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2)화 (32/133)

평민, 미렌 우드

산에서 내려온 이올라오스는 황급히 어디론가 떠났다.

미렌의 이야기를 듣고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홀로 남은 미렌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곳엔 고고히 떠오른 초승달만이 존재했다.

“……이만 자러 갈까.”

산에서 그녀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껏 몇 번이고 오갔던 길을 걸어 익숙한 집의 대문까지만 가면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렌은 도저히 걸음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아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메마른 입술이 꾹 부딪치자 까칠한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속이 상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어도 미렌 에드가가 되지 못한다.

평범한 다른 이들처럼 그저 잠이 드는 것이다.

이제껏 미렌은 자신이 평범해지길 바랐다.

남들처럼 하나의 인생으로 평범하게 살길, 그렇게 바라 왔는데…….

라이언.

그 이름이 자꾸만 생각나는 건 어째서일까.

이번 한 주만, 한 계절만.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무너졌다.

어느새 욕심은 물을 먹어 파도가 되어 몰려왔다.

미렌의 말라붙은 입술 위로 축축한 물기가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되고서야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더 이상 ‘미렌 에드가’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

***

한편, 남쪽 마탑.

“타, 탑주님!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시……, 잠시만요!”

“나 바쁜데. 말 걸지 말고 할 일 하자.”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탑의 내벽에는 커다란 원형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이들 중 그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탑으로 걸어 들어온 헤겔이 중앙에 서서 하늘로 떠오르자 뒤따르던 로브를 쓴 이도 열심히 날아왔다.

고위 마법 중 하나인 ‘플라이’였다.

헤겔이 원형 계단의 중간쯤에 멈춰 안착하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별일 없지?”

“별일이 없긴요!”

벽면에 꽂힌 책 한 권을 집어 들던 헤겔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천천히 뒤돌자 그곳에 서 있던 이가 눈을 부릅뜨고 헤겔과 시선을 마주했다.

“바깥에서 압력이 얼마나 오는 줄 아세요? 마법사들을 더 보내라고요!”

“지난번에 보낸 인력도 제법 될 텐데.”

“그러니까요! 들어 보니 우리 마탑만 그런 게 아니라 서쪽이나 동쪽 마탑도 마찬가지라던 걸요.”

“이유는?”

로브 속의 얼굴은 제법 앳되었다.

이 마탑에서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불쌍한 리키. 헤겔의 보좌관을 두고 마법사들은 그렇게 불러 댔다.

리키는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마탑주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 감격해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황제가 쓰러졌단 소문이 돌아요.”

“……뭐?”

“쓰러진 황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니, 마침내 칩거한대요. 겨우 잠잠해졌던 귀족들이 이때다 싶어 난동을 피우는 거죠.”

“하?”

탁. 책을 읽다 만 헤겔이 제 앞에 선 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그는 도저히 이 일을 납득할 수 없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헤겔이 중얼거렸다.

“미친놈.”

“네? 저, 저요?”

“너 말고.”

그래서 아르테미스를 구하라 했었나.

헤겔은 라이언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탑의 제한 조건을 줄이기 위한 계약이 바로 아르테미스를 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건 사소한 이유에 불과했다.

헤겔이 라이언의 명령을 들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꽃이 있다지.’

‘아르테미스 말입니까? 딱 석 달만 꾸준히 먹으면 시체도 살아난다는.’

‘그래.’

‘그건 좀 찾기 어려울 텐데.’

왕좌에 앉은 라이언은 내내 풀어진 자세로 있었다.

그가 몸을 바로 세운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찾아온다면, 남쪽 마탑의 금제를 풀어 주지.’

‘그렇게까지 필요한 겁니까? 그건 불로장생의 약이 아닌데요. 오히려…….’

‘찾아오도록.’

‘그게 어째서 필요하신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질문을 하는 헤겔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헤겔의 기색을 알아챈 라이언이 비스듬히 웃으며 말했다.

‘네겐 죽어 가는 동생이 있었다지.’

‘…….’

‘살리고 싶었나?’

순간 발끈한 헤겔이 감히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있어 10년 전 죽은 동생의 이야기는 금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싸늘한 눈으로 헤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내게도 있다.’

‘그게 무슨.’

황제의 형제는 모두 죽었다.

라이언이 즉위하기 전, 제 손으로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동생이라니.

‘내게도…….’

라이언은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권태로운 사자 같았던 그가 그런 표정을 하는 것은 헤겔로서도 처음 보았다.

‘내게도 살리고 싶은 이가 있어.’

물론, 그때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계약을 한 지 벌써 1년도 더 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1년 만에 드넓은 제국에서 아르테미스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헤겔 카르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 그는 10년 전 죽어 가는 동생을 위해 아르테미스를 찾으려 정보를 모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리키.”

“에, 예?”

“잘 들어. 언젠가 내가 이곳으로 편지를 보내면, 남쪽 마탑의 직인을 찍어 돌려보내라.”

“지, 직인이요?! 탑주님 대체 뭘 하시려고요!”

“어차피 잘 쓰지도 않잖아.”

“잘 안 쓰는 게 아니라 그건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함부로 아닌데.”

뻐끔, 뻐끔.

헤겔의 단호한 부정에 리키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미친놈 같았던 자신의 주군은 마탑을 나가기만 하면 더 미친놈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귀족들이 문제라며. 자꾸 압력을 넣어서.”

“그, 그렇긴 하죠…….”

“그럼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인지 좀 알려 주시면 안 돼요?!”

거기까지 설명하긴 귀찮았는지 손을 내저은 헤겔이 계단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놀란 리키가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미 헤겔은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

“폐하께서…… 쓰러지셨다고요?”

“그래. 수도의 귀족들은 이미 모두 안다더라.”

“어쩌다가요? 대체 어쩌다! 병마라도 걸리신 겁니까?”

“그것까진 알 수 없어. 다만 칩거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지.”

프레니티 영지로 돌아온 헤겔은 저도 모르게 미렌에게 황제의 소식을 전했다.

어쩐지 그녀가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예상은 맞았다. 소식을 들은 미렌은 헤겔의 앞섶을 쥐어 가며 매달려 왔다.

꿈을 꾸지 못해 황제와 만날 수 없는 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너, 꿈은?”

“꿈이요?”

“아직도 또 다른 미렌이 되지 못하냐는 말이야.”

며칠 사이 눈 아래가 까맣게 죽은 미렌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윽고 짧게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못 자?”

“익숙……해지지가 않아서요. 눈을 감았다 뜨면 몇 시간씩 사라지는 감각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머쓱했던 미렌은 짐짓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앞서 나갔다.

결국 헤겔도 별다른 말을 해 주지 못했다.

그들이 마침내 영지 내 시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기사님이…….”

“영주 성에 침입한 모양이더라고. 영주님을 협박했대.”

“그게 정말인가? 그 착한 기사님이?”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두 눈을 크게 뜬 미렌이 인파를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엔 놀랍게도 팔이 묶인 이올라오스가 영주 성의 기사들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이올라오스는 아무런 반항 없이 이끌려 가다, 제 뒤를 힐끗 바라봤다.

그곳에 서 있던 미렌과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신호 없이 연행되었다.

뒤늦게 따라온 헤겔이 멍하니 서 있는 미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올라오스 경이…… 끌려갔어요.”

“뭐, 상관없겠지. 저 녀석이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제의 친우를 감히 벌줄 수 있을 리 없지.”

그럼에도 미렌은 어딘지 불안한 마음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헤겔과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닐 때였다.

“어머, 미렌. 산속이나 뛰어다니기 바쁜 네가 시장엔 웬일이니?”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 잡혀간 기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요.”

“으응? 너도 기사님께 관심을 가졌니? 나 원 참. 아까 다른 사람들도 물어보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오래된 잡화점의 주인인 여자는 마을의 소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미렌이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자 여자도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나흘 뒤 기사님의 재판이 있을 거라더구나. 죄목은…… 마법으로 영주 성에 침입해서 영주님의 목을 졸랐다고.”

“목을, 졸라요?”

“그래. 그렇게 다정다감하신 기사님이 참 의외지?”

미렌은 눈을 찌푸렸다.

국법을 중요시하는 이올라오스라면 차라리 남몰래 베었지, 영주의 목을 잡지는 않았을 터였다.

오히려 목을 조른 쪽은…….

미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잡화점 내부를 어슬렁거리며 걷던 헤겔이 보였다.

“헤겔 씨!”

“어, 왜.”

“이올라오스 경이 죄를 뒤집어쓴 것 같습니다.”

“누구 죄?”

“누구긴요.”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우리 죄요.”

몇 주 전, 영주 성에 몰래 침입했던 헤겔과 미렌은 영주의 목을 조르고도 무사히 도망쳤다.

그 뒤로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기에 영주가 모두 잊은 것인가 했었는데, 이올라오스가 뒤집어쓰다니.

“차라리 잘됐네. 그놈 위치면 아무 문제 없이 나올 거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왜?”

“재판이 나흘 뒤라고요!”

잡화점을 나온 뒤부터 어딘지 바빠 보이던 미렌이 헤겔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하늘을 향해 손짓했다.

“……설마.”

“사흘 뒤가 보름날입니다. 이올라오스 경이 못 나올 때요!”

“설마 혼자 하려 했겠어. 분명 부하한테도 말을 해 뒀을…….”

“라이언에게도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았던 이올라오스 경이요? 고작 내 말을 믿고?”

“아, 씨.”

미렌의 반박에 결국 헤겔은 대답하지 못했다.

헤겔을 바라보던 미렌도 그에게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바쁘게 움직이려 했다.

그때였다.

탁.

“야.”

헤겔이 미렌의 손목을 잡아채었다. 움직이려던 그녀는 더 걸음을 뻗지 못하고 뒤돌아봐야만 했다.

“뭐 하게?”

“경이 움직일 수 없으니 저라도 뭔가를 해야죠.”

헤겔은 웃지 않았다.

대신 붙잡은 미렌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말했다.

“넌 미렌 우드야.”

“……그게 어때서.”

“평민 미렌 우드지.”

그제야 헤겔이 하고자 하는 말을 미렌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네가 무언가를 하는 건, 이상해.”

“…….”

“넌 지금 황후 미렌 에드가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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