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다
아르테미스 탓에 연거푸 물을 마셔 입 안을 잠재운 미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입 안이 썼다.
옆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던 라이언이 다시 물 잔을 받았다.
황실에서 쓰는 식기들은 대개 고급스러운 장식이 되어 있는 터라 그녀의 뼈밖에 남지 않은 손목으로 오래 들고 있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언은 분주하게 침대 위를 정리했다.
베개며 이불을 매만져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만든 그는 황제라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애처가였다.
“라이언,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요즈음엔 다행히 몸이 좋아져서요.”
“뭐? 그게 사실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에 라이언의 눈이 커졌다.
그가 작게 입을 벌리자 미렌은 미약하게 웃으며 침대 위에 올라온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혹시나 싶어 함부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주치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그저 제 기분이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보다는 조금 더 움직이기 수월한 느낌이라…….”
혹, 내가 건강하지 않기를 바랐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건강하길 바라 왔는데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라이언의 눈치를 보게 될 때였다.
“미렌.”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라이언이 팔을 뻗어 미렌의 어깨를 감싸 왔다.
그의 너른 품속으로 다정하게 안긴 미렌이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머리 위에서 라이언의 애정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약한 힘을 들이며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라이언.”
“당신이 건강해져서, 정말…… 다행이야.”
껴안느라 라이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하는 그의 호흡은 몸이 좋지 않은 미렌보다도 더 떨리고 있었다.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겠는 사람처럼 그의 손마저도 얕게 떨렸다.
문득 라이언이 미렌의 어깨에 제 고개를 기댔다.
“이상하지. 분명 지금은 행복하기만 해야 하는데…….”
“…….”
“이 행복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두려워.”
내가 많이 나약해진 모양이야.
가늘게 살아온 미렌 에드가의 인생에서 그녀의 건강이 좋아진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조차도 모두 그나마 희망이 있던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 라이언을 만나고서는 조금이라도 나아진 적이 없었다.
잠시 동안 서로의 사이로 침묵이 오갔다.
생각에 잠겼던 미렌은 유독 오늘따라 낮은 방의 기온에 힐끗,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시작이었다.
“라이언.”
“……응.”
“나는…… 당신의 다음 여름까지 보고 싶습니다.”
라이언은 무언가를 참아 내는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터라 행여나 제 손길이 거칠어질까 두려워 꾹 눌러야만 했다.
“사실 다음 여름뿐 아니라.”
“미렌, 그만. 더는 말하지 마…….”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모든 계절을 보고 싶어요.”
여름에는 함께 복숭아를 먹고.
가을이 되면 비가 오기를 바라고.
겨울이 되면 같이 눈을 맞고.
다시 봄이 찾아오면 다음 여름을 기다리고…….
욕심이었다.
고작 몸의 기운이 조금 좋아진 것만으로도 그의 모든 생을 보고 싶다니.
제 몸 상태를 아는 누군가가 들었다간 코웃음을 치고 말 것이다.
“당신의 한 계절만 가져가고 싶었는데.”
염치도 없이 욕심이 나네요.
그 말에 미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던 라이언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말해 주고 싶었다.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은 당신이 아닌 자신이라고.
분명 처음 그녀로부터 제안을 받을 때만 해도, 그거면 되었다고. 이것으로 만족하겠노라고.
그리 생각했던 라이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한번 성큼 자라기 시작한 욕심은 끝을 모르고 커져 갔다.
라이언은 미렌이 겁내지 않도록 자신의 온 마음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재촉해 자신을 더 욕심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참아 내고 인내해야만 미렌이 먼저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터였다.
그는 그렇게 미렌을 집어삼키기로 결심했다.
그때였다. 문득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초조하게 들리는 애들러의 것이었다.
“폐하, 다급히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런데 애들러로부터 당장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황제의 물음에 멋대로 답하지 않은 것은 중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런 애들러를 꾸짖지 않았다.
다만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감싸 안았던 미렌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당장이라도 가야 하는 듯한 라이언의 모습에 미렌이 손을 내저었다.
“급한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어서 가 보세요.”
“……미렌.”
“예, 라이언.”
“당신에게 내가……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급해 보였다.
그럼에도 당장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침대 앞에 서서 자꾸만 머뭇거렸다.
의아해진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사흘.”
“……예?”
“사흘만, 이 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 주어.”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사흘?
기간이 꼭 사흘인 것도 이상했지만 그것보다 걸리는 점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녀의 확답을 듣기 전까진 가지 않을 것처럼 굳건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렌이 망설이자 바깥에서 애들러가 한 번 더 재촉하듯 문을 두드려 왔다.
그녀는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발코니도…… 안 돼. 밤에는 내가 찾아오겠지만 그 외의 모든 시간엔 마리아가 당신의 곁을 지키게 하지.”
“이유가 무엇인데요?”
미렌이 그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라이언의 모습에 도저히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그게, 무슨.”
“폐하! 시간이 없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애들러의 목소리에 라이언이 한 발자국을 떼어 냈다.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이언은 마침내 자리를 떠났다.
쾅.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미렌은 그러고도 몇 분을 가만히 문만 바라봤다.
혼자가 된 방 안이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방 안의 모든 창문은 닫혀 바람이 들어올 새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기가 스며들자 그녀가 이불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게.”
조용히 들어온 마리아는 조금 전 그녀가 마셨던 찻잔을 챙겼다.
그 외에도 가볍게 침대 주변을 정리한 마리아가 다시금 방을 나가려 하자 미렌이 먼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리아.”
“예, 전하.”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마리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것만으로도 미렌은 지금 당장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렌이 이불을 거두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기색에 마리아가 놀라 다가왔다.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방 안에서 편히 계실 수 있도록 극진히 보살피라는…….”
“방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이잖나.”
“……전하.”
“정말, 내가 나가서는 안 되는 건가?”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녀의 자조적인 질문에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큰 소음이 들려온 탓이었다.
쿵…….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은 정원 쪽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는 순간 복도에 난 창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미렌은 저도 모르게 문가로 향했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짙은 고동색의 문 앞에 멈춰 선 그녀가 그 위를 쓸어내렸다.
마리아는 그런 미렌이 걱정스러운지 몇 걸음을 남겨 둔 채 뒤를 따라왔다.
그러다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망설이는 그녀를 보며 머뭇거리듯 말했다.
“전하.”
“…….”
“폐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전하를 위해서입니다.”
그 말에도 미렌은 그저 두 문만 바라봤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라이언과 나눴던 대화들도 스쳐 지나갔다.
‘괜한 기우였다는군. 촌장도 변함없이 잘 지내고, 마을 사람들도 그렇다고. 대신 테룬 공국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기색은 그다지 없다 했어.’
‘미렌, 나를 의심하는 건가?’
의심은 꼭 잡초 같았다.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자라나는 잡초.
또한 한번 싹이 튼 의심은 멈출 줄 모르고 그 크기를 키워 갔다.
라이언.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속으로 전한 진심에 그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오로지 미렌 혼자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미렌은 아찔해질 정도로 아파 오는 머리에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이 행복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두려워.’
‘나는…… 당신의 다음 여름까지 보고 싶습니다.’
라이언은 그녀를 사랑했다.
방 안에 있는 미렌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그 사실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이언은 언제나 그녀가 마음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미렌의 손이 움직였다.
문고리에 닿은 손가락이 그것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농작물에 피어난 잡초는 주변의 영양분을 빼앗아 간다.
한번 피어난 잡초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가 한 해의 농사를 망치기도 십상이었다.
열심히 일군 작물의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선 그걸 뿌리째 뽑아내야만 한다.
그를 사랑하기 위해선, 믿어야 했다.
그를 믿기 위해선, 모든 것을 알아야만 했다.
눈을 뜬 미렌이 결국 잡고 있던 손잡이를 밀어냈다.
육중한 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리자 그 바깥에서부터 차단되어 들려오지 않던 모든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도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저 멀리 유리창 너머의 정원을 한가득 채운 사람들이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그들이 정원 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모여 있었다.
“황후 미렌 에드가를 폐위하라!”
그곳에 있는 모두가 목소리를 모아 외쳤다.
문을 연 미렌은 그 모습을 똑똑히 바라봐야만 했다.
뒤에서 마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 또한 선명히 들려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쿵. 쿵. 쿵…….
멍한 머리와 달리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한 손으로 심장을 잡아 쥐어짜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올라왔다.
미렌 에드가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