)화 (39/133)

날지 못하는 새가 되어

“……래서, 그만 실례를 했지 뭔가요?”

“어머, 너무 귀엽네요. 하긴, 그 나이대 아이들은 무릇 그런 법이죠.”

부인들이 나누는 대화에 미렌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물을 마셨다.

황후인 그녀가 먼저 입을 열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살롱이란 대부분 몇 시간이고 계속 진행되는 편이므로 체력을 아껴야만 했다.

살롱에서의 모습은 곧 황후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퍼져 나갈 것이다.

미렌은 진통제의 약효가 다하지 않길 바라며 부인들을 살폈다.

입을 여는 쪽은 보통 가장 지위가 낮은 이들이었다.

그때, 내내 입을 닫고 있던 베르디움 공작 부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우리 그이는 곧 아이에게 자리를 넘겨준다더군요.”

“베르디움 공작께서는 아직 젊으신걸요?”

“그야, 곧 조세 개편으로 귀족들에 대한 상속세가 커지니까요. 미리 하나씩 준비를 하시려는 겁니다.”

공작 부인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귀족들에 대한 상속세를 개편하는 방안은 황제파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디움 공작가에서 그걸 신경 쓰실 줄은 정말 예상도 못 했답니다. 상속세가 오르긴 했지만, 트리온에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라.”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트리온 백작 부인이 툭, 지나가듯 내뱉자 공작 부인의 입매가 움찔 떨렸다.

부채를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랫것들이 들으면 베르디움 가를 모욕하시려는 거라 오해하겠어요, 백작 부인.”

“어머.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저 제 가문의 사정을 말씀드렸을 뿐이니 너무 노하지는 말아 주셔요.”

공작 부인의 부채가 확 펼쳐졌다. 미묘하게 구겨진 입가를 가리기 위한 용도였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그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한 모금 들이켤 뿐이었다.

미렌은 이올라오스 경의 어머니답다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공작 부인의 고개가 미렌을 향해 돌아갔다. 의외의 질문이 터져 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은 그저 상속세가 오르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달랐다.

그녀가 누구의 편을 드는지에 따라 이 자리에서 황후의 입장을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황제파, 혹은 귀족파 중 하나로.

트리온 백작 부인도 공작 부인을 말리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렌은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보다 결국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에드가 공작가의 후계는 제가 아닌 외사촌이셨죠. 여러분이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어머, 잊었을 리가요. 종종 파티에서 뵙기도 한답니다.”

미렌이 황후가 되면서 그녀는 사실 ‘미렌 에드가’가 아니라 ‘미렌 에드가 워로덴’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공작가의 재산도 상속받지 못했다.

주인 없는 가문은 가장 가까운 사촌에게 돌아갔는데, 다행히 미렌과도 친분이 있는 사촌이었다.

그는 흔쾌히 미렌과 협력 관계를 맺어 둔 상태였다.

그건 모두 미렌이 결혼하기 전에 정해진 것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서.

“때문에 아직 제가 상속세로 인해 곤란해져 본 적은 없네요. 아쉽게도.”

“하지만, 전하께서 낳은 아이가 여럿이라면 에드가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이겠지요.”

미렌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건강이 좋지 않은 미렌이 아이를 낳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작 부인과 백작 부인도 순간 입술을 말아 물며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문득 공작파 귀족 가문의 부인 중 하나가 입을 연 것은.

“그래도 전하라면 저희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한답니다. 전하께서도 황후이기 전에 귀족이셨는걸요. 그렇지요?”

노골적인 말이었다.

거기에 응했다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황제파 사람들이 다시는 살롱에 참석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귀족파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미렌이 할 말을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황족이지.”

여성들 특유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두꺼운, 어둡게 가라앉은 것만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미렌의 머리 바로 위에서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치뜬 미렌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라이언이 서 있었다.

“미렌, 재미난 것을 하고 있군.”

“라이,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앉아 있던 부인들이 모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들로선 자주 볼 수 없는 황제의 얼굴이었다.

모두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인사를 전해 왔다.

“고귀하신 제국의 태양, 폐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라이언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말 대신 미렌에게만 말을 걸어 왔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색에 미렌이 당황해 그들과 라이언을 돌아볼 정도였다.

“미렌, 약한 몸으로 왜 이곳까지 나온 거야. 거기다 그 옷차림은 대체…….”

한숨을 깊게 내쉰 황제가 제 겉옷을 벗어 미렌의 어깨에 둘렀다.

무려 황제의 예복이었다.

미렌이 연신 놀라 손만 움찔거리는 사이, 라이언이 앉아 있는 미렌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려 왔다.

차갑게 식은 그의 손이 유달리 뜨겁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미열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미열은 미렌에게 있어 달고 사는 것과도 같았다.

“열이 나잖아.”

“폐하, 제 몸은 괜찮……! 폐하!”

라이언이 미렌의 다리 뒤로 손을 넣어 꼭 아기를 안듯 들어 올렸다.

부인들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렸다.

황제 부부의 이토록 사사로운 장면은 처음 봤을 터였다.

그중 오직 트리온 백작 부인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살롱은 이만 끝내도록 하지. 이미 4시간이나 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라이언은 부인들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를 안고 떠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부인들만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릴 뿐이었다.

***

“폐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해야 할 일?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군. 미렌, 대체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시켰지?”

“……폐하.”

“사흘 만에 눈을 떠 보니 밀려 있어야 했을 국정은 모두 처리된 후였고, 일주일째 눈뜨지 못했던 나의 아내는 30년 만에 황후의 살롱을 열었다더군. 그것도 각 주요 가문의 부인들을 모두 모아서.”

담담하게 말하던 라이언의 얼굴은 끝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결국 황실 복도 한가운데에서 미렌을 내려 줬다.

마주 선 미렌의 뺨 위로 라이언의 두꺼운 손이 닿았다.

그의 손가락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화장한 그녀의 얼굴은 라이언의 심장을 속절없이 뛰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작 화장으로 자신의 병색을 숨기려 했음을.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미렌의 건강을 알 수 있는 남자였다.

라이언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미렌이 변한 것 같아 심장이 덜컥거렸다.

“대신들이 시켰나? 아니, 내 아래에 있는 이들 중 하나겠지. 쓰러진 나를 대신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던가? 미렌, 말해 봐. 누가 당신에게 이런 걸 시켰지?”

“폐하.”

“말해.”

고통과 슬픔으로 번졌던 라이언의 얼굴은 어느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의 방향은 그를 대신해 미렌에게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게끔 만든 누군가였다.

“라이언.”

“……응.”

“폐하께서는 황제잖습니까.”

“…….”

“그리고 당신의 아내인 나는 황후입니다.”

라이언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입에서 듣는 ‘당신의 아내’라는 말은 몹시도 달콤했으나, 뒤이어 따라온 황후라는 말은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몸이 좋지 않은 그녀에게 무거운 감투를 씌워 준 것만 같아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바람에.

그러나 라이언은 어두운 제 속내를 감췄다.

황제가 되지 못했다면, 그가 미렌과 결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라이언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껏, 이 춥고 외로운 길을 혼자 걷게 해서 미안해요.”

황실의 복도는 화려했으나 한편으로는 싸늘했다.

라이언은 아마도 언제나 이 길을 홀로 걸었을 것이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자신의 아내로 인하여.

모든 공식 행사를 홀로 가야 했고, 모든 일을 알아서 해내야만 했다.

그간 미렌이 라이언에게 맡긴, 아니 내던진 짐들이었다.

“나는 이제 다시는 당신을 홀로 걷게 하지 않을 겁니다.”

“…….”

“제가 그림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태양은 고고히 빛났다.

미렌은 그래서 결심했다.

그 태양이 타오르도록 그림자가 되겠다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눈부신 이 사람을 위하여.

그때였다. 덜컥, 라이언이 미렌을 한가득 안아 왔다.

그녀는 라이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안겨야만 했다.

지척에서 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눈에 띄게 빨리 뛰고 있었다.

“그러지 마.”

“라이언.”

“그러다 당신이 쓰러질까 두려워…….”

싫다. 정말 싫어.

라이언은 미렌을 처음 만났던 8살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떼를 써서라도 미렌을 말리고 싶었다.

그녀가 무리하다 쓰러지는 모습을 다시금 봤다간,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자신은 독약을 마시고 그녀를 따라갔으리라.

“쓰러지지 않겠습니다.”

“……거짓말.”

“매일 건강하겠다 장담하지는 못하더라도, 라이언이 걱정하지 않을 만큼……. 그만큼은 버틸 테니까.”

라이언의 등을 쥐고 있던 미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느라 값비싼 예복이 구겨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여 제 품에 안긴 미렌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볼 뿐이다.

“아니. 나는 당신이 건강해도 하루 온종일 걱정을 할 거야. 오히려 당신이 날 신경 써 주겠다고 버티는 게 더 싫어.”

“하지만, 라이언.”

“당신이 무엇을 하든 말리지 않아. 나 때문에 당신도 이곳에 갇혔으니 내가 어떻게 말릴 수 있겠어. 다만.”

날 이곳에 혼자 두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 나지막한 애원에 미렌은 결국 품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자신을 안은 이 팔의 떨림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고도 미렌은 오랫동안 라이언의 등 뒤를 느리게 두드려 주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 그녀였지만, 부인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남자의 마음도 제 몸만큼이나 성치 않을 터였다.

그래서 미렌은 알지 못했다.

자신을 끌어안은 라이언의 얼굴이 미묘한 희열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불안과 초조, 희열과 만족이 뒤섞인 그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처절했다.

품에 안긴 미렌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꼭꼭 끌어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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