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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9)화 (29/133)

시들다

미렌과 헤겔은 정신을 잃어버린 영주를 뒤로한 채 성을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어느새 저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더불어 잊고 있던 피로가 찾아왔다.

고작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돌아다녔으니 당연한 피로였다.

미렌이 길게 하품을 늘어뜨리자 헤겔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졸려?”

“조금요. 헤겔 씨도 한숨도 못 잤죠?”

“난 괜찮은데.”

어깨를 으쓱인 헤겔은 걸음을 움직이며 재빨리 다른 주제를 꺼냈다.

꼭 조금이라도 지루했다간 미렌이 잠들까 두려운 것처럼.

“이올라오스는 역시 뭔가를 조사하러 온 것 같지?”

“예, 라이언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나 봐요.”

“……뭐, 그렇게 되나.”

미렌은 그 어조에 담긴 퉁명스러움을 알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을 의심해선 안 되었다. 그는 그저 은밀히 조사를 명했을 뿐이다.

단지 걸리는 게 있다면, 라이언이 자신에게 말해 온 시간과 이올라오스가 움직인 시간이 다소 맞지 않다는 것인데…….

생각에 빠진 사이 어느새 둘은 미렌의 집 앞에 다다랐다.

저 멀리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렌은 당연히 그 앞에서 헤겔에게 이별을 말하려 했다.

그에게도 숙소가 있을 테니 돌아가야 할 터였다.

그런데 헤겔이 먼저 미렌의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사람 뭐야?”

어이가 없어서 차마 따라 뛰어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헤겔은 꼭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려 들어가 외쳤다.

“어머님!”

“어머! 이게 누구야, 헤겔 씨 아니야?”

“잘 지내셨어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국자를 든 미렌의 어머니가 나오셨다.

마주 선 헤겔은 이미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뒤늦게 헤겔을 따라온 미렌은 자신보다 더 친자식처럼 구는 그를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미렌, 밤새 어딜 갔다 왔니? 아, 헤겔 씨가 와서 술이라도 마셨나 보구나. 엄마한테도 말해 주지 그랬니!”

“하하,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와서 미렌이 말씀드릴 경황이 없었나 봅니다.”

“으음, 그럼 둘 다 아침 식사는 아직이겠네. 속도 안 좋을 텐데 같이 식사해요.”

“어머님 식사는 돈을 내고 먹어야 하는데……. 제가 그래도 될까요?”

아주 살갑다 못해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식탁 앞에 앉은 헤겔이 뻔뻔하게 미렌을 향해 제 옆으로 오라며 손을 내저었다.

얼떨결에 다가가 앉은 미렌과 헤겔의 앞으로 계란으로 간단하게 만든 아침이 나왔다.

“어서 들어요. 나는 잠깐 애들 아빠 좀 깨우러 다녀올게.”

“어머님은 안 드시고요?”

“우리는 그렌이 일어날 때 같이 먹으니까, 둘만 먼저 먹어요. 보니까 밤도 새운 것 같은데 어서 먹고 좀 자야지.”

어머니가 들어갈 때까지 실실 눈웃음을 치던 헤겔은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웃음을 거뒀다.

미렌은 그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헤겔 씨.”

“엉. 왜.”

“그, 미친 거 아니죠?”

“뭐?”

“정신이 나갔다든가?”

스푼을 떠올리던 헤겔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미렌을 바라봤다.

그녀는 심각한 어조로 헤겔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다. 이윽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굴만 멀쩡한 건가……?”

“야, 다 들리거든?”

“마법사는 다 미친 사람만 할 수 있나……?”

“다 들린다고!”

“아, 죄송해요. 너무 뻔뻔하셔서 어디 미치신 건가 했습니다.”

헤겔이 그 말에 언성을 높였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 갔다.

식사가 끝나자 헤겔과 함께 식기를 정리한 미렌이 2층으로 가는 나무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데 헤겔도 슬그머니 미렌의 뒤에 붙었다.

그가 계단 층 한 개를 밟고 올라섰을 때였다.

“그…… 헤겔 씨, 혹시.”

“뭐.”

“대마법사가 아니라 사실 부랑자나 노숙자, 뭐 그런 건 아니죠?”

“야!”

헤겔이 얼굴까지 붉혀 가며 외치자 미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님 말고.

헤겔이 미렌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투덜거렸다.

“나도 돈 많아. 아니, 여기 오기 전까지는 1박에 1000골드 이하 숙소에선 머물지도 않았다니까?”

“아…… 진짜요.”

“식사는, 어? 황성 출신이거나 내가 아는 식당 출신 주방장 아니면 세 입을 안 먹었어!”

“아…… 정말요.”

영혼 없는 대답에 헤겔이 제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마침내 2층에 올라오자 간단하게 얼굴만 씻은 미렌이 침대로 쏙 들어갔다.

헤겔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대편 침대에 앉은 터였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미렌이 어서 두툼한 이불을 어깨에 둘렀다.

그러곤 헤겔을 힐끗 보며 말했다.

“안 추워요? 난로라도 틀까요? 오래돼서 냄새가 좀 나긴 한데.”

“됐어. 따뜻하면 졸리잖아.”

“예? 안 따뜻해도 지금 충분히 졸려요.”

“……졸려?”

침대 위에 앉아 괜히 바닥에 깔린 카펫만 발끝으로 툭툭 쑤시던 헤겔이 고개를 들었다.

미렌은 이미 이불 속으로 폭 파묻혀 누운 뒤였다.

그녀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예. 졸립니다…….”

“야.”

“…….”

“미렌.”

그녀가 말이 없자 헤겔이 마침내 침대에서 벌컥 일어섰다.

침대로 다가간 그는 머리맡에 서서 말랑한 볼을 베개에 구긴 채 잠든 미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좋냐. 그 죽어 가는 몸으로 황제를 만나는 게.”

손을 내린 헤겔이 미렌의 볼 위로 툭, 손가락을 올렸다.

차갑게 식은 그의 손에 미렌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는 헤겔도 알지 못했다.

그저 싫었다.

미렌이 잠이 드는 것도, 어서 잠이 들고 싶어 하는 것도.

순간 짓궂은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깨울까.

이대로 흔들어서 깨워 버리면, 저쪽의 황제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려나.

유혹은 발치까지 다가왔다.

미렌의 볼이나 겨우 건드리던 손가락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깨울 것처럼 미렌의 어깨로 내려갔다.

그대로 미렌의 몸을 흔들어 강제로 깨우면 됐다. 그러면…….

그 순간이었다.

“으…….”

잠든 미렌으로부터 조그만 신음이 흘러나왔다.

헤겔은 뒤늦게 고개를 들고 방 안을 살폈다.

“……춥나?”

미렌은 두 발을 모아 꿈지럭거렸다.

이불을 한껏 위로 당긴 탓에 발이 공기 중에 노출된 탓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겔은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며 엄지와 중지를 부딪쳤다.

따악,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후끈해질 정도로 더워졌다.

“미렌.”

“…….”

“잘 자.”

더워진 미렌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말없이 웃은 헤겔이 방 안의 불을 껐다.

커튼이 쳐진 창가 너머로 희미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짧은 낮잠이었다.

…….

미렌이 눈을 끔뻑거렸다.

공기가 건조해서 유난히 목이 말랐다. 짧게 콜록거린 그녀가 마리아를 찾았다.

“마리아.”

“…….”

“……마리아?”

이상했다. 마리아가 아니라면 다른 시녀라도 부름에 다가와야 할 텐데.

그녀는 결국 침침한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오싹,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아 왔다.

그제야 미렌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낡은 나무 창문. 달랑이는 전등. 오래된 벽의 낙서까지.

미렌 우드는, 미렌 우드로서 눈을 떴다.

미렌 에드가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

“헤겔 씨!”

“어, 일어났냐. 마당에 나무가 얼어서 아버님이 이걸……. 야, 인마! 너 그러다 넘어져!”

다급하게 집을 뛰쳐나온 미렌은 마당에 홀로 있는 헤겔을 확인하고 달려왔다.

그러느라 마당 한가운데에 조그맣게 얼어 있는 웅덩이를 보지 못하고 달려갔다.

결국 그녀가 미끄러질 뻔했을 때였다.

헤겔이 품에 안고 있던 짚 더미를 내던지고 당장에 달려왔다.

가까스로 그녀를 받아 든 헤겔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

“얼어 있는 걸 못 봤네요. 죄송합…….”

“내가 뛰지 말랬잖아!”

격노한 헤겔이 큰소리를 내었다.

품에 기대 있던 미렌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뜰 정도였다.

어제부터 헤겔이 잠깐씩 발끈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헤겔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기며 미렌의 손목을 꽉 잡아 왔다.

“사람 좀 그만 놀래! 물에 빠지고서도 뛰어다녀, 영주한테 납치당해도 아무 말도 안 해! 네가 무슨 용병이라도 되는 줄 아냐? 어?!”

“……헤겔 씨.”

제 분을 참기 힘든지 헤겔은 그러고도 제법 오랫동안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러나 싸늘한 분위기와 달리 붙잡은 미렌의 손목은 놔주지 않았다.

꼭 자신이 놓으면 그녀가 넘어질까 걱정하는 것처럼.

미렌이 픽 웃었다.

“안 넘어졌잖아요.”

“내가 안 잡아 줬으면 너 머리라도 깨졌다고.”

“그러니까, 헤겔 씨가 잡아 줘서 안 넘어졌잖아요.”

그러면 됐지.

미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순간 헤겔의 미간 사이에 잡혀 있던 주름이 풀려 갔다.

그의 분위기가 풀어지자 미렌도 헤겔의 손을 툭 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넘어져도 괜찮아요. 나 여기선 진짜 건강하니까.”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란 소립니다. 그거 과해요.”

“알겠다니까.”

분명 기분은 풀어진 것 같은데, 어딘지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미렌은 그것까지 달래 줄 새가 없었다.

“그것보다, 헤겔 씨.”

미렌이 미처 얼어붙은 땅까지 보지 못하고 달려 나온 이유야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털어놓을 사람도 한 명뿐이었다.

“뭐. 왜.”

“저 이상해요.”

“……뭐? 너 어디 아파?!”

“아뇨. 그게 아니라.”

미렌이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초조한 눈동자 때문에 속눈썹이 불안하게 떨리었다.

“미렌 에드가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사실 어젯밤에 반대편 몸에서…….”

“누나! 형아!”

대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문틈 사이로 조그만 손이 보이더니 이윽고 그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렌의 동생답게 얼어 있는 땅 위로 정신없이 달려오는 그렌에 헤겔이 눈을 크게 떴다.

품에서 미렌을 밀어낸 헤겔은 이번에도 가까스로 그렌을 안아 들었다.

그가 안아 주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그렌이 넘어졌을 터였다.

“야, 꼬마야. 네 누나는 닮으면 안 된다. 어?”

“누나가 왜요?”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뛰었다가 머리라도 깨지면 크게 다친다고.”

“크게 다쳐요? 그러면, 황후님처럼 돼요?”

“뭐?”

그렌의 악의 없는 질문에 헤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제 품에 안긴 그렌의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문이었다.

오늘 아침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장에 다녀온 그렌이었기에 이 산자락까지 올 수 있었던, 아주 최근의 신문.

그렌을 한 손으로 껴안은 헤겔이 그것을 받아 들고 펼쳤다. 일간지 제목은 단순했다.

“<병약한 에드가 황후, 마침내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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