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30)화 (30/133)

장기 말

“이게 무슨 말이야?”

“……그렌, 잠깐 집에 들어갈래? 누나가 곧 따라갈게.”

“응, 빨리 와.”

헤겔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그렌이 손을 흔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미렌도 겨우 뒤를 돌아봤다.

헤겔은 아직도 유심히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저쪽 몸이 쓰러졌어요.”

“……왜?”

“신문에도 나와 있네요. 신하들의 시위를 직접 목격한 황후는…….”

“설마, 그래서 잠들어도 넘어갈 수 없는 거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고 해서 자신의 몸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했다.

단지 짐작 가는 바가 그것밖에 없을 뿐.

“정치 때문에 저들 멋대로 결혼시켜 놓고, 이제는 폐위를 시키겠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염두에 뒀던 일이라.”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러면요?”

헤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제 반대편 몸이 죽어 간다는데도 너무도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아니, 어쩌면 무덤덤한 척을 하는 건가.

“네 인생이잖아.”

“미렌 우드도 있어요.”

“미렌 에드가는 죽어 버려도 상관없어?”

“……네.”

대답은 느지막이 나왔다. 어차피 머지않아 죽을 몸이었다.

그러니 꼭 선택해야 한다면, 미렌 우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았다.

“그럼 내가 죽여 줄게.”

“예?”

순간 헤겔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두 번 말할 생각은 없는지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가 있는 방향이었다.

“갑자기 왜, 왜 죽여요. 어차피 죽을 텐…….”

“그래. 이대로 폐비 되고 죽는 것보단 그 전에 죽는 게 더 영광이잖아. 너도 상관없다며.”

그 한마디에 미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분명 그랬었다.

몇 번이고 상상해 왔고, 또 준비해 왔던 죽음이 아니던가.

짐밖에 더 되지 않는 몸이니 사라지면 라이언도…….

그때였다.

미렌은 결국 저벅저벅 걸어가는 헤겔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이대로 멍청하게 죽어 버린 폐비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그 삶도 내가 살아온 삶이야.”

흙바닥이 점점이 젖어 들어갔다.

미렌이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덜덜 떨리는 입가로 인해 발음이 뭉개졌다.

“이제야 겨우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이대로는, 그냥…….”

“알겠어. 알겠으니 그만 울어.”

헤겔은 미렌이 겨우 옷자락이나 붙들고 있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는 미렌을 품 안 가득 껴안아 느릿하게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렇게 가쁜 숨을 내뱉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네가 원하는 걸 이루어 줄게.”

“…….”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가 약속하지.”

커다란 헤겔의 손이 품에 안긴 미렌의 뒷머리 위로 올라왔다.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된다는 듯 무척이나 다정한 손길로.

그녀는 그제야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이제껏 쌓아 온 모든 감정이 터지듯 눈물로 쏟아졌다.

시한부 황후라는 말에 상처 받지 않았던 게 아니다.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한 번은 두 번이 되었고, 두 번은 열 번이 되었다.

미렌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놓아주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덜 상처 받을 수 있어서.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죽어 가는 몸마저 사랑해 주는 라이언을 보며……. 어느새 감정은 싹튼 의심마저 상관없을 만큼 부푼 지 오래였다.

미렌은 죽음이 가까워지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살고 싶어지고 말았다.

***

“어딜…… 간다고요?”

“어디긴. 이올라오스의 여관. 아직 거기 있잖아.”

“거길 왜 가냐고요. 어차피 곧 떠난다던, 헤겔 씨!”

헤겔은 이미 저 멀리 보이는 여관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었다.

남의 숙소에 들어가는 주제에 숨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렌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궁금하지 않냐.”

“……뭐가요.”

“이올라오스가 숨기고 있는 게 대체 뭔지.”

헤겔이 히죽 웃자 미렌은 눈만 찡그렸다.

당장 미렌 에드가의 상황부터 해결할 줄 알았던 헤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으로 왔다.

단지 저게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순간 헤겔과 미렌에게 여관 주인이 다가왔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둘을 바라보자 그녀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객이 아니면 이만 나가지 그러셔요?”

“아아, 오늘부터 이틀 정도 머무르려는데, 내 워낙 예민해서 먼저 방의 상태를 좀 살펴야…….”

헤겔은 풍만한 여관 아주머니께도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며 미렌을 향해 몰래 손을 내젓는 것이 여기서부턴 혼자 가라는 의미인 모양이었다.

태도가 휙휙 바뀌는 헤겔을 향해 고개를 내저은 미렌도 결국 이올라오스의 방을 찾아갔다.

헤겔은 그가 이곳 3층에 머물고 있다고 했었다.

“3층에만 방이 몇 갠데, 여기서 어떻게 찾으라고.”

그러나 토로하듯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의 방은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오직 하나의 방문 앞에만 음식이며 옷이 가득 쌓여 있는 탓이다.

그것을 본 미렌이 제 이마를 붙잡았다.

프레니티 마을은 워낙 오지에 있는 데다 사람들이 처한 상황도 특수하다 보니 외지인이 드물었다.

아마도 오랜만에 온 외지인인 이올라오스에게 마을 사람들이 호의를 베푼 것일 터였다.

발로 문 앞을 가득 채운 옷을 밀어낸 미렌이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의외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끼익, 나무 문을 조금만 열어 살피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내부가 한눈에 보였다.

“……떠났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미 이곳을 정리하고 떠났다기엔 그가 입고 있던 옷이나 물품들이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들어선 그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방 안에 하나뿐인 책상이었다.

그곳엔 쓰다만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여, 증거를 찾지 못했다.>

집어 들자 편지가 한 장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어지는 다음 장을 바쁘게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프레니티 영지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테룬 공국과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므로 영주의 죄를 입증할…….>

기나긴 편지를 짧은 시간 내에 세세히 읽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빠르게 중요한 단어만을 골라 읽고 있을 때였다.

톡톡.

뒤에서 누군가 미렌의 어깨를 두드렸다.

움찔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우드 씨,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는 이올라오스의 눈보다 더 시선이 갔던 것은, 그 아래로 싸늘하게 가라앉은 입매였다.

***

“잠시만요,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시지 그럽니까!”

“으음, 이건 반역죄예요, 우드 씨. 편지에 찍힌 직인을 보셨잖습니까?”

이올라오스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미렌의 얇은 팔목을 모두 뒤로 당겨 결박한 다음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미렌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야만 했다.

“어, 어디로 가려고요.”

“그야 경비대입니다. 황가의 문양이 찍힌 편지를 멋대로 읽으셨으니 차후 황성 경비대로 인도되실 겁니다.”

“……예? 화, 황성이요?”

그때부터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거칠게 움직였다.

이대로 갔다간 자칫 두 몸이 모두 황성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기사단장이라는 직위에 맞게 조금도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옥죄는 힘이 더 강해졌을 때였다.

“거기서 뭐 해?”

“헤겔 씨!”

“마법사님, 또 뵙네요. 마침 제가 범죄자를 잡아서요. 경비대로 인도하려는데 도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범죄자?”

미렌이 억울한 눈으로 헤겔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론 읽긴 내가 직접 읽었지만 헤겔은 공범이 아닌가!

눈빛으로 간절히 도움을 청하자 헤겔이 눈을 끔뻑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고생하십니다, 기사님. 그럼 저는 이만.”

능청스럽게 고개를 꾸벅 숙인 헤겔은 유유히 여관 밖으로 걸어갔다.

이올라오스도 더 이상 헤겔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녀를 끌고 갔다.

“저……, 저 개자식을 어쩌면 좋을까요.”

“예? 우드 씨, 뭐라고 했어요?”

당장이라도 이올라오스에게 저놈도 공범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일단은 이 손을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여관에서 경비대가 멀지 않아 다행입니다. 우드 씨, 고문은 받아 본 적이 있어요? 그 가녀린 몸으로는 몇 분 못 버틸…….”

“제가!”

결국 힘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미렌이 이올라오스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대신 그에게 제안을 하기로 결정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영주 성에서 테룬 공국이 교류하는데 들키지 않을 수 있었는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산 지만 벌써 25년째예요. 이곳 지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경비대는 제발…….”

의외로 이올라오스는 잠시 멈춰서 고민했다. 제안이 통하나 싶어 기대하고 있던 찰나였다.

“역시, 그건 안 되겠습니다.”

“왜, 왜요! 저 진짜 잘 압니다! 예?!”

더는 대화도 해 주지 않았다.

미렌도 결국 반쯤 포기하고서 그가 끌면 끄는 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올라오스가 멈췄다.

힘든 자세로 끌려가던 터라 미렌이 겨우 고개만 들어 앞을 확인했다.

그들의 앞에는 조금 전 떠났던 헤겔이 있었다.

“그자의 신분은 내가 증명해도 되나?”

“……남쪽 마법사께서 말입니까?”

다가온 헤겔이 이올라오스가 잡고 있던 미렌의 팔을 당겨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녀가 얼떨결에 그의 품으로 구르듯 들어온 사이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진 아실 텐데요.”

“만일 이자가 반역자, 혹은 법전에 어긋나는 범죄자일 경우.”

“그와 같은 범죄자로 즉결 처분에 응한다…….”

그것은 미렌도 알고 있는 법률 중 하나였다.

일부 고위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리였지만 실상에서 쓰이는 경우는 몇 없었다.

대체 누가 타인을 위해 단두대에 함께 목을 올려 주겠는가.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어차피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건데, 29년 동안 못 썼으면 앞으로도 쓸 일 없을걸.”

“……소문으로 들었지만 정말 괴짜시군요, 남쪽 마법사께서는.”

“웃으면서 죄인의 목을 베는 너만 할까, 이올라오스 경?”

“전 그저 폐하의 충실한 말일 뿐입니다.”

중심을 잡은 미렌도 겨우 헤겔의 품에서 빠져나와 홀로 섰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죄는 일단락된 모양이었다.

“그럼, 우드 씨?”

“예, 예?”

“도와주신다던 약속을 지키러 가셔야죠.”

“……필요 없다면서요?”

이올라오스가 말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미렌은 이제 그 웃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저 다정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헤겔이 주민들과 허허실실 웃으며 대화하는 이올라오스를 이상하게 여긴 것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부름에 답하지 않으면 그 또한 반역입니다, 우드 씨.”

“하…….”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전에 갔던 복숭아밭?”

싸늘했던 기색은 오간 데 없이 밝아진 이올라오스가 뒤로 돌아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한숨 쉰 미렌은 아직 옆에 선 헤겔을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다 알려 주지는 마.”

“예?”

“도움을 주더라도 저놈에게 모두 알려 주지는 말라고.”

“어째서요?”

헤겔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 녀석이 보고 들은 모든 건 황제에게 들어가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