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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6)화 (36/133)

달빛 사냥

급한 보고가 일단락되자 대신들이 모두 물러갔다.

대회의장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미렌뿐이었다.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황좌는 메마른 그녀가 앉기엔 너무도 버거웠다.

그곳에 앉은 것만으로도 책임감에 어깨가 짓무를 것 같아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전하!”

몸이 좋지 않은 황후를 모시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던 마리아가 황급히 달려왔다.

가물거리는 눈에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어째서 마리아가 거꾸로 보이는 것인가.

달려온 마리아는 쓰러져 가는 미렌의 몸을 부둥켜안고 시녀들을 불렀다.

미렌은 이제 그 목소리마저 멀어져 감에 허탈하게 웃었다.

참으로 나약한 몸이 아닐 수 없다.

고작 몇 시간을 앉아 대신들과 힘겨루기를 했다고 쓰러져 버리다니.

“전하, 편히 쉬세요. 이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마리아.”

“네, 전하. 하명하시겠습니까?”

“소문을 내도록 해.”

“네? 그게 무슨,”

“황후가, 쿨럭. 완전히…… 건강해, 졌다고. 병석을 털어 냈다고.”

말하기조차 벅찬 미렌은 띄엄띄엄 의사를 전해야만 했다.

비로소 모든 명을 내린 미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곧바로 정신을 잃은 그녀를 내려다보던 마리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품에 안긴 황후의 얼굴은 몹시도 창백했다.

그런 미렌의 낯빛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

미렌 우드로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해가 완전히 졌을 때였다.

어쩐지 자꾸만 잠이 온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갇힌 영주 성의 지하 감옥이 소란스러웠다.

나무 창살에 바짝 붙어 바깥을 살펴보자 자욱하게 깔려 있던 수면 가루들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기사들이 그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누군가 도와주지 않곤 빠져나갈 수가 없어.”

“하지만 딱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기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이올라오스의 감옥이었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미렌은 직감적으로 정신을 차린 헤겔이 그녀를 탈출시켰음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뒤에 있던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이미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제발, 제 생각대로 되었다면 좋을 텐데.

“영주님께서 부르신다. 모두 움직여!”

“예!”

어느 순간 기사들은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한낱 평민에 불과한 미렌 우드에게 신경 쓸 틈이 없는 모양이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벌레 한 마리가 구석진 곳으로 도망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것을 보자 미렌은 픽 웃음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 황좌에 앉아 있던 이가 감옥에 갇힌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어 줄까.

그러나 미렌은 제 목숨을 다해서라도 움직여야만 했다.

그녀로선 처음 보는, 라이언의 죽어 가는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여기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슬슬 자신도 나갈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야.”

“……?”

고요한 지하 감옥에서 누군가의 나직한 부름이 들렸다.

미렌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그곳을 확인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은 불량스러운 자세.

놀랍게도 감옥 앞에 서 있는 이는 헤겔이었다.

“헤겔 씨?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왜 있긴. 네가 여기 갇혀 있잖아.”

“그게 아니라! 이올라오스 경을 도와 바깥으로 나가신 것 아닙니까?”

“그래. 네가 부탁했었잖아.”

“그런데 왜 여기 있으시냐는 겁니다.”

헤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루퉁한 얼굴로 잠자코 감옥 문을 잠근 자물쇠를 풀어낼 뿐이었다.

톱으로도 자르기 힘들어 보였던 자물쇠는 헤겔의 마법 한 번에 툭 풀렸다.

“헤겔 씨, 이올라오스 경은 무사히 나가신 겁니까? 늦었다간.”

“잘 갔어. 특별히 내가 직접 그 야산까지 모셔다 줬다고.”

“그런데 왜 끝까지 안 도와주시고 여기로 오신 겁니까?”

“아, 말했잖아. 네가 여기 갇혀 있는데 뭘 가! 그 커다란 기사 놈이 어련히 알아서 못 할까.”

헤겔의 말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꼭 자신이 걱정되어서 온 것만 같은…….

미렌이 징그럽다는 눈으로 헤겔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요?”

“뭐가.”

“왜 갑자기 친절하시냐고요. 저한테 안 그러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매번 툴툴거리고, 얼굴이나 찌푸리고, 사람 놀리기 바쁘고.”

“나가기나 해. 온몸이 얼음장인 주제에.”

헤겔이 열어 준 문으로 나가자 그가 툭, 무언가를 던졌다.

확인해 보니 헤겔이 입고 있던 겉옷이었다.

“가자.”

물끄러미 그것을 보고 있는 미렌에게 헤겔은 연이어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공간 이동 마법을 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미렌은 헤겔의 겉옷을 두르는 대신 그에게 그 옷의 소매를 건넸다.

헤겔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가 손을 잡는 건 이상하잖습니까.”

헤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잠자코 그녀와 제 겉옷을 말아 쥔 채 마법을 행할 뿐이었다.

“미렌.”

“……?”

공간이 일그러지기 직전, 헤겔이 미렌을 불렀다.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눈 가려 주는 건.”

그것도 안 돼?

헤겔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이동하는 건 순식간에 끝났다.

다만 그녀가 헤겔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을 뿐.

산속에 도착한 미렌이 헤겔에게 다시 그의 겉옷을 돌려주며 물었다.

“뭐라고요?”

“됐어.”

헤겔은 아무렇지 않게 겉옷을 빼앗듯 돌려받고서 등을 돌렸다.

미렌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따라갔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어쩐지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 같아서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행동을 돌아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린 채 입을 다물었다.

헤겔이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이제 알겠네.”

“예? 뭐가요?”

“그날, 우리가 아르테미스를 꺾기 위해 이곳에 왔던 날.”

그때는 미렌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이올라오스에게 이곳을 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기억 덕분이었다.

숨겨진 아르테미스조차도 보일 정도로 밝은 산속은 누군가 은밀히 만나기에 적절했다.

“그날, 사실 우리 말고도 다른 이가 있었어.”

“그런데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그땐 그냥 지나가는 행인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상하더라고. 그렇게 어두운 밤에 왜 사람이 산속을 돌아다녔겠어.”

헤겔로서는 알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품은 아르테미스를 찾기 위해 마나 감지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 말고도 마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강가가 아니었어.”

“예?”

“그날, 강가엔 우리가 있었잖아.”

그의 말이 옳다.

은밀히 만나는 게 목적인 이들이 다른 사람이 있는 걸 확인했다면 거기서 만날 수는 없었을 터다.

그 순간 불안한 예감이 지나쳐 갔다.

이올라오스에겐 분명 강가를 알려 줬다. 그곳이 보름달을 가장 잘 비추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장소를 옮겼다면……?

“헤겔 씨, 어디였습니까? 그때 마나가 느껴졌던 곳이요!”

“강 속.”

긴장감이 탁 풀렸다.

그날, 강 속에 있는 마나라면 아르테미스밖에 없잖은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강의 상류.”

“하지만 강 상류라면 폭포가…….”

폭포.

그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나무가 달빛을 가리지 못하는 곳은 아르테미스가 있는 곳 말고도 또 있었다.

미렌은 헤겔을 제치고 빠르게 걸어갔다.

도움을 준 헤겔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그 뒤를 따를 뿐이다.

“천천히 가. 아직 안 늦었어.”

“그걸 헤겔 씨가 어떻게 압니까? 보름달이 뜬 지 벌써 한 시간도 더 지났는데……!”

탁.

미렌은 헤겔을 돌아보며 말하다 제 앞에 있는 어둠에 가려진 나무뿌리를 보지 못하고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팔을 잡은 건 헤겔이었다.

“넘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안 넘어집니다. 넘어져도 크게 안 다치고요.”

“못 잡게 할 거면 알아서 잘 하든가.”

“그게 무슨,”

미렌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들이 아닌 타인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며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그럴수록 폭포의 거센 물소리 또한 가까워졌다.

“……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황성에서 의심하기 시작했다니.”

“영주님께 압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국의 기사가 이곳을 뒤지고 있답니다.”

폭포 앞에 서 있는 두 명은 미렌이 서 있는 곳에서 애매하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얼굴을 보기 위해 나무 바깥으로 조금씩 눈을 들이밀었다.

“되었어. 수도에나 살았던 놈이 이 촌구석 산길을 어찌 알겠나? 달빛이 이정표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하겠지.”

“하지만 두고 볼 순 없습니다. 역시 앞으로는 이렇게 직접 만나기보단 전령을 보내는 게…….”

“전령이 중간에 가로채졌다간 어떻게 책임질 셈인가! 우리 공국은 지리적으로 이 프레니티 영지가 아니면 제국에 들어갈 수 없어. 만약 타국을 이용해 전령을 보냈다간 달에 한 번이나 겨우 주고받을 테지.”

“…….”

“한시가 급한 상황에 그럴 순 없네.”

그들로부터 누구의 것인지 모를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프레니티 영지를 둘러싼 커다란 산들이 제국과 테룬 공국을 가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결국 두 남자 중 한 명이 되었다는 듯 서둘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무기들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물론이지. 차질 없이 준비가 되고 있네.”

“서쪽 마탑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흔쾌히 동의하더군. 다만, 일이 잘못되었다간…….”

미렌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하나였다.

테룬 공국이 프레니티 영지를 이용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슬슬 자리를 뜰 준비를 시작했다.

눈치챈 미렌이 함께 듣고 있던 헤겔의 옷소매를 당기며 눈짓했다.

“헤겔, 아무래도 이올라오스 경이 이곳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잡아 둬야…….”

직접 잡아 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모양새가 이상해졌다.

그녀가 굳이 이올라오스를 도와줄 이유는 하등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이올라오스가 저들을 잡을 수 있도록 시간만 끌어 주면 되었다.

“헤겔, 듣고 있…….”

……!

나직이 이야기하던 미렌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어둠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복장의 사내들이 미렌과 헤겔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헤겔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번만 잡자.”

“무엇을요?”

헤겔은 대답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대신 덜컥, 그녀의 손을 강제로 잡아채었을 뿐이다.

“놓지 마.”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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