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5)화 (35/133)

태양이 뜨기 전에

라이언은 멀거니 미렌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미렌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핏발 선 눈이 끔뻑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감긴 두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다만 잠든 채 붙잡은 미렌의 손만큼은 어린아이처럼 힘을 풀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되자 미렌도 더는 라이언을 깨울 수 없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이제껏 내내 잠들어 있던 이의 얼굴이라기엔 너무도 핼쑥했기 때문이다.

“라이언.”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부른 미렌이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아래까지 밀려 내려간 이불을 쥐었다.

그가 춥지 않도록 덮어 준 다음에야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주무세요.”

나는 이제껏 당신에게 쉴 틈조차 주지 않았으니.

미렌의 기다란 속눈썹이 얼굴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은 미렌도 마찬가지였으나, 더는 그 얼굴이 나약해 보이지 않았다.

미렌 에드가는 더 이상 나약해서는 안 되었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묵직한 소음과 함께 황제의 침실 문이 닫혔다.

바깥으로 나온 미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를 비롯해 시녀들을 둘러보았다.

시립해 있던 시녀들의 자세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들에겐 낯선 일이었다.

그들이 알던 미렌 에드가는 이토록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병약하고, 고요하며, 때때로 귀신 같기도 한 상전.

그들이 알던 황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렌은 그들을 앞에 세워 둔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마리아, 이 외에도 나를 보필하는 시녀들이 또 있나?”

“없습니다, 전하.”

“그래. 그렇겠지.”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언제나 미렌 에드가는 잠들어 있었기에 할 일이라곤 돌아가며 청소를 하고 약을 챙기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미렌이 엄중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폐하께선 현재 국정을 보실 수 없으시지.”

“…….”

“하여, 나는 폐하를 대신하여 국정을 돌볼 생각이다.”

그 한마디에 고개 숙인 채 있던 시녀들의 두 눈이 커졌다.

그들 중 한 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매서운 얼굴의 마리아를 보고서 다시 숙이기도 했다.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겠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귀신처럼, 쥐 죽은 듯이 지내던 삶을 이제는 그만두겠다고.

더는 폐하의 품속에서 죽어 가지만은 않겠다는 의지였다.

너른 복도를 채운 시녀들 사이로 숨 막히는 침묵이 오갔다.

미렌은 그저 그들을 하나씩 천천히 살펴볼 뿐이었다.

“모두 이해하였는가.”

“예, 전하.”

“예, 전하. 무엇이든 기필코 해내겠습니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복도를 울렸다.

기실, 그것은 그들에게도 어쩌면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저 죽어 가는 황후의 보필 시녀가 아닌 권력을 쥔 자의 아래가 될 수 있는 기회.

미렌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 대회의장으로 가지.”

“전하,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재 황성에는 베르디움 공작가와 트리온 백작가께서 와 계십니다. 그 외에도 대신들이…….”

“알고 있네. 그들이 멋대로 국정을 논하고 있다는 것쯤은. 거창하게 폐하를 대신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지.”

알고 있다.

나약한 몸을 가진 데다 단 한 번도 귀족들의 앞에 제대로 나서 본 적 없는 그녀가 갑작스레 움직인다고 해서 뭔가를 바꿀 순 없다는 것을.

“하나.”

“…….”

“폐하께서 쉬실 시간은 벌어야지 않은가.”

모자란 황후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쉬지 않고 달려오셨으니.

황제의 침실에서 대회의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미렌은 그곳에 들어서기 앞서 마리아로부터 자신의 몸단장을 정리했다.

시녀들 또한 평소와 달리 황후를 보호하듯 굳건한 자세로 뒤를 지켰다.

마리아가 고개를 숙인 채 회의장의 문을 열었다.

“테룬 공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소. 언제까지 이리 국정을 내팽개쳐야 합니까?”

“하아. 선황께서 살아만 계셨더라도…….”

“그러니 말하지 않소. 폐하와 전하께서 모두 쓰러지신 지금, 우리 베르디움 공작가가…….”

베르디움 공작의 말은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

대회의장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이목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곳엔 새하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채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여인이 있었다.

얼굴을 가린 베일이 희미하게 그녀의 실루엣만을 보여 줬다.

공작 부인인가?

혹은, 백작 부인?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현재 대회의장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여인은 제국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마리아의 커다란 외침이 대회의장을 울렸다.

“황후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사사로이 국정을 논하던 귀족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황후는 단 한 번도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머리를 틀어 올린 자태와 걸음걸이는 그들이 봤던 그 어떤 이보다도 고귀했다.

그녀의 뿌리는 누구보다 굳건한 권력을 움켜쥐었던 에드가 공작가였으니까.

남자들만이 가득한 대회의장에 이질적인 이가 들어오자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렌이 그런 좌중을 느릿하게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와 전하께서 쓰러지신 지금, 우리 베르디움 공작가가.”

“……예?”

“그다음 이야긴 무엇이지?”

미렌의 두 눈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베르디움 공작의 얼굴을 향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음에도 그 고고한 고개가 공작을 향하고 있음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베르디움 공작은 당황스러운 사태에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두어 번 열었다 닫을 뿐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실언을 하였습니다.”

“그렇군.”

또각. 또각.

모두가 입을 다물자 미렌이 걸어가는 구두 소리만이 대회의장을 울렸다.

그녀는 귀족들을 지나쳐 가장 상석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라이언, 황제가 앉았을 황좌였다.

“공들도 알듯 폐하께선 현재 위중하시지. 하여, 나는 폐하를 대신해 이곳에 왔네.”

한 단 아래에 있던 귀족들이 술렁였다.

그들로선 이제껏 얼굴조차 보지 못해 폐위의 이야기까지 나오던 황후가 황좌를 차지했다는 게 이해 가지 않을 법도 했다.

그들 중 입을 연 것은 백작 중 한 명이었다.

“하오나 전하, 전하께선 국정에 대해 이제껏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셨잖습니까. 국정을 허투루 보셔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황후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부디 건강을 생각하시어…….”

“내 아버지는 에드가 공작이셨지.”

고요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미렌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분의 유일한 여식이었네. 그런 내가 무엇을 배웠을 것 같은가? 살롱을 여는 법? 아니면, 사교계를 이끄는 법?”

미렌의 입가에 비소가 지어졌다.

대신들은 모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 에드가 공작의 명성은 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에드가 공작은 현 귀족파의 전 수장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횡액을 맞기 전까진.

그런 에드가 공작은 평생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영지를 다스리는 데 바쳤고, 또한 각 가문의 수장들이 모인 귀족파를 이끌었다.

그 에드가 공작의 여식인 미렌 에드가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이다.

감히 내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실언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공들은 실언을 자주 하는군.”

베일 뒤에 가려진 얼굴로부터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언뜻 보기엔 자애로우나 사실은 비소에 더욱 가까운 미소였다.

“그럼, 회의를 재개하지.”

그 뒤로 그동안 밀렸던 각종 보고가 올라왔다.

귀족들은 꼭 그녀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하나씩 의견을 구했고, 미렌은 그때마다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물론 그녀로서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깨어나 움직여 본 적이 드물었던 몸은 고통을 호소했다.

더군다나 시험하듯 다가오는 보고는 모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려웠다.

그러나 참아 내야만 했다.

또한 해내야만 했다.

이제껏 자신이 구석에 미뤄 둔 채 모른 척 눈감았던 일들이었다.

“……하여, 마지막 보고는 테룬 공국의 동태에 대한 것입니다.”

“말하라.”

“현재 테룬 공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대량으로 무기를 사 가는 이들이 늘었으며, 또한 제국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접촉을 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접촉의 대상은 알아내었는가?”

“……그것은 아직…….”

곤란한 얼굴로 대답을 얼버무린 남작을 바라보던 미렌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애가 탄 남작이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곳은 있습니다. 테룬 공국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이자 본래 공국의 것이었던 프레니티가 의심스럽습니다.”

“남작, 그에 대한 증거는 있는지요.”

“아니요, 없습니다…….”

베르디움 공작의 날카로운 질문이 들이닥쳤다.

남작이 기죽은 얼굴로 입을 다물자 공작의 맞은편에 있던 트리온 백작이 대신 입을 열었다.

“증거는 없으나 남작의 말 또한 일리가 있네. 그곳은 본래 테룬 공국의 것이었으니 그들이 움직이기에 수월하지 않소.”

트리온 백작, 그는 이올라오스의 아버지기도 했다.

반 귀족파의 대표인 그가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베르디움 공작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막았다.

“확실한 증거를 찾기 전까지 의심은 섣부르오.”

“맞습니다. 그리고 한낱 시골 영지인 것을요. 크기만 크다뿐이지.”

그들 사이로 기묘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귀족파와 황제파의 팽팽한 의견 다툼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라이언이 쓰러진 뒤로 이때다 싶은 귀족파들이 나서기 시작했을 뿐.

미렌이 홀로 중얼거렸다.

“증거라.”

“예, 전하. 비록 테룬 공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나, 그렇다고 섣부른 의심을 하기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베르디움 공작은 황후가 제 손을 잡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 에드가 공작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미렌은 공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트리온 백작을 주시했다.

“트리온 백작.”

“예, 전하.”

“폐하께서 쓰러지기 전 자네의 아들에게 명을 내리셨지. 프레니티 영지를 시찰하라고.”

당황한 베르디움 공작이 사실이냐는 듯 트리온 백작을 바라봤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증거는 자네의 아들에게 있겠군.”

“전하, 어찌 그렇게 확언하십니까?”

미렌이 의도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귀족파에게 조그만 불안의 씨앗을 심는 것.

“그렇다면 베르디움 공작에게 묻지. 자네는 어찌하여 그토록 프레니티 영지를 신뢰하는가?”

“그건, 그것이…….”

공작의 대답이 늦어졌다.

그럴수록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있었다.

그녀는 황좌의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씨앗은 심었다. 이제 그 꽃을 피우는 것은—.

바로 제 손으로 해낼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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