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8)화 (28/133)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거, 거기 아무도 없느냐!”

“소리 지르지 말자. 나 귀 아파. 어차피 소리도 차단했고.”

“뭐……?”

헤겔이 샐쭉 웃었다.

물론 미렌에게만 보이는 미소였지만 왜인지 삐죽 소름이 돋았다.

뒤이어 헤겔이 영주의 멱살을 쥔 채 창가로 다가갔다.

“이, 이것 놔라! 놓으라고!”

멱살을 잡힌 영주가 이리저리 발버둥을 쳐 봤지만 헤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미렌이 가녀리다고만 생각했던 헤겔은 제 무게의 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영주의 몸을 가볍게 들고 있었다.

그가 아직 은신 마법을 해제하지 않은 터라 영주는 꼭 허공에 둥실 떠올라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쿵.

육중한 몸이 창가에 내려앉으며 커다란 소음을 냈다.

헤겔이 순식간에 영주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의 팔 하나를 뒤로 돌려 붙들었다.

“얼마 전에 애를 놓쳤어? 납치라도 했나?”

“납치가 아니라 그, 그저 분홍 머리가 예뻐서…….”

“분홍 머리? 설마 그게 토끼 닮은 애냐?”

창가에 머리를 불쑥 내민 영주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자 어깨를 으쓱인 헤겔은 단숨에 창가 너머로 반쯤 더 밀어 넣었다.

겨우 허리 부근이 창가에 걸쳤다.

헤겔이 그의 팔을 쥔 손이라도 툭 놓았다간, 당장에 바닥으로 떨어질 터였다.

하필 집무실은 영주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바닥이 까마득하게 멀었다.

“대답.”

헤겔의 얼굴 위에 달린 샐쭉한 미소와 달리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렌도 처음 들었을 때엔 라이언보다 더 위엄 있는 목소리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놀랐던 목소리였다.

물론 미렌도, 헤겔도 보이지 않는 영주로서는 더 두려울 법한 일이었다. 결국 영주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에, 에, 예…….”

“왜?”

“예?”

“왜 그랬는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영주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변명할 기회를 주는 거잖아. 난 누구처럼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괴롭히지 않거든.”

그거, 설마 라이언을 두고 말하는 건 아니죠?

순간 일전에 라이언과 헤겔이 나눴던 설전이 떠오른 미렌은 질문이 차올랐지만 거둬들였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방금 전 헤겔이 미렌을 향해 웃으며 검지로 쉿, 하는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면 미렌이 곤란해질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저 하룻밤을 보낼 기회를 주려고 했습니다!”

“납치네?”

“그, 그 애가 마음에 드는 거면 당장이라도 찾아내서 앞에 데려다 놓겠……!”

영주가 번뜩 고개를 들어 집무실 안쪽을 바라봤다.

대화에서 무언가 해결 방법이라도 찾은 눈치였다.

헤겔이 영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근데.”

물론 은신 마법으로 인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영주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이 사라져 싸늘하게 식은 헤겔의 얼굴을.

“기회는 단 한 번이야.”

기묘한 목소리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반해 목소리는 꼭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장난.

헤겔이 힘주어 잡고 있던 제 손에서 힘을 미약하게 풀었다.

제 몸이 바깥쪽으로 떠밀리는 것 같자 다급해진 영주가 한 손으로 창문 아래 벽을 탁 붙잡았다.

“사, 살려 줘. 돈이 필요하나? 얼마라도 주지. 제발, 제발……!”

“돈?”

헤겔은 조용히 잡고 있던 영주의 몸을 바깥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결국 영주는 잡고 있던 벽마저 놓친 채 손이 미끄러졌다.

“그, 그래. 얼마? 얼마가 필요하지? 아니면 필요한 게 있나? 이것만 놓아주게. 내 바로 마련할 테니까,”

“그러면 적어도 이 나라의 황제는 되어야 할 텐데.”

“무, 무슨…….”

“내가 얼마를, 무엇을 바랄 줄 알고.”

감히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헤겔의 연이은 질문에 영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착복한 돈이 많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황제만큼이나 많은 부를 쌓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자 눈을 껌뻑인 헤겔이 영주의 육중한 몸을 아주 조금 더 창문 너머로 밀어냈다.

영주의 몸은 이제 허벅지 반쯤이나 겨우 집무실에 걸쳐진 채였다.

“으아아아악!”

그가 곧 떨어질 사람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보다 못한 미렌이 이제 그만하자며 헤겔의 팔을 잡았을 때였다.

“왜 토끼를 괴롭혀. 동물 학대는 범법이거든.”

“다, 다다, 다시는 안…….”

“다시? 그런 건 안 중요해. 나는 지금 이미 저지른 네 잘못에 대해 말하고 있는걸.”

조곤조곤, 그의 잘못을 되짚어 주는 헤겔의 목소리가 어둠 사이를 갈랐다.

“안 죽일게.”

“……흑, 으흐윽.”

“근데, 그만큼만 아프게 할게.”

싸늘하게 식은 얼굴과 달리 말투가 우스울 정도로 다정해서, 미렌은 도무지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신 헤겔의 팔뚝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목소리는 내지 않으며 조용히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만 가요.

그때까지 영주만 지그시 내려다보던 헤겔이 미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한 그의 끄덕임에 미렌은 그만 영주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떠날 줄 알았다.

그렇게 안심했던 그 순간, 헤겔이 잡고 있던 영주의 옷을 툭 놓았다.

“으, 으, 으어어!”

“헤겔!”

무거운 영주의 몸은 결국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창문 너머로 넘어갔다.

적어도 5층 이상인 이곳에서 떨어졌다간 적어도 팔다리는 온전치 못할 터였다. 아니, 곧바로 죽을 수도 있었다.

놀란 미렌이 다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안 죽인다고 했잖아.”

창가에 선 미렌의 뒤로 헤겔이 바짝 붙었다.

그녀보다 키가 훨씬 큰 헤겔은 제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날 못 믿어?”

미렌이 고개를 돌리자 헤겔과의 거리가 몹시도 가까웠다.

자신을 믿지 못하느냐는 물음.

그는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냐는.

이제껏 가벼웠던 헤겔의 태도는 뒤바뀌어 더 이상 농담 같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미소조차 짓지 않는 헤겔을 보고 있자면 그가 방금 사람을 죽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제 어깨에 묻은 벌레조차 죽이지 못하던 그가, 자신의 죽은 동생을 아직도 그리워하던 헤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미렌은 헤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믿어요.”

그 말을 뱉으며 미렌은 문득 라이언이 떠올랐다.

그를 믿지 못하고 문을 열어 버렸던 자신 또한.

그가 믿어 달라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자신은 문을 열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은 아니다.

신뢰는 눈만 떼면 하루 이틀 사이에 자라고 마는 잡초 따위가 아니었다.

주의를 기울여 물을 주고 햇빛을 받아 내야만 키울 수 있는 것이므로.

“그래.”

미렌의 그 한마디에 헤겔은 무심한 표정을 지웠다.

대신 짧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이윽고 헤겔이 어깨를 감싸자 미렌은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창문 너머로 시선을 내리자 그곳엔 땅바닥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둥실 떠 있는 영주가 있었다.

헤겔이 떨어지던 영주에게 마법을 건 것이다.

“저놈이 무거워서 그래. 너무 무거워서 실수로 놓쳐 버렸어.”

“그게 실숩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응, 근데 이렇게 가녀린 내 팔이 저걸 어떻게 버텨.”

휴우. 숨을 내뱉은 헤겔이 불쌍한 얼굴로 제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허탈한 얼굴로 그런 헤겔을 바라보던 미렌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어서 영주를 돌려놓으라 말했다.

이곳에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기사들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렌의 단호한 태도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던 헤겔은 이내 잠자코 영주를 다시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집무실 바닥에 버려지듯 내려진 영주는 입을 벌린 채 혼절한 상태였다.

미렌이 조심스럽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숨을 확인했다.

두꺼운 살집 아래로 아직 맥박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 목숨을 그렇게 쉽게 가지고 놉니까?”

“내가 뭘.”

“아무리 잘한 것 없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널 납치했다잖아.”

헤겔이 손을 들어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제야 완전히 드러난 헤겔의 얼굴 위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당했다다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이제껏 미렌에게만큼은 장난스러운 태도였던 헤겔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마디를 남긴 헤겔은 미렌에게 그런 제 얼굴을 보여 주기가 싫었는지 이내 뒤로 돌아 버렸다.

그런 헤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렌도 화를 내기 위해 열었던 입을 잠시 다물었다.

헤겔은 자신을 위해 화를 내준 것이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당해야 했고, 당한 뒤에도 혹시 피해가 갈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을 위해서.

뒤로 돌아섰던 헤겔은 무언가 생각하는 중인지 제 허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미렌이 문득 다가가 그의 옷소매를 당겼다. 꼭 라이언이 떠나기 전 잡아당겼던 것처럼.

“헤겔 씨.”

“……응.”

“당신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다른 이를 살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그 한마디에 헤겔의 몸이 움찔 떨렸다.

“화내서…… 미안합니다.”

이어지는 말에 헤겔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미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옷소매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헤겔은 저도 모르게 미렌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이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 미렌이 연이어 말했다.

“라이언이었어도 똑같았을 겁니다. 당신이라서 방금 화낸 게 아니라, 그냥, 나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그러는 게 싫어서.”

두서없이 터져 나오는 말에 미렌도 제 말의 요지를 알 수가 없었는지 초조하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감싸 안기 위해 미렌의 어깨로 손을 뻗었던 헤겔은 스쳐 지나간 이름 하나에 그 손을 멈췄다.

라이언.

이 나라의 황제.

미렌 에드가의 남편.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라이언이었더라도 똑같이 했을 거라는 그 한마디.

헤겔은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조용히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빈손을 꽉 쥐었을 뿐이었다.

“그래.”

“……헤겔 씨?”

헤겔로부터 흘러나온 대답에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헤겔은 그저 고요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나직이 말했다.

“상관없어.”

나는, 그런 거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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