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귀신
“잠, 허억. 천천히 좀 달려!”
“어두워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헤겔 씨, 조금만 더…….”
헤겔의 손목을 꽉 붙잡은 채 거의 끌다시피 달리고 있던 미렌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손을 놓지 말라고 단언하던 이는 대체 어디 갔는지 오히려 미렌이 헤겔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중이었다.
하긴, 마법 고서나 읽던 그가 미렌 우드의 체력을 따라가긴 힘들 터다.
결국 미렌과 헤겔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슬슬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으니 적당히 숨을 작정이었다.
“이쯤 되면 이올라오스 경도 눈치를 채셨을 겁니다. 우리는 산을 빠져나가도록 하죠.”
“아, 씨. 좀 기다려…… 봐. 하아. 숨 좀 고르고. 넌 대체 왜 그렇게 잘 달리냐?”
“뛸 일이 거의 없는 마법사들이랑은 다르니까요.”
“웃기지 마. 나도 소싯적에 운동 좀 했다고.”
헤겔은 심장이 아픈지 미간을 찌푸린 채 가슴팍을 살살 문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곁에 앉아 있던 미렌의 몸이 바짝 다가왔다.
그의 가슴팍에 미렌의 머리가 기대어졌다.
놀란 헤겔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쉿.’ 하고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눈치를 살피자 아무래도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헤겔의 심장이 거세게 뛰다 못해 시끄러웠다.
심장이 이토록 거세게 뛰는 것은 모두 방금 전까지 벅찰 정도로 달려서 그런 것이다.
헤겔은 자꾸만 그렇게 되뇌었다.
“이제 지나간 것 같습니다.”
“어? 어.”
“그런데요, 헤겔 씨.”
미렌이 고개를 들며 한 걸음 물러섰다.
놀랍도록 가까웠던 숨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는 가슴팍에 달라붙어 있던 그녀가 떨어지자 왜인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는 듯 수풀 바깥인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도, 어쩐지…….
“……데요. 어쩌죠.”
“어? 뭐?”
“집중 안 하십니까? 도처에 사람이 깔려서 함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겠다고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미렌이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겔은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일어설 뿐이었다.
“일단 제가 아는 동굴로 가요.”
“동굴? 여기 그런 것도 있나?”
미렌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속을 제집 앞마당처럼 누볐다.
뒤따르는 헤겔이 자꾸만 멈칫거리자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손목을 잡아챘다.
도리어 화들짝 놀란 것은 헤겔이었다.
그는 손목이 붙잡히자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을 꾹 씹었다.
“놓치지 말고 따라오세요. 여기서부턴 길이 험하니까.”
헤겔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풀벌레 소리만이 들리는 산속에서, 헤겔은 멋대로 뛰어 대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건 모두 아까 전 뛴 탓이라고 위안하며.
결국 동굴에 도착하자 드디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미렌이 안쪽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하아……. 이올라오스 경이라도 만나면 좋았을 텐데. 산속이 어두워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어쩔 수 없지. 저쪽도 아무 생각 없이 이곳을 접선 장소로 정한 건 아닐 테니까.”
“아침까진 이곳에서 버텨야겠……. 잠깐만. 헤겔 씨, 공간 이동 마법은요?”
방금 전까지 상황이 급박해서 떠올리지 못했던 사실들이 생각났다.
헤겔의 마법이 있으면 얼마든지 여길 나갈 수 있잖은가? 아니, 일단 조금 전 상황에서도 충분히…….
“여기선 못 써.”
“어째서요!”
“국경이 코앞이야. 아르테미스가 피었던 강 하류에서나 사용할 수 있다고.”
“아, 그래서 폭포까지 걸어왔었죠.”
폭포를 두고 아래로 달리기 시작한 헤겔과 미렌은 어느새 국경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국경 부근은 모두 제한 마법이 엄격히 걸려 있어 마법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 강 하류까지만 내려가면 되겠네요. 이올라오스 경은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 모두 잡지는 못했을걸.”
“모두 잡다니요? 이올라오스 경은 혼자잖습니까.”
“그놈이 왜 제국의 기사인 줄은 알아?”
“……아.”
그 이유를 떠올린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올라오스가 유명한 이유는 단지 황제의 친우라서가 아니었다.
황제의 가장 단단한 검.
항간에서 이올라오스를 두고 부르는 호칭이었다. 검술로는 상대할 이가 없는 남자였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읏, 거기 건들지 마.”
“헤겔 씨, 다쳤어요?”
“어, 조금.”
놀란 미렌이 황급히 다가와 그의 허벅지로 고개를 숙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곧 희미하게나마 그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허벅지 바깥쪽 옷이 찢어진 채 다소 축축했다.
한낱 나뭇가지에 긁힌 자국이 아니었다.
급박하게 도망치던 와중 적에게 베인 모양이었다.
이러니 제 달리기도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졌던 거다.
“조금이 아니잖습니까!”
“됐다니까. 여기서 내려가면 이 정도는 힐링 마법으로도 나아.”
그럼에도 미렌은 만족스럽지 않은지 짧게 혀를 찼다.
결국 그녀는 헤겔에게 돌려줬던 겉옷을 벗겨 냈다.
그것으로 대충이나마 피를 닦고 더는 흐르지 않도록 묶자 대강의 처치는 할 수 있었다.
낮이었다면 밖에 나가 당장 사용할 만한 약초라도 찾았을 텐데, 어두워서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아주 당당하게 내 옷으로 처치하는구나.”
“헤겔 씨가 다쳤는데 그럼 제 옷으로 해요?”
“그으래. 잘 알겠다.”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태도에 헤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저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제가 미친 게 틀림없다.
상처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미렌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헤겔 씨.”
“왜?”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다쳐 계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땐 어쩌다가 다쳤던 건데요?”
헤겔의 상처를 보고 있자니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저기요,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요.’
분명 그때의 헤겔은 본인의 야트막한 힐링 마법으로는 처치가 불가능할 만큼 다쳐 있었다.
대마법사인 그가 그토록 다칠 만한 건 이 근처에 없을 텐데.
그런데 헤겔은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아, 그거. 국경을 넘을 뻔했어.”
“……예?”
“지정되지 않은 길로 국경을 넘다가 함정 마법에 된통 걸렸지.”
“뭔……. 국경을 넘어요? 미쳤습니까?”
“실수야, 실수. 길을 잃었다고.”
허가되지 않은 길로 국경을 넘는 건 엄연한 중범죄였다.
멋대로 국경을 넘다가 그곳에 걸린 마법에 당한 거라면 그 처참한 모습도 이해는 갔다.
헤겔의 이야기에 미렌의 머릿속으로 번뜩,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그럼 오늘 목격한 밀회에 나온 사람도 분명 허락받지 않은 길로 국경을 넘었다는 건데…….”
“신분을 속이고 다른 영지에서 넘어온 걸 수도 있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럼 굳이 프레니티 영지로 올 것 없이 데저트 영지로 갔을 겁니다. 프레니티 영지는 특수해서 합법적인 검문소가 없잖아요.”
“하지만 한낱 일반인이 국경을 넘어? 그게 가능한 일인가?”
국경에 걸린 마법은 일반적인 마법사가 풀 수 없는 고대 마법이었다.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라는 호칭이 붙은 헤겔마저도 그리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테룬 공국의 사람이 홀로 국경을 넘었다……?
그녀가 초조한 얼굴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모두 순조롭게 풀려 간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
“쉴 만큼 쉬었으니 움직이자. 근처에서 더 이상 마나도 감지되지 않아.”
미렌과 헤겔이 동굴 밖으로 나가자 싸늘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산속 지리에 익숙한 미렌이 앞장을 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뭇가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들은 지 한참은 되었을 때, 헤겔이 속닥이듯 말했다.
“앞에 사람이 있어.”
“……도망쳐야 합니까?”
“아니. 여기부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확인만 하고 가자.”
나직한 속삭임에 미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내리쬐는 달빛을 담은 강이었다.
“아, 이제 오셨습니까?”
“이올라오스 경!”
익숙한 얼굴에 미렌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정다감한 그의 얼굴 위에 핏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핏자국과 함께 미소를 짓는 모습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몇 놈이 도망가려고 들기에 그만.”
그는 담담하게 말하며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눈꺼풀에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강가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잠깐 잡아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마법사님과 우드 씨로 보이는 이들을 쫓는 것 같았고. 그래서 모두 붙잡았습니다.”
철컥.
이올라오스의 검은 핏물을 잔뜩 머금은 채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비싸 보이는 검집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두 분이 본 사람도 이 사람들이 맞나요?”
몰골이 처참한 이들을 둘러보던 미렌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평범한 복장을 한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지 않은 남자는 한 명인가요?”
“흐음. 한 명밖에 보지 못했습니다만…….”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간 이올라오스가 툭툭 뺨을 쳐 댔다.
사실 미렌이 보기엔 그것도 제법 아파 보였다.
“이봐요, 정신 차릴 수 있겠습니까?”
“헉, 허억!”
“다행히 대화는 통하겠군요. 목은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혹시 당신 말고 일행이 한 명 더 있었습니까?”
“없, 없었…….”
스윽.
검집에 들어갔던 그의 검이 어느새 빠져나와 남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올라오스는 여전히 웃었다.
“없었습니까?”
“흐으윽, 으흐…….”
“이올라오스 경, 그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어차피 황성으로 데려가야 하잖습니까.”
“아아. 그렇죠.”
어딘지 희열마저 느끼는 것 같은 이올라오스의 모습에 미렌이 서둘러 그를 말렸다.
다만 머릿속은 팽팽히 돌아갔다.
이올라오스에게 붙잡힌 사람은 프레니티 영지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잡히지 않은 쪽이 테룬 공국의 사람이라는 것인데.
“헤겔 씨, 혹시 이 산 전체의 마나 감지를 할 수 있습니까?”
“뭐…… 그 정도야.”
눈을 감은 헤겔은 샅샅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이올라오스가 잡아낸 이들 외에 느껴지는 마나는 없었다.
“없는 것 같은데. 사람의 것은 느껴지지 않아.”
그 한마디에 미렌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올라오스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산을 내려간 모양이군요.”
잠자코 듣고 있던 미렌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산을 내려간 게 아닐 겁니다.”
미렌과 헤겔이 도망치고, 이올라오스가 이들을 잡는 동안 무사히 산을 내려갔다? 어두운 이 산속에서 그렇게나 빠르게?
문득 미렌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헤겔과 그녀가 수풀 속에 숨어 있을 때,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간 누군가.
그 방향에 있는 것은 테룬 공국, 오로지 국경뿐이다.
미렌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국경을 넘어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