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그림자
미렌은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에 미간을 모았다.
몹시도 무거운 몸이었다.
미렌 우드에겐 낯설지만, 또 다른 미렌에게는 익숙한.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미렌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천장의 음각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돌아왔구나.
번뜩이는 깨달음에도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미렌은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든 몸을 처음부터 과격하게 움직였다간 그 반동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애쓰고 있을 때였다.
“……전하?”
“므……. 마.”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전하!”
허옇게 부르튼 입술은 죽은 자의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래도 미렌은 그것을 움직여야만 했다.
“마리, 아…….”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 어서 의원을 불러오거라!”
마리아의 외침 뒤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정신을 잃은 지 일주일 만에 깨어난 황후 덕분이었다.
미렌은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었다.
그녀가 한참 시간을 들여 몸을 일으키는 동안 의원과 시종들이 너른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곳엔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하, 몸을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쉽지 않군.”
“일주일 동안 누워만 계셨기에 근육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마음을 다급히 먹지 마시고 천천히 거동하소서. 드실 약은 이것입니다.”
“진통제가 섞인 것인가?”
“예, 약초는 모두 늘 드시던 것입니다.”
“이것보다 강한 진통제로 가져오도록 하게.”
“고통이 심하십니까? 진통제는 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만, 후유증이 남을 수 있습니다.”
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의원이 내미는 약을 묵묵히 마실 뿐이었다.
의원이 물러간 뒤 마리아가 가져온 ‘아르테미스’를 달인 물도 순순히 마셨다.
무언가를 넘기는 것조차 힘든 목 안으로 힘겹게 마시는 사이 마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의원께서 이번 일은 정신적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아르테미스를 드신 뒤부터 분명 나아지고 있다고……. 전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리아가 저도 모르게 힐끗 눈을 들었다.
침대 위 죽은 듯이 앉아 있던 그녀로부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잘못 듣지 않았다.
정말로 미렌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놀란 마리아가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말렸다.
“전하, 의원이 고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몸을 함부로 움직이셔선 안 됩니다!”
“비키게, 마리아.”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제게 말씀해 주세요. 직접 움직이실 필요는 하등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렌은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서다 두어 번 힘이 풀려 다시 쓰러져도 결국에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조용하셨던 전하가 지금 당장 저리 급하게 움직여야만 할 일이라면…….
마침내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선 미렌의 앞을 감히 막아섰다.
“폐하를, 폐하를 뵈러 가시려고요? 전하, 외람되지만 폐하께선 지금…….”
“비키라고 했어, 마리아. 부축하지 않을 셈이라면 다른 시녀를 부르지.”
“폐하께선 지금 전하를 뵐 수 없는 상태입니다!”
미렌이 차갑게 식은 낯으로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모조리 삼킨 마리아가 느릿하게 침을 삼켰다.
황후는 이 소식에 놀라지 않았다.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알고 있어.”
***
“황후 전하께서 폐하를 뵈러 오셨다. 문을 열거라.”
“예? 하지만 지금은 문을…….”
황제의 처소 앞을 막아선 기사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게 다름 아닌 황제였기 때문이다.
기사가 머뭇거리면서도 문을 열 기색이 보이지 않자 마리아가 눈을 찌푸렸다.
“무엄하구나. 고작 기사 따위가 전하의 앞을 막을 셈인가?”
“그것, 그것이 아니오라.”
“되었네, 마리아. 내 직접 말하지.”
무척이나 병약한 목소리였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간 곧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러나 그 목소리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기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문 채 긴장했다.
마리아의 어깨를 잡고 나선 것은 새하얀 베일로 가냘픈 몸이 모두 가려진 여인이었다.
기사는 감히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제 발끝만 바라봐야 했다.
“고프리도 바리온 경.”
“예, 예?”
제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고프리도는 자신이 실수한 게 있었나 싶어 제 과거를 뒤적였다.
“낮마다 폐하의 침실을 지키는 이였지.”
“마……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라이언이 방문하지 않을 때에는 그저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바깥 시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일상이었다.
미렌은 어렵지 않게 그 기억을 떠올렸다.
“폐하의 명을 지키는 경의 자세는 내 높이 사지.”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고작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 새하얀 베일 아래서 속삭이듯 말했다.
“황후의 앞을 막는 것은, 황궁을 지키는 기사의 소임이 맞는가?”
고프리도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곧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말은 하등 틀린 것이 없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임무라 하더라도.
고프리도는 곧 제 목이 교수대에 걸리는 상상을 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앞에 선 이의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어쩐지 죽음의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어 자꾸만 그런 상상이 들이닥쳤다.
“바리온 경, 자네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네. 다만.”
“…….”
“폐하께선 분명히 그런 명도 내리셨지. 황후가 오는 즉시 언제든 당신께 알리라고.”
“맞습, 니다. 그러나 폐하께선 지금 도무지 그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신지라…….”
“그러니 내 말하고 있잖은가.”
미렌은 온화하게 웃었다.
애매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프리도에게도 살랑이는 베일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그 미소만은 보였다.
“폐하께 이 소식을 황후가 직접 전하러 가겠노라고.”
고프리도는 멍하니 서 있었다.
다만 황후가 그런 고프리도를 옆에 세운 채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뒤따르던 마리아가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였다.
화들짝 놀란 고프리도가 마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리온 경, 정신 차려요.”
사실 고프리도와 마리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
황제의 근위 기사와 황후의 시녀장.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었던 고프리도가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서 이미 닫힌 제 뒤의 화려한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분이, 그분이신가?”
“그래요. 황후 전하십니다.”
“황실의 귀신…….”
귀신에 홀린 듯 바라보던 고프리도가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정말로 홀린 기분이었다.
고작 몇 분 전에 나눈 대화였을 뿐인데, 그 기억이 이토록 혼몽한 것을 보면.
***
금색으로 치장된 방 안에 들어간 미렌이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이곳에서부터는 마리아조차 함께 올 수 없어 홀로 서야만 했다.
아직 거동이 쉽지 않은 미렌은 넘어지지 않도록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숨을 몰아쉬었다.
힘이 부치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황제의 침실에 들어온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올 수 있었지만 괜한 소문을 내기 싫었던 그녀가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미렌의 모든 걸음은 시종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그것은 곧 귀족들에게까지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그녀는 제가 먼저 온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먼저 황제의 침실까지 걸어 들어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시녀들이 보았다면 무척이나 놀랄 일이었다.
미렌 에드가는 이제껏 자신이 먼저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 않았으므로.
황실의 귀신. 사실 그것은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폐하.”
속삭이듯 라이언을 불렀지만 커튼에 가려진 침대 위 인영에게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미렌은 결국 침대로 가까이 가야만 했다.
그러느라 그녀의 발치엔 널브러진 물건들이 자꾸만 걸렸다.
엉망이 되어 버린 방은 시종조차 출입을 금한 듯했다.
미렌이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서 침대로 다가갔다.
사르륵.
침대를 가린 커튼을 걷자 상의를 입지 않은 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은 그를 보고서야 미렌은 알았다.
그녀는 잠든 그를 깨워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언제나 깨우는 것은 라이언의 몫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쓰러진 그의 가슴팍에 가져가는 제 손이 자꾸만 벌벌 떨리는 것은.
“폐하, 일어날 시간입니다.”
“…….”
미렌은 이곳에 오기 위해 마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쓰러진 그녀를 품에 안고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던 라이언, 쓰러진 미렌을 두고 결국 미쳐 버린 자신을 이곳에 가둬 버린 라이언.
‘폐하께서 기사들에게 직접 명하셨습니다. 폐하를…… 그 자신을 전하와 멀리 떨어뜨리라고요.’
‘전하의 숨이 끊어질 듯 가늘어지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았다간.’
‘모두 끝내 버리고 싶을 것 같다고…….’
라이언은 국정을 모두 뒤로 미룬 채 그녀의 방 안에만 있었다.
신하들이 그런 황제를 두고 어떤 말을 하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찬란하게 빛나던 그녀의 태양은 이미 검게 물든 지 오래였다.
자신이 귀신이 되어서라도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그의 명예는 이미 끄트머리서부터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그래서 미렌은 결심했다.
자신이 그 태양을 들어 보이겠노라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의 그림자가 되지 않겠노라고.
라이언의 침대에선 독한 약의 잔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강제로 수면에 빠지게 하는 향이었다.
온기를 잃은 손이 라이언의 가슴 위에 얹어졌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라이언.”
“…….”
놀랍게도 이제껏 꿈쩍도 하지 않았던 그의 눈이 뜨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미렌은 덜컥이는 심장을 숨기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닌 듯, 라이언은 그저 미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미렌은 가슴팍에 얹어져 있던 손을 느릿하게 올려 그의 볼을 감쌌다.
차갑게 식은 손은 그에게 어떤 온기도 전해 줄 수 없었다.
오히려 라이언의 뜨거운 온기를 뺏어 오기만 했다.
“이만 일어나셔야죠.”
“……이 가…….”
“……라이언?”
라이언의 부릅뜬 눈은 붉게 핏줄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랬다간 제 앞의 미렌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같이, 가…….”
그 실낱같은 목소리에 미렌이 입을 다물었다.
안다. 알고 있다.
수면제로 인해 혼몽한 그가 꿈과 착각하여 미렌을 보고 있다는 것을.
미렌은 무언가 뜨겁게 쏟아지려는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눈에서 무언가를 쏟아 내는 대신 입이 열렸다.
뜨거운 열기를 감싼 한마디였다.
“같이 갈 겁니다.”
“두고, 가지 마…….”
“이제는 혼자 걷게 두지 않겠습니다.”
이 미렌 에드가가.
당신의 옆에서 함께 걷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