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참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미렌 우드로 돌아와 있었다.
시계를 보아하니 아직 미처 새벽이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미렌 우드의 몸에서도 오랜만에 피로가 느껴졌다.
어제 하루 종일 헤겔을 따라 이올라오스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고작 세 시간밖에 잠들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도망치듯 기절하긴 했지만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서 도망치는 것은 미렌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잠들려 했을 때였다.
쿵!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집 마당에는 커다란 고목이 하나 심겨 있었는데, 그 고목의 굵은 가지 중 하나는 2층 미렌의 방 창문 앞까지도 다다랐다.
평소라면 커다란 나뭇가지의 그림자밖에 없을 창문 너머로 인영이 보였다.
“……누구십니까?”
어두운 밤, 새벽. 이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이라곤 없었다.
문득 생각난 것은 얼마 전 영주 성으로 납치를 당했던 일이었다. 탈출을 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히 지나갔던 일.
아무리 그래도 영주 성의 기사쯤 되는 이가 창문으로 찾아올 리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막 창문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워!”
“예? 뭐라고…….”
“나 춥다고!”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끔뻑이던 미렌이 벌컥 창문을 열었다.
아니다 다를까 그곳엔 가지에 올라타 오들오들 떨고 있는 헤겔이 있었다.
농한기가 찾아온 만큼 프레니티 영지도 날씨가 추워졌다.
특히 지금 같은 새벽에는 한파가 들이닥쳐서 밖을 돌아다닐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헤겔은 달달 떨며 그곳에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와, 나 얼어 죽을 뻔했어. 마법으로 불이라도 피울까 얼마나 고민한 줄 아냐?”
“그랬다간 우리 집이 이미 다 탔을 텐데요?”
“당연하지. 난 공격 마법 전문이거든.”
뻔뻔하게 말하는 헤겔을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보던 미렌이 결국 한숨을 쉬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춥다고 말한 게 거짓은 아니었던 듯 헤겔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미렌은 분주히 방의 온도를 높이고 먼지가 쌓여 가던 담요를 꺼내 그의 어깨에 둘러 줬다.
헤겔은 그런 미렌이 움직이는 걸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끄러미 미렌만 바라보던 헤겔이 문득 입을 열었다.
“황제는, 잘 만나고 왔어?”
“……예.”
“그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고?”
그 질문에는 미렌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라이언은 진실했다고. 그렇게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그녀가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상황이 더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헤겔은 그녀가 입을 다물자 제 어깨에서 담요를 걷어 냈다.
“확인하지 못했대도 상관없어. 이올라오스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이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새벽부터 긴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널 깨우러 온 거고. ……진짜 그래서 깨우러 온 거다. 어?”
헤겔이 무언가 찔리는 듯 덧붙였지만 이미 미렌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올라오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라이언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는 분명 ‘이올라오스가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잠깐 사이에 이올라오스에게 명을 다시 내렸나? 그렇다기에는 신하들의 시위 탓에 함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헤겔이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지금부터 움직이자.”
“지금부터요? 다시 잠들려고 했었는데요.”
“뭐야. 궁금하지 않아? 이올라오스가 정말로 영주 성에 대해 조사하는 거면 도와주기도 해야 하잖아.”
“그렇죠, 그런데…….”
라이언이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라이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히 예상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믿지 못하고 문을 열었으니 라이언을 만나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헤겔은 이미 그녀가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창문으로 반쯤 몸을 내민 채 미렌에게 손을 뻗어 오고 있었다.
어서 잡으라는 듯이.
힐끗 뒤를 돌아보자 1층으로 내려가는 문이 보였다.
이 시간에 문으로 나가다 걸렸다간 요즘 들어 예민해진 부모님이 걱정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부모님, 그렌, 그리고 촌장님을 비롯한 따뜻한 마을 사람들까지.
마침내 미렌은 침대로 돌아가는 것을 미뤄 둔 채 헤겔의 손을 잡았다.
프레니티 영지의 앞날을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손 꽉 잡아. 너 여기서 떨어지면, 으아아악!”
“……헤겔 씨, 그쪽이나 잘 잡으세요.”
미렌의 손을 단단히 잡아 주느라 제 앞을 보지 못하던 헤겔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해 발을 뻗었다가 휘청거렸다.
그런 그의 허리를 뒤에서 꽉 잡아 준 것은 미렌이었다.
한심하다는 눈길을 받으며 중심을 잡은 헤겔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고목이 단단해 둘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넌 대체 왜 나무 타기도 잘하는 건데?”
“그야 어렸을 때 놀 거라곤 이런 거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헤겔 씨보다 제가 몸무게가 가벼우니 당연히 더 유리한데요.”
“……난 이런 거 못해도 돼. 마법사잖아.”
“아, 위대하신 남쪽 마법사요?”
미렌의 영혼 없는 중얼거림에 헤겔이 번뜩 그녀를 노려봤다.
물론 미렌은 모른 척 그 시선을 피했다.
“너 멀미 날까 봐 안 하려고 했는데.”
“뭘요?”
“워프 마법. 내 손 꽉 잡아. 무서우면 안아도 되고.”
워프 마법?
순간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하기도 전에 헤겔이 먼저 손을 뻗어 미렌의 두 눈을 가려 온 탓이다.
그의 커다란 손 하나가 눈 위에 덮어졌다.
또한 헤겔의 반대편 손은 미렌의 허리에 둘렸다.
꼭 큰 흔들림이 다가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는 듯이 단단하게.
미렌이 이게 뭐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거대한 풍랑을 만난 배에 탄 것처럼 발밑이 거세게 흔들렸다.
꼭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감각에 미렌 또한 헤겔의 옷을 꽉 틀어쥘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얼마 가지 않아 잠잠해지자 헤겔이 그녀의 눈 위에 덮어 뒀던 손을 떼어 냈다.
“봐. 난 나무 같은 거, 우욱……. 못 타도 상관없다니까.”
눈앞에 있는 것은 영주 성이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공간이 변한 것이다.
미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굳이 나무를 탈 필요도 없었잖아요?”
“근데 이거 멀미가 장난 아니……. 웨엑.”
“아, 내가 아니라 본인이 멀미가 심해서.”
옆에 있는 나무를 짚은 헤겔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자신이 마법을 하고도 멀미를 하는 놀라운 상황에 미렌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어쩐지 훨씬 편한 방법을 선택 안 하더라니.
오히려 처음 워프 마법을 겪어 본 미렌이 더 멀쩡할 정도였다.
헤겔은 그 뒤로도 10분간 헛구역질을 해 댔다. 미렌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두드려 줄 뿐이었다.
“참……. 근데 왜 제 눈을 가리세요. 본인 눈이나 가릴 것이지.”
“욱, 욱……. 하아. 너는 처음이잖아.”
“예?”
“나야 눈 감으면 되지만 너는 이런 거 처음일 텐데 놀라면 어떡하냐고.”
아, 됐어. 쓸데없는 거 그만 물어.
입을 닦아 낸 헤겔이 그제야 멀쩡해졌는지 벌떡 일어나 앞서갔다.
영문도 모른 채 혼자 남은 미렌이 뒤늦게 그를 따라가야만 했다.
한밤중의 영주 성은 기묘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곳곳에 불이 켜진 것을 보면 안에 있는 이들 중 잠이 든 사람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올라오스부터 찾아야겠습니다.”
“아, 그건 걱정 마. 내가 마법으로 추적기를 달아 뒀으니까. ……그것보다.”
“헤겔 씨?”
미렌의 귓가에 헤겔의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그녀는 제 몸이 투명하게 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요?”
“기본적인 거야.”
가볍게 내뱉은 헤겔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매번 체력이 부족해 헉헉거리던 헤겔은 오간 데 없이 익숙하게 미렌을 이끄는 남자만이 있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의외라는 듯 바라보던 미렌도 곧 이올라오스를 찾아다니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
“잠깐만요!”
“왜? 무슨 일인데?”
복도를 걸어가던 미렌이 뒤를 돌아봤다.
방금 그녀의 옆으로 어딘지 어두운 인상의 시종이 한 명 지나간 참이었다.
뒤쪽엔 칙칙한 분위기의 시종이 저 멀리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는 은신한 헤겔과 미렌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상해서요. 저 사람, 뭔가……. 일부러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는 것 같은데…….”
“어깨를? 잠시만. 뭐야, 방금 이올라오스가 옆을 지나갔잖아.”
헤겔의 말에 순간 둘의 눈이 부딪쳤다.
넓은 복도에서 방금 전 그들을 지나친 이라곤 그 시종뿐이었다.
둘은 방향을 바꿔 시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금발 머리에 넓은 어깨를 가졌던 이올라오스라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왜소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이올라오스는 마침내 영주의 집무실 앞에 섰다.
이올라오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미렌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헤겔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안 돼. 저놈은 기사라 우리가 들어갔다간 바로 눈치챌걸. 지금까지 안 들킨 것도 기적이야.”
“무슨 내용을 조사하는 건지 알아야 해요.”
이올라오스가 대체 무슨 명을 받고 이곳에 온 건지가 궁금했다.
미렌이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새 이올라오스가 방 밖으로 나왔다.
헤겔이 그것을 턱짓하며 그녀의 어깨를 놓아줬다.
“지금 가서 확인하면 되지. 들어가자.”
“확인이요? 분명 깔끔히 뒤처리하고 왔을 텐데.”
헤겔은 아무 말도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쿵, 집무실 문을 닫자 불이 꺼진 그곳엔 오로지 달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렌의 예상대로 이올라오스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뒤였다.
그럼에도 헤겔은 주변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찾았다.”
“예? 뭘요?”
“봐. 카펫의 방향이 미묘하게 다르지. 책상 앞으로 간 거야.”
집무실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융털로 만들어진 카펫이 깔려 있었다.
헤겔의 말대로 어두운 방 안에서 자세히 그것을 바라보자 희미하게 사람의 발자국만큼 융털 방향이 뒤집힌 게 보였다.
업무가 끝난 집무실은 시종들이 와서 청소를 한 번 했을 테니 누군가의 흔적이 남을 일이라곤 이올라오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린 책상 서랍을 가장 만지기 좋은 위치고……. 여기. 열쇠를 꽂는 부분만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이 정도 금속은 지금쯤 엄청 차가워야 하잖아.”
헤겔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추리를 이어 갔다. 미렌이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편지로 보이는 종이 몇 개가 담겨 있었다.
집어 든 미렌이 달빛에 의지해 글씨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곧 추가 인원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머지않아 공작 각하가 되실 당신을 위해서.”
“공작? 여기에 공작이……. 미렌, 잠깐.”
헤겔이 다급하게 미렌으로부터 종이를 빼앗아 책상 서랍을 닫았다.
덩달아 초조해진 미렌도 주변을 살피자 저 멀리 방 밖에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올라오스가 했던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분주히 모든 것을 정리했을 때였다.
벌컥.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흐응.”
때마침 헤겔의 손가락이 부딪치며 은신 마법이 속행됐다.
들어온 이는 미렌도 아는 이였다.
얼마 전, 그녀를 잡아다 강제로 추행을 하려 들었던 살찐 영주.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영주의 모습에 미렌이 순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잊고 있던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 탓이었다.
“흐음. 달콤한 냄새가 나네.”
“…….”
“꼭 얼마 전에 놓친 그 아이처럼.”
집무실 책상 위를 뒤지던 영주가 중얼거리듯 떠들었다.
그에 미렌의 얼굴이 더욱 굳어 갔다.
그것을 눈치챈 건 헤겔이었다.
헤겔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입만 뻐끔대어 ‘왜 그러냐’고 물어 왔다.
미렌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렌의 그런 반응이 우습게도 영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분홍 머리가 참 예뻤는데…….”
“뭐? 이 돼지 새끼가, 뭐라고?”
“흐억!”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영주가 두리번거렸다.
당연했다. 헤겔과 미렌은 은신 마법을 걸어 둔 상태라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놀란 미렌이 신속히 헤겔을 말려 보려 했지만 이미 헤겔은 눈이 뒤집힌 뒤였다.
영주의 앞까지 걸어간 그가 단숨에 멱살을 잡아챘다.
“야.”
“뭐, 뭐야! 누, 누누, 누구냐!”
“헤겔 씨! 지금 우리 숨어 들어온 거란 말입니다!”
상황이 엉망이었다.
헤겔은 은신 마법도 풀지 않고 영주의 몸을 들어 올린 덕분에 그는 허공에 떠올라 발길질을 해 댔고, 미렌은 당황해 헤겔의 옆으로 다가갔다.
“헤겔 씨, 일단 그거 내려 두고 우리 도망갑시다. 예? 곧 기사들이……!”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여기 침입자가 있다! 침입자가 있어!”
미렌이 어서 도망가자며 헤겔의 팔을 흔드는 사이 영주는 멱살에서 탈출하기 위해 육중한 제 몸을 뒤흔들었다.
그곳에서 오로지 헤겔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헤겔은 미렌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비스듬히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난 이런 거 못 참아.”
살면서 눈치라곤 조금도 본 적이 없는 남자.
위대한 남쪽 마법사.
헤겔 카르너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미친놈’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