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이 트다
“뭐야. 영주 성이 아니라 여관으로 가는데?”
끈질기게 이올라오스를 추적하고 있었다.
헤겔의 말대로 영주 성이 아닌 여관으로 향하는 이올라오스를 발견한 미렌은 결국 자리에 멈춰 섰다.
“……복숭아 상자가 무거우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으래?”
헤겔이 놀리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이 꼭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꾹 참았다.
“근데, 궁금한 게 있거든.”
“뭔데요?”
이올라오스가 자리를 비우자 시간이 남은 둘은 여관 앞 구석진 곳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물론 모두 헤겔이 질문을 던지고 미렌이 귀찮은 듯 대답을 해 주는 형식이었다.
“대체 어떻게 황후가 되는 거야?”
“……꿈을 꾸면 에드가 황후가 됩니다.”
“꿈? 잠자면 꾸는, 그 꿈?”
“예. 그래서 저는 잠을 자 본 적이 없어요. 잠을 자면 바로 반대편 몸으로 넘어가 버리니까.”
“그럼 피곤하진 않고? 자다가 갑자기 깨우면…….”
“헤겔 씨, 쉿.”
헤겔이 본격적으로 질문을 하려던 때였다.
좀 전에 여관 건물로 들어갔던 이올라오스가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뒤따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헤겔도 미렌의 옆을 차지했다.
방향을 대충 가늠해 보니 영주 성인 것 같았다.
그렇게 당연히 이올라오스가 곧장 영주 성으로 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막상 도착한 곳은.
“……대장간?”
대장간 앞에 선 미렌이 오래된 나무 간판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안쪽에서 이올라오스와 대장장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격을 흥정하는 모양이었다.
미렌이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장 일을 진행해도 빠듯할 것 같은데 이올라오스가 영주 성으로 향하지는 않고 자꾸만 딴 길로 새니 답답했다.
헤겔이 옆에서 눈치껏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곧 가겠지. 좀 기다려 봐.”
“……알겠어요.”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영주 성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마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결국 영주 성에 가기도 전에 마을은 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슬슬 어둑어둑해지는 주변에 미렌이 눈썹을 모았다.
이올라오스가 딴 길로 새기 시작한 시점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터라 헤겔이 넌지시 그녀에게 말했다.
“밤부터 활동할 건가 보네. 황제 폐하의 특사라는 게 무릇 그렇지.”
그 말에 미렌도 수긍했다.
잠자코 이올라오스의 뒤를 따라다니자 저 어두운 너머로 그가 어딘가로 향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그가 머무는 여관이었다.
쾅.
여관 건물의 대문이 부서질 정도로 거세게 닫혔다.
그 앞 언저리에 서 있던 미렌이 넋을 놓고 대문을 바라봤다.
헤겔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야, 진짜 조사하러 온 거 맞는 거야? 아닌 것 같은데.”
“라이언이 그랬습니다. 이상한 점이 있어서 명령을 내렸다고요.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왜? 황제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미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발끈한 건 오히려 헤겔이었다.
“왜 그럴 리가 없어? 너희 정략결혼으로 만났잖아. 에드가 공작이 널 팔아넘겼다는 소문이 자자한……!”
“…….”
“……미안.”
미렌 에드가의 결혼은 유명했다.
권력에 미친 에드가 공작이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그 결혼을 추진했다는 이야기가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돌아 다녔다.
그때는 분명 그랬다.
별관에 버려지듯 존재하던 미렌에게 어느 날 찾아온 에드가 공작은 일방적으로 그녀의 약혼식 날짜를 통보했다.
그래서 미렌은 약혼식 날 처음으로 황제의 얼굴을 보았고, 라이언과 결혼했다.
그러다 공작이 죽었다.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은 에드가 공작에 떠맡겨지듯 결혼한 미렌의 위치가 점점 낮아지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팔리듯 결혼한 황후.
끈조차 떨어져 버린, 시한부 황후.
이쯤 되니 헤겔이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헤겔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정략결혼으로 만난 황제의 말을 어째서 믿느냐고.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뭐?”
“라이언과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고요.”
문득 고개를 들자 어느새 떠오른 달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미렌이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결국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이만 자러 가야겠습니다. 헤겔 씨도…… 이만 쉬세요.”
“야.”
머뭇거리던 헤겔이 그녀를 불렀다.
앞서가던 미렌이 의아한 듯 뒤돌자 헤겔이 멋쩍게 제 볼을 긁었다.
그러다 겨우 그가 툭, 진심을 털어놓았다.
“조금만 더 늦게 자.”
응?
***
저려 오는 팔다리, 희미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고통까지.
미렌 에드가로 깨어난 그녀가 슬며시 눈을 떴다.
머리에선 아직 헤겔을 벗어나지 못한 터였다.
조금만 더 늦게 자라며 미렌을 조르던 헤겔을 무시하고 그녀는 결국 잠이 들었다.
전날 밤 본 라이언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기에 오늘은 일찍 그를 만날 생각인 탓이었다.
그래도 이상하지.
집 앞까지 따라온 헤겔은 끈덕지게 미렌을 말렸다.
조금만 더 늦게 자면 안 되겠냐고.
결국 끝까지 단호하게 거절하는 미렌에게 화가 난 듯 돌아가 버렸다.
……일어나면, 사과할까?
헤겔 때문에 멍하니 천장이나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볼에 뜨거운 손길이 닿아 왔다.
라이언의 향기였다.
“미렌, 일어나자마자 무슨 생각을 그리해.”
그녀의 허리를 감싼 라이언이 부드럽게 미렌을 일으켜 주었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고 앉은 미렌이 문득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라이언은 오로지 미렌을 일으켜 주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라이언이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심장 한편이 간지러워졌다.
라이언은 그런 사내였다.
눈길 한번에도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분위기에서 모두 들통나 버리는.
그런 라이언이 거짓말을 했다고?
“라이언.”
“응, 미렌. 목이 마른가? 물이 조금 식었어. 시녀들에게 따뜻한 물을 다시 가져오라 명하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그런데.”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 잔을 들었다 놓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라이언은 미렌의 말에 그것을 내려 뒀다.
대신 그녀의 옆에 앉아 미렌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프레니티 영지로 내려가신 기사님은, 어떻습니까?”
“유독 그 일에 관심이 많군.”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요.”
그럴 수 있지. 라이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덜컹.
문득 라이언이 침대 위로 온전히 올라왔다.
그러느라 침대가 흔들린 탓에 미렌은 침대 위 시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가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덮었다.
라이언의 큼직한 손에 가리어져 미렌의 손은 손톱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했다는군.”
“예?”
“곧 돌아온다는 모양이야. 아, 당신의 복숭아도 챙겼다지.”
대체, 언제?
여관으로 들어가는 이올라오스의 뒷모습을 확인한 게 대략 30분 전이었다.
오늘 하루 내내 관찰한 그는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다. 30분 만에 조사를 마칠 리도 없었다.
그런데 임무를 완수했다고?
미렌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침을 한번 삼킨 그녀가 이윽고 질문을 던졌다.
“프레니티 영지는…… 어떻다고 합니까?”
“괜한 기우였다는군. 촌장도 변함없이 잘 지내고, 마을 사람들도 그렇다고. 대신 테룬 공국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기색은 그다지 없다 했어.”
이상해.
촌장님은 그때 영주에게 얻어맞은 탓에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계셨다.
건강이 악화된 것은 물론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구 공방을 열지 않은 지가 며칠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과 비슷하지만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조금만 알아봐도 알 수 있는 흔적들일 터였다.
미렌이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등 위로 손을 얹고 있던 라이언도 그것을 느끼곤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미렌은 라이언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정말 조사를 명하셨습니까?”
“……미렌, 갑자기 왜…….”
“그 기사에게 프레니티 영지에 대한 조사를 명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어조는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추궁당한 라이언이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로 기묘한 침묵이 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언이 그녀의 손을 꾹 눌러 왔다.
뼈밖에 남지 않은 손임을 알기에 힘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간절한 손길로.
“미렌, 나를 의심하는 건가?”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었다.
이윽고 라이언의 두 눈을 바라보던 미렌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순간.
라이언의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라이언…….”
처량한 그 눈물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잡히지 않은 빈손을 들었다.
그의 볼에 닿은 그녀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자 라이언이 눈을 내리감았다.
“내가 미안해.”
“라이언?”
“당신이 나를 의심했다면 나의 잘못이겠지. 신뢰를 주지 못한 내 탓이야. ……하지만 미렌, 이것 하나만 알아줘. 나는 당신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
감았던 라이언의 눈이 뜨였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믿어 달라는 듯 미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미렌의 손을 움켜쥔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기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렌은 결국 참지 못하고 팔을 뻗었다.
조그만 초식 동물처럼 울먹거리는 라이언의 모습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라이언을 제 품 안에 넣고 느릿하게 등을 토닥였다.
물론 미렌의 몸으로는 라이언을 모두 감싸 안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조그만 품 안에 제 몸을 욱여넣고 있는 힘껏 어깨를 구겼다.
“아닙니다, 라이언. 내가…… 내가 의심해서 미안해요.”
아직도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안쓰러워 미렌은 자꾸만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얼마간 그러고 있은 다음에야 라이언이 안정을 되찾았다.
라이언, 그는 꼭 미렌의 사랑을 먹고 사는 이 같았다.
평소대로 돌아온 라이언이 겨우 미렌의 품에서 벗어났다.
대신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그의 가슴팍에 뺨을 부딪친 미렌이 눈을 깜빡거렸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면, 이올라오스에게 다시 한번 조사를 명하도록 할게. 미렌, 그러니, 그러니 제발……. 제발 나를 버리지 마.”
“……라이언, 당신을 버리다니요.”
“당신이 그랬다간 나는 무너지고 말아.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대로 행할 테니…… 응?”
라이언의 품에 안긴 미렌은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대신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매만져 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에게 안겨 있었을까.
미렌은 라이언의 어깨 너머로 조심스럽게 방 안에 들어오는 마리아를 발견했다.
시계를 보니 아르테미스를 복용할 때였다.
침대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 둔 마리아가 말없이 눈으로 인사를 전해 왔다.
그리고 몇 발짝 물러서 다시 방을 나갔다.
“벌써 약을 먹을 때인가.”
“마리아가 온 걸 들으셨습니까?”
모두 라이언의 등 뒤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미렌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침대에서 일어난 라이언이 마리아가 두고 나간 찻잔을 가져왔다.
“내가 명해 두었어. 어떤 일이 있고 간에 아르테미스를 먹을 때가 되면 들어오라고.”
그가 건넨 찻잔을 받아 든 미렌이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삼켜 냈지만 쓴맛은 어쩔 수가 없어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라이언이 웃으며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건넸다.
“당신이 어서 건강해졌으면 좋겠어.”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효과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더군. 그래도,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매달리고 말 테지.”
당신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 할까.
라이언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 구는 그를 바라보며 미렌은 입을 다물었다.
라이언을 향해 싹튼 의심.
그 의심이 미렌을 자꾸만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