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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1)화 (31/133)

달에 사는 토끼는 다르다

“……어딜 말입니까?”

“뒷산이요. 복숭아밭 뒤에 조그만 산이 하나 있었는데, 못 보셨어요? 영주 성부터 밭 사이에 끼어 있는.”

“아르테미스를 찾…… 윽!”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앞에서 아르테미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헤겔의 허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이올라오스에게 조금의 정보라도 허투루 들어갔다간 라이언의 귀까지 닿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헤겔에게 눈짓으로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분, 뭐 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만 가죠. 헤겔 씨는요?”

“난 이만 갈 곳이 있어서.”

당연히 헤겔도 함께 갈 줄 알았던 미렌이 놀라 그를 붙잡았다.

그런데 헤겔은 슬쩍 한 걸음 물러서며 둘과의 거리를 벌렸다.

“어디로 가는데요?”

“내가 매일 놀기만 하는 줄 아냐? 하루는 밀린 일도 해야지.”

“……맨날 노는 거 아니었어요?”

“야!”

헤겔의 고함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미렌이 자연스럽게 이올라오스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겔도 없이 이올라오스와 함께 산을 올라가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언제까지 헤겔이 함께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단둘이 되어 버린 일행은 초저녁에 이르러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드 씨는 산길을 잘 아시나 봅니다.”

“뭐, 여기서만 25년을 살았으니까요.”

“25년……. 길군요.”

“예, 뭐…….”

다짜고짜 산으로 오른 것까지는 좋은데, 역시 이올라오스와 단둘만의 시간은 어색했다.

그는 내내 웃으며 대화를 이었지만 미소가 어딘지 꺼림칙했다.

미렌도 그다지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라 할 이야기가 없기도 했다.

결국 어색한 침묵을 참다못한 미렌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보, 복숭아는 잘 도착했나요.”

이올라오스와의 접점이라곤 그것뿐이라 일단 내뱉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잘 하면 라이언의 근황도 알 수 있을…….

“아니요.”

“예?”

“보냈는데 도착은 못 했습니다.”

“그게 무슨…….”

미렌에겐 익숙한 산길이지만 초보자에겐 버겁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이올라오스는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단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선물의 주인께서 쓰러지셨으니 무사히 도착했을 리가요.”

“아……. 예.”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우드 씨는. 평소 황가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우……연히 신문으로 읽어서요. 요즘 가장 뜨거운 이야기 아닌가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요.”

초저녁에 올라온 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산의 중간쯤에 다다르자 미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길을 찾을 때였다.

“그 때문에 폐하께서 상당히 진노하셨습니다.”

“……폐하께서요?”

“단 하나밖에 없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쓰러지셨으니까요.”

그 이야길 듣는 순간 어둠 속에서 미렌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다른 이의 입으로 라이언의 마음을 확인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올라오스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황후 전하의 폐위를 논한 신하들은 감옥에 갇혔고, 국정은 뒤로 미뤄졌습니다. 시종들은 모두 황후를 깨우기 위해 발로 뛰고 있고요.”

“그런 이야길 제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한낱 평민에 지나지 않는 미렌 우드가 듣기엔 제법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이올라오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성에 있는 자들에겐 그리 쉬쉬할 정보가 아닙니다. 아마 마법사들의 귀에도 곧 들어갈 테죠.”

“……그래서군요. 제게도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저는 폐하의 충실한 말이니까요. 폐하께 폐가 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이올라오스의 어조에는 자신의 주군을 향한 단단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신앙과도 같았다.

“우드 씨는 그 애정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폐하로 하여금 제국은 당장 황금기에 들어왔지만, 위협은 끊이지 않습니다. 바깥에선 테룬 공국이 눈을 뜬 데다 안에선 배가 부른 신하들이 아직도 제국의 곳간을 뒤지니까요.”

“…….”

“이 상황에서, 그분의 사랑이 옳다고 믿으십니까?”

순간 미렌은 걸음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그녀는 조금도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테룬 공국의 위협은 역사서로만 배웠으며, 신하들의 이야기는 최근에야 겨우 소문을 들었다.

미렌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쓰러질까 걱정한 라이언은 단 한 번도 미렌이 염려할 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분이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황제…… 폐하니까요.”

“하하, 제가 너무 우드 씨에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너무 귀에 담지는 마십시오.”

이윽고 그가 어서 가자며 재촉할 때였다.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생각에 잠겼던 미렌이 이올라오스를 바라봤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흔들리던 눈동자는 어느새 또렷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경께서는 분명 폐하의 충실한 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요. 저는 폐하의 충실한…….”

“그렇다기엔, 사사로운 감정이 너무 많으시군요.”

그 한마디에 이올라오스도 입을 다물었다.

웃던 낯도 사라졌다. 그는 표정조차 사라진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한 그대롭니다. 손바닥 위에서 노는 말이라기엔……, 너무도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아서요.”

“나는 단지 폐하를 위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폐하께서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

“저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을 위해서’라고.”

미렌은 분명히 그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리아로부터.

‘폐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라이언은 분명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그녀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더라도.

“이올라오스 경.”

“말씀하세요.”

“흔들리지 마세요. 당신이 목표하는 바를 향해 흔들림 없이 향해 가시는 겁니다.”

“그게 무슨…….”

“그러다 보면, 폐하와도 결이 맞을 때가 있겠죠.”

어딘지 엄숙해 보였던 미렌 우드는 오간 데 없었다.

그녀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 말했다.

“고민 상담이셨잖아요.”

“고, 고민 상담 말입니까……?”

“아니었어요? 그런 것 같던데.”

오히려 그 말에 진중해진 쪽은 이올라오스였다. 그가 미렌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신의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하시는 내내 경의 미소가 사라져서요. 언제나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계시는 분이.”

“……그렇군요.”

“폐하께서도 언젠가는 이올라오스 경의 입장을 알아주실 날이 올 겁니다.”

제가 방금 그랬던 것처럼요.

뒷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한 미렌은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춰 서 있던 이올라오스만이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을 뿐이다.

아마도 이때부터였으리라.

‘제국의 기사’ 이올라오스 트리온이 한낱 평민인 미렌 우드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

“이렇게 깊은 산중에 길이 있단 말입니까?”

“글쎄요. 저도 그걸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건데요.”

“……우드 씨, 참 대책 없으십니다.”

“경께서 특별히 대책이 있다면 제가 그 계획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야…… 저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미렌 우드가 프레니티 영지 토박이인 것은 맞지만, 그녀라고 해서 모든 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의 집이 바로 이 산 아래였기에 이만큼이나 수월히 산을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거의 달이 머리 위까지 뜰 무렵에야 둘은 정상에 도착했다.

멈춰 선 미렌이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면 영주 성. 우리가 올라온 길로 가면 다시 복숭아밭.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

“테룬 공국입니까?”

“그렇죠.”

이올라오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들의 주변엔 솔직히 눈으론 차이점을 구분하기도 힘든 나무들이 대다수였다.

거기다 밤이라 시야가 좁아져서 더했다.

“여기서 뭘 할 수 있단 겁니까?”

“마법으로 교류를 하면 금방 들통났겠죠. 제국의 모든 경계령은 그를 방지하기 위한 철책이 있으니까.”

“그……렇죠.”

“그럼 결국 직접 사람이 오가는 수밖에 없는데, 낮에는 이 산에도 마을 사람들이 제법 올라와서요. 누군가 한 명은 목격자가 있을 수밖에요.”

“그런데 목격자는 없으니, 밤에 교류를 했다?”

“예. 그런데 이올라오스 경, 주변을 둘러보세요. 외지인인 경이라면 여기서 밤에도 길을 잃지 않고 올라올 수 있겠어요?”

“저는…… 불가능할 것 같군요.”

“그렇겠죠. 이 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외지인이니까.”

“그럼, 설마……?”

빠르게 그의 생각을 눈치챈 미렌이 고개를 저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밤에도 올라올 만큼 산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물론 저는 빼고.”

“우드 씨가 범인인 겁니까?”

“그럴 리가요.”

당장이라도 칼을 꺼내 들 것 같은 이올라오스의 태도에 미렌이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했다.

“그런데 만약 이 어두운 곳에서요.”

조용히 있던 미렌이 제 손에 있던 랜턴의 불빛을 확 키웠다.

그러자 어둠 속에 가라앉았던 주변이 랜턴으로 하여금 빛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밝은 빛이 있다면,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기 좋지 않을까요.”

“그렇기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띄기 쉬울 텐데…….”

“이게 만약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요.”

“그 무슨…….”

“이올라오스 경, 이쪽으로요.”

랜턴의 밝기를 다시 낮춘 미렌은 산 정상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이올라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십 분쯤 걸음을 옮겼을까.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물……소리?”

이올라오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강물이었다.

산이니 그만한 강쯤은 당연히 있을 법도 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그의 시선을 끄는 건 다른 것이었다.

“이제 감이 좀 잡히십니까?”

그곳은 나무에 가려져 빛 한 점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다른 곳과는 달랐다.

흐르는 강물이 꼭 거울처럼 달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고작 강물이 미약한 달빛을 비추는 것만으로는 외지인도 밤에 산을 오를 수 있진…….

그 순간 미렌이 강물을 향해 랜턴을 비췄다.

들어오는 빛의 세기가 강해지자 당연히 주변은 더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달빛이 조금만 더 강해지면 거의 낮만큼이나 밝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올라오스 경.”

“예?”

“하늘을 보세요.”

그의 눈이 하늘로 올라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오늘은 고작 초승달입니다.”

이올라오스와 눈이 마주친 미렌이 씩 웃으며 말했다.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날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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