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꿈속으로
헤겔의 한마디에 심장이 떨어졌다.
넌, 지금, 미렌 에드가가, 아니야.
그의 말이 옳다.
머지않아 죽을 몸이라며 그토록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나.
모두가 움직이는 낮에는 미렌 우드로 살며 매번 미렌 에드가의 목숨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건강하지 않아서, 사랑받지 못해서, 아무도 날 찾지 않아서.
그런데 그건 정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헤겔 씨.”
“왜?”
“이만 갑시다.”
“어?”
헤겔이 머뭇거리는 사이 미렌은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잡화점을 나섰다.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이올라오스를 도와 영주의 죄를 밝혀내야만 했다.
“어딜 가는데?”
“탈출시켜요.”
“……뭐?”
“이올라오스 경 말입니다. 헤겔 씨의 힘이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몸 쓰는 건 내가 할게요.”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심이야, 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가던 미렌이 고개를 힐끗 돌렸다.
헤겔은 조그만 손 하나를 이기지 못해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미렌 우드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죠. 미렌 에드가를 위해서라도.”
***
“정말 가?”
“그럼 가짜로 갑니까.”
“아…… 미치겠네. 만약에 실패하면 난 혼자 도망친다?”
“위대한 남쪽 마법사라면서요.”
“그건 맞는데, 그때 이후로 영주 놈이 경비를 강화했을 것 아니야. 특히 마법 쪽으로.”
헤겔은 이 방법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황제의 눈과 귀가 될 수 있는 이올라오스가 영주의 죄를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만 프레니티 영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 알겠다고. 내가 너까진 책임진다.”
헤겔은 툴툴거리면서도 미렌과 자신에게 은신 마법을 씌웠다.
마법이 발동되자마자 미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옆으로 기사 몇 명이 스쳐 지나가도 멈칫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올라오스가 갇힐 곳이라곤 이곳에서 지하 감옥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교대하길 기다린 미렌은 그들을 따라 지하로 들어갔다.
“헤겔 씨.”
좁은 복도 탓에 헤겔과 미렌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다.
그러다 미렌이 제 콧등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냄새나지 않아요?”
“냄새?”
미렌의 코가 움찔거렸다. 그와 동시에 헤겔은 옷소매로 제 입가를 가린 채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까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분명 맡아 본 것 같은데. 안 그래요?”
“그것보다, 여기 좀 이상해. 보초가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부를 살펴보던 헤겔은 결국 미렌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다지 밝지 않은 조명 탓에 둘은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안을 하나씩 살피며 걸어가야만 했다.
“……찾았다.”
헤겔이 멈춰 선 곳은 지하 감옥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었다.
옆에 선 미렌이 그곳으로 고개를 내밀자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는 이올라오스가 보였다.
“이올라오스 경!”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그를 불렀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이올라오스는 그들의 부름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든 건가?”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피곤해서 잠들었다기보단…….”
비틀.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잃은 헤겔이 벽을 짚었다.
놀란 미렌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 줄 정도였다.
“헤겔?”
“야, 미렌…….”
“헤겔? 왜 이럽니까? 정신 차려요!”
“나, 너무 졸려…….”
끔뻑, 끔뻑…….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던 헤겔의 눈꺼풀은 어느 순간 다시 떠지지 않았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헤겔은 미렌의 품으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미렌의 좁은 어깨에 헤겔의 고개가 파묻혔다.
그의 무게를 받아 내느라 꼼짝도 못 하게 된 미렌은 천천히 향기를 다시 맡기 시작했다.
분명, 그녀는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향이었다.
“수면초. 수면초구나.”
급하게 잠이 들어야 할 때가 잦았던 그녀에게도 익숙한 약초였다.
영주 성 바로 옆에 있는 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약초니까.
그녀 혼자만 잠들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미렌은 수면초에 대해 미약하나마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오지에서 나는 약초인 덕분에 수도에서 살았을 이올라오스와 헤겔에겐 익숙하지 않았을 터다.
뒤늦게 헤겔의 몸을 흔들며 그를 깨워 보던 미렌은 결국 포기했다.
수면초에 빠진 이들은 대부분 서너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다.
미렌의 고개가 이올라오스와 헤겔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봤다.
둘 다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니, 그녀의 힘으로는 한 명조차도 벅차다.
“헤겔 씨, 잠시만 여기 있어요.”
미렌은 받치고 있던 헤겔의 몸을 복도 끝 벽에 조심스럽게 기대었다.
그러고선 이올라오스의 감옥 문으로 다가가 자물쇠를 만지기 시작했다.
헤겔은 정신만 차린다면 충분히 홀로 이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장 필요한 이올라오스를 먼저…….
“소리가 났다니까.”
“대체 무슨 소리? 쥐라도 있나 보지.”
흠칫, 고개가 저 복도 너머를 향해 돌아갔다.
그곳에선 미렌과 헤겔이 들어온 문이 당장이라도 열릴 듯 달칵이고 있었다.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오려는 것이다.
미렌이 다급하게 자물쇠를 놓고 헤겔의 옆으로 움직였다.
헤겔이 정신을 잃어도 은신 마법이 풀리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봐.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네.”
“다 약에 취해서 잠들어 있을 텐데 소리는 무슨.”
안쪽을 확인한 기사 두 명은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수면초는 대략 몇 분간은 냄새를 맡아야만 잠에 빠지는 약초라 이곳을 샅샅이 살필 수는 없을 터였다.
결국 기사 둘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들의 모습에 미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때였다.
“근데 가장 안쪽 감옥의 자물쇠가…… 원래 저렇게 기울어져 있었나?”
철컥.
기사의 허리에서 뽑아낸 검이 복도 안쪽을 날카롭게 가리켰다.
미렌은 숨을 들이켠 채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무리 의심하더라도 그들에겐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코와 입을 막은 기사들이 빠르게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최대한 벽으로 붙어 혹시라도 부딪치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다.
“약을 대체 얼마나 뿌린 거야?”
“아무리 제국의 기사를 잡아 놨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거의 몬스터를 잡는 수준인데.”
“됐다. 그냥 바람결에 흔들렸나 보네. 이만 가자고.”
“그래.”
이올라오스의 감옥 앞에서 그를 확인한 기사 중 한 명이 등을 돌렸다.
감옥의 복도가 좁아 기사들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미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웅크리기 바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근데.”
“아, 또 왜?”
나가려던 기사의 걸음이 또다시 멈추었다.
“이렇게 짙은 수면초 사이에서.”
“응?”
남자의 몸이 서서히 돌아갔다.
“다른 냄새가 섞여 있잖아…….”
푸욱!
어느새 뽑힌 기사의 검이 미렌의 머리 위 나무 창살에 꽂혀 들어갔다.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은 은신 마법이 풀렸다.
기사는 히죽 웃으며 그 머리카락을 주워 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미렌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분홍색 머리를 어떻게 잊어.”
그녀가 처음으로 영주 성으로 끌려왔던 날.
기사는 미렌의 머리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 남자였다.
“사, 사람! 여기 사람이 있다!”
“됐어, 조그만 계집애 하나야. 다른 놈들 부를 필요도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미렌은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선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은신 마법은 겉 표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옷을 벗는 순간 풀리게 되어 있었다.
미렌은 아직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헤겔을 위해서라도 마법을 풀기로 결정했다.
“데리고 나가.”
둘 중 한 명에 의해 거칠게 결박된 미렌은 밖으로 끌려 나갔다.
끌려가기 직전 뒤를 돌아봤지만 헤겔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수면초로 거동이 불편해 보였던 기사들은 미렌을 거칠게 대했다.
쿵, 벽에 등이 부딪친 미렌은 예전처럼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냐?”
“…….”
“누가 네게 은신 마법을 걸어 주었지?”
붙잡은 기사가 추궁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문을 받더라도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영주님이 지금 어디 계시지? 처리를 여쭤 봐야겠어.”
“영주님은 아직 출타 중이실걸. 당장 오늘 밤이…….”
“아, 그랬지.”
망설이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예전에도 미렌을 붙잡은 기사였다.
그는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다 결론지었다.
“일단 감옥에 가둬. 영주님이 돌아오시면 보고를 올리자고.”
“그게 낫겠어. 근데 이 녀석 수면초가 듣지 않는 모양인데?”
“수면초가 처음이 아닌가 보지. 잠깐만, 그럴 때는.”
남자는 벽에 있는 선반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미렌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수면초.
푸른색 잎사귀가 나풀거리는 수면초는 아직 가루로 만들지 않았는지 원형 그대로였다.
“삼키게 해.”
남자는 닥치는 대로 미렌의 입 안에 약초를 밀어 넣었다.
결박당한 채 반항하던 그녀는 이윽고 그것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아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수면초를 삼킨 뒤부터 눈두덩이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잠에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미렌 에드가가 되지 못한 뒤부터 앓아 온 불면이 수면초로 인해 풀려난 것이다.
미렌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이대로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올라오스를 구해야 하는데.
영주의 죄를 밝혀야…….
헤겔은…….
…….
….
“잠들었나?”
“그런 것 같아. 슬슬 감옥으로 넣어 둬.”
가볍게 미렌을 들어 올린 기사들은 그녀를 빈 감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데구루루.
흙바닥에 버려진 미렌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굴러야 했다.
기사들은 한동안 잠자코 그녀를 살폈다.
미렌이 확실하게 잠들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완전히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기사들은 그곳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를 알아봤던 기사 한 명이 힐끗 돌아보긴 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지하 감옥 안.
흙바닥에 누운 채 잠든 미렌의 미간이 움찔, 미약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조그만 목소리가 그곳을 울렸다.
“라이언…….”
간절하고 애달픈 부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잠든 그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꼭, 깊은 꿈을 꾸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