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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8)화 (38/133)

여왕

미렌의 한마디에 내내 다정한 얼굴이던 이올라오스가 미소를 지웠다.

국경.

한 나라의 국경이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위치를 가졌다.

더군다나 이올라오스를 비롯한 제국인이라면 국경에 걸린 고대 마법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런데 고작 테룬 공국의 밀정 따위가 간단하게 넘어 다닐 정도로 쉽사리 뚫렸다니.

“……국경이 뚫렸다니요. 우드 씨,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들은 빠르게 소식을 받을 수 있는 프레니티 영지에서 만남을 이어 왔습니다. 정식 검문소가 있는 데저트 영지를 두고서요.”

“그런데요?”

“그들은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굳이 먼 데저트 영지를 통하지 않고도, 빠르고 쉽게 국경을 넘어 프레니티 영지로 올 수 있는 방법을 아니까.”

미렌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올라오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만약 국경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테룬 공국이 지금 당장 국경을 넘어 들어와도 제국은 대처할 수가 없다.

전황은 손쉽게 테룬 공국 측으로 넘어가 버릴 터다.

쓰러진 자들을 정리하는 이올라오스의 손속이 빨라졌다.

지금 당장 황성으로 올라가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모두 자결하지 못하게끔 입과 손을 막은 이올라오스가 그들을 한데 묶었다.

그러고서 헤겔에게 성큼 다가왔다.

“마법사님,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무리 나여도 이 사람들을 모두 황성으로 보내지는 못하는데. 거기다 알잖아? 수도에서 이동 마법을 함부로 썼다간 범법이라고.”

“저도 거기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 데저트 영지까지만 부탁드립니다.”

“거기 게이트를 이용하려고? 그래, 뭐. 그쯤이야.”

귀찮아하면서도 헤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지개를 켠 그가 이동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이올라오스가 미렌에게 다가왔다.

“우드 씨, 같이 가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이올라오스의 제안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혹시 그가 무언가 눈치라도 챈 건가 싶어 눈을 바라봤지만, 딱히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도……요?”

“예. 폐하께서 이야길 들으시면 우드 씨의 공도 치하해 주실 겁니다.”

어쩌다 라이언까지 만나게 생겼다.

미렌은 부러 입을 다물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그냥…… 그냥 제 죄를 감해 주시는 걸로도 충분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 방에서 몰래 편지를 보다 들키셨죠. 대체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그건, 그러니까.”

궁금해서? 어쩌다 보니까? 수십 가지의 변명이 스쳐 지나갔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미렌이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왔다.

고개를 돌리자 헤겔이 불량한 자세로 곁에 서 있었다.

“내가 시켰어.”

“……마법사님이요?”

“그래. 제국의 기사가 한낱 시골 영지를 들쑤시고 다닌다는데 이유가 궁금하잖아.”

헤겔이 고개를 돌려 미렌을 바라보며 그렇지? 하고 눈으로 물었다.

그의 얼굴 위로 짓궂은 미소가 떠오른 것은 다음이었다.

“아, 예. 마법사님이 잘 해내면 일당을 두둑이 주겠다고 하셔서…….”

“이런, 제가 엄한 사람을 잡았군요. 왜 그때 바로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안 들었잖아.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올라오스는 이미 헤겔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는 듯 그에게 시선을 돌린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프레니티 영지는 남쪽 마탑의 영역이야. 누가 내 땅을 멋대로 들쑤시는데 참고만 있나?”

“그 발언은 조심하셔야겠군요. 제국의 모든 땅은 폐하의 것입니다. 단지 네 개의 마탑 간에 영역이 있을 뿐이지…….”

“아아, 그래. 따분한 이야긴 그만하고 자리를 옮기지.”

성가시다는 듯한 헤겔의 태도에 이올라오스는 만족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더 대화를 이어 갈 새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 헤겔이 그녀에게 속삭여 왔다.

아직 어깨를 감싼 팔은 풀지 않은 채였다.

“혼자 갈 수 있냐. 난 저 귀찮은 놈을 치우고 와야 할 것 같아서.”

“여기가 제집 앞인데 무슨 소리십니까? 됐으니까 이 팔부터 치워 주시죠.”

“곤란한 것 같아서 도와줬더니 싸늘하네.”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네가 알아서 도움을 청한다고? 잘도 그러겠다.”

말을 마친 헤겔도 결국 미렌에게서 떨어져 이올라오스에게 다가갔다.

모두 한곳에 서자 헤겔이 홀로 있는 미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인사를 전했다.

‘다녀올게.’

아주 이곳이 제 고향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에는, 미렌 혼자였다.

***

미렌은 집에 돌아가는 대신 이올라오스가 머물렀던 여관으로 향했다.

집에는 잠시 데저트 영지로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편지를 남긴 뒤였다.

평소에도 미렌에게 잠이 많다며 걱정인 부모님이셨으니, 아마 지금부터 미렌이 할 행동을 보셨다간 기함할 터였다.

미렌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제 손에 든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수면초.

정확히는 수면초를 빻아 가루로 만든 것이었다.

미렌의 머리맡 창문에서는 어젯밤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것을 흡입했다.

일반적인 복용량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그녀가 잠에 빠져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허억.”

가슴을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이 침대 바닥을 짚었다.

그녀는 옆에 선 마리아를 보지도 못한 채 다급히 말했다.

“진통……, 진통제를 줘.”

마리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에게 진통제를 건네었다.

진통제 중에서도 효과가 강한 종류였다.

미렌이 물 한 잔과 함께 그것을 단숨에 삼키는 동안, 마리아는 곁에서 아르테미스를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마리아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누가 보면 내가 독약이라도 먹는 줄 알겠어, 마리아. 고작 진통제야.”

“의원께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기껏해야 머리가 어지러운 정도겠지.”

목 너머로 약을 넘기자 온몸을 괴롭혔던 고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미렌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물론 고작 약 따위로 남들처럼 편하게 걸어 다닐 수는 없어서, 마리아의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오늘은 공식적인 회의 날이 아닙니다. 대신들도 주말인 터라…….”

“그래. 그들도 쉴 때가 있어야지. 그럼 오후엔 가벼운 살롱이나 열어 볼까.”

“살롱이요?”

마리아가 놀라 되물었다.

살롱, 그러니까 귀족 부인들의 전유물인 사교 파티에 미렌은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황후가 되기 전 데뷔탕트 정도야 치렀을까.

사교계에 나서기엔 그녀의 미색보다 병색이 더 두드러진 덕분이었다.

“대신들이 쉰다고 해서 부인들까지 쉬는 건 아니잖은가.”

“하지만, ‘황후의 살롱’은 여태껏 열린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야 아무리 폐하시더라도 그것까지 날 대신할 수는 없으셨을 테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결국 수긍한 마리아도 그 뒤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살롱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아무리 비공식적인 약식 파티라 하더라도, 황후의 명예가 실추되어서는 안 되니까.

미렌은 오랜만에 마리아 대신 개인 시녀들에게 치장을 맡겼다.

공을 들여 드레스를 입은 미렌이 화장대 앞에 앉았다.

“가장 화려하게 하도록.”

“화, 화려하게 말씀이십니까?”

“그래. 병색이 드러나지 않게끔 해 주어.”

고집스럽게 말한 미렌은 두 눈을 감았다.

화장을 맡은 이가 당황한 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껏 미렌이 화려한 화장을 명한 적은 없었으니까.

눈에 띄지 않게 해 주시게.

너무 사치스럽지 않게.

황후의 명은 매번 그러했다. 사실 그조차도 드문 명이었다.

매 시간마다 건강이 악화되는 이가 화장을 할 틈은 없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화장을 마친 미렌이 눈을 떴다.

거울 속에는 붉은 눈두덩이가 두드러지는 여인 한 명이 존재했다.

미렌이 그것을 보며 자조하듯 웃었다.

“고작 화장 따위로 가려질 리가 없지.”

전문가의 도움으로 그 모양새가 우습진 않았으나 그뿐이다.

못난 얼굴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생기 있어 보인단 걸까.

“전하,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수고했어.”

미렌은 더 말하지 않고 그렇게만 덧붙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파티에 차고 나갈 장신구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마리아가 들어왔다.

마리아는 웬일로 머리가 다소 흐트러진 채였다.

“전하, 트리온 백작 부인과 베르디움 공작 부인께서 곧 도착하신답니다.”

외에도 그녀의 살롱에는 제법 명망 있는 가문의 부인들이 모였다.

미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롱이 준비된 회장으로 걸어갔다.

계속해서 진통제를 복용한 탓일까.

어쩐지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걷는데도 다리가 평소보다 둔감한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회장에 들어서기 전까지였다.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미렌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둘러봤다.

언제나 풀어 두었던 머리를 꼼꼼하게 틀어 올린 미렌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 저명한 가문의 부인들답게 예의에 맞는 인사가 전해졌다.

미렌은 그저 눈썹을 한번 까닥여 대답해 주고서 상석으로 향했다.

마리아가 빼낸 의자에 앉자 부인들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살롱에 모인 부인들은 미렌을 포함해 고작 10명이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주어 모두 고맙군요.”

“과분한 자리에 초대를 받아 기쁘답니다, 전하.”

“전하께서 처음으로 연 살롱에 초대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이야기에 미렌이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미묘한 말이지 않은가.

황후가 처음으로 연 살롱에 초대되어 놀랐다니.

꼭 그녀가 살롱을 한 번도 열지 않았음을 꼬집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간 몸이 좋지 않아 이런 자리를 만들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하물며 부인들에게 신경을 쓰지도 못했군요.”

“아니에요, 전하.”

“그럼요, 전하. 사교계는 언제나 변함없이 흘러가는 것을요.”

사교계는 언제나 변함없이 흘러간다. 이 말 또한 우스웠다.

황후가 없어도 사교계는 괜찮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렌은 구태여 그것을 꼬집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부인들은 모두 미렌에게는 적도, 아군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 알지 못했다.

귀족파였던 에드가 공작의 유일한 딸이자, 황제의 가장 사랑하는 부인.

이제껏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은 미렌은 그토록 애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렌은 그런 자신의 자리를 십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릴까요. 나는 곧 황궁에서 사교 파티를 열까 합니다.”

“사교 파티를요?”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열 명의 여자들로부터 모두 흥미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렌이 자신의 자리를 이용하는 방법은, 먼저 황제파와 귀족파로 나뉜 이들을 다른 방법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라는 가장 단순하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이제껏 황후인 미렌이 조용히 있었기에 황성에서는 사교 파티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저명한 공작가라 하더라도 황성의 사교 파티와는 그 명예를 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교 파티의 후원자를 여러분들로 할까 합니다.”

“알량한 힘이나, 베르디움 공작가에서도 전하를 돕겠어요.”

“아니요, 공작 부인.”

“네?”

미렌이 자애로운 얼굴로 베르디움 공작 부인을 바라봤다.

화려한 장미꽃 같은 여인이 의아한 얼굴로 미렌의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지금, 여러분의 가문이 아닌 여러분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래요.”

이들에게는 엄연히 지위가 있었다.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것은 모두 황제가 내린 지위였으므로.

미렌은 후원자의 이름으로 그것을 올리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사교 파티에서 각 가문의 대표는, 부인들이 될 것입니다.”

“…….”

그들로부터 무거운 침묵이 흘러나왔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머릿속으로 팽팽히 손익을 따지고 있었을 테니까.

“저, 트리온 백작 부인은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베르디움 공작 부인도 마찬가지예요.”

“저, 저도…….”

하나둘씩 손을 들어 입장을 표명하자 미렌의 미소도 짙어졌다.

그녀는 여인들을 모두 훑어보며 말했다.

“제국의 내실은 모두 우리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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