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4)화 (24/133)

그곳으로 가면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왜 여기 있긴.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 있지.”

“일단 이것부터 내려놓으세요. 허리 아픕니다!”

미렌이 제 허리를 잡은 헤겔의 손을 철썩 내려쳤다.

그가 막무가내로 들어 올린 통에 꽉 잡힌 허리가 무척이나 아팠다.

손등을 맞은 헤겔이 샐쭉거리며 결국 그녀를 아래에 내려 뒀다.

뒤로 돌아선 미렌이 그를 올려다보자 헤겔이 신기한 생명체라도 만지듯 미렌의 볼을 쿡쿡 찔렀다.

“너 여기선 건강하네.”

“……말했잖아요. 병 하나 없이 건강한 몸이라고요.”

덥석.

미렌의 손목을 잡은 헤겔이 유난스럽게 주물럭거렸다.

애완 토끼가 건강한지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에 미렌이 눈썹을 까닥였다.

헤겔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로 중얼거렸다.

“응, 거기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아서 걱…….”

“미렌 우드 씨?”

난데없이 헤겔과의 대화를 뚫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헤겔만큼이나 키가 큰 상대의 모습에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머리 뒤에서 햇볕이 내리쬐었다.

샛노란 금발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그녀와 헤겔을 동시에 바라봤다.

“댁에서 복숭아를 파신다면서요?”

“……이제 곧 겨울이라 많이 남아있지 않아요. 얼마나 사시려고요?”

“현재 남아 있는 것 전부?”

남자가 쑥스럽다는 듯 제 뒷머리를 매만졌다.

“제가 먹을 건 아니고요. 선물로 사 갈 생각입니다.”

“아, 예. 일단 저희 집으로 가실까요.”

“야, 토끼. 너 이 남자랑 아는 사이야? 아까 전엔 왜 그렇게…… 읍.”

눈치 없이 주절거리던 헤겔이 미렌에게 입이 막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렌은 남자에겐 보이지 않도록 헤겔에게만 와락 찌푸린 얼굴을 보여 주며 입을 다물 것을 종용했다.

헤겔과 미렌의 미묘한 관계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헤겔 카르너?”

“뭐야. 당신 나 알아?”

“모를 리가요. 얼마 전에 황궁에 오셨잖습니까?”

“황궁? ……아. 당신 황실에서 온 기사인가?”

“예, 폐하의 직속 기사단 제1 소속 이올라오스 트리온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법사님.”

흐음.

팔짱을 낀 채 이올라오스를 내려다보던 헤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 팔뚝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리고서 입을 열었다.

“이올라오스? 내가 아는, 그 이올라오스 말인가?”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사단에 이올라오스라는 이름은 저뿐입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 이올라오스가 어째서 여기까지 왔냐는 말이야. 이런 시골 지방까지, 직접?”

헤겔의 어조에는 다분히 의심하는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미렌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눈으로는 대체 뭐 하세요, 라는 질문을 가득 담아서.

그사이 이올라오스가 눈을 찡긋거리며 가볍게 웃어 왔다.

“폐하의 명입니다.”

“폐하? 그가 네게 제 곁을 떠나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상한데…….”

무언가 해소되지 않았는지 헤겔이 중얼거리자 미렌이 이번엔 그의 손목을 강하게 쥐고 앞서 나갔다.

이대로 있다간 이올라오스에게 괜한 시선만 받을 터였다.

그녀가 손목을 잡고 앞서 나가자 그대로 당겨진 헤겔은 순순히 미렌을 따라갔다.

아직 뒤에서 순수하게 웃고 있는 이올라오스와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미렌이 속닥이듯 말했다.

“뭘 자꾸 물으십니까? 그냥 조용히 넘어가요.”

“아니, 이상하잖아. 황제가 ‘그’ 이올라오스를 여기까지 보낸다는 게. 안 그래?”

“저 기사가 유명하신 분입니까? 신임받는 기사라면 폐하께서 보내셨을 수도 있죠.”

“흐음.”

헤겔과 미렌이 앞에서 쑥덕거리자 이올라오스가 성큼 따라오기 시작했다.

방향은 물론 복숭아를 키우는 우드네의 밭이었다.

“복숭아가 많이 남아 있습니까?”

“아, 좋은 거 많아요. 밭으로 가서 한번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래요. 따라가겠습니다. 저, 그런데…….”

이올라오스로부터 연이어 질문이 들려오지 않자 미렌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뒤로 돌자 그가 무언가 걸린다는 듯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위대한 남쪽 마법사께선 이곳에 무슨 일이십니까?”

“위…… 뭐요?”

“위대한 남쪽 마법사. 나 말하는 거네.”

“당신이요?”

의기양양해진 헤겔이 어깨를 넓게 펴자 미렌이 떨떠름하게 그의 손목을 놓았다.

헤겔이 대마법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입으로 그 사실을 듣자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놓자 이번엔 헤겔이 미렌의 손을 잡아 왔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손목을 잡고 있었다면, 이번엔 깍지 낀 채 직접 맞잡은 것이었다.

헤겔은 그 상태로 뻔뻔하게 말했다.

“여기서 키우는 토끼가 있어서.”

“아니, 이 새X가…….”

“뭐?”

그 뒤부터 미렌과 헤겔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이올라오스가 그 모습을 보며 종종 미소를 지을 정도로, 친근하게.

***

“혼자 다 들고 갈 수 있으십니까?”

“그럼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숭아가 가득 담긴 상자를 품 안에 넣은 이올라오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분명 직속 기사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의 순수해 보이는 미소와 더불어 헤겔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굵지 않은 손목을 보고 있자면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렌이 헤겔에게 마법으로 그를 도와주라며 눈치를 줬지만 헤겔은 눈동자를 굴리며 모른 척했다.

미렌의 농사를 도와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추가 요금을 내시면 상자를 묵으시는 숙소로 옮겨 드릴 수도 있는데. 해 드릴까요?”

“예? 아닙니다, 제법 무겁잖습니까.”

“아, 제가 옮기는 건 아니고 옆에 있는 이 사람이 할 겁니다.”

“……내가?”

지목당한 헤겔이 눈을 크게 뜨며 제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미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올라오스가 눈물까지 찔끔 흘릴 정도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두 분, 엄청 잘 어울리십니다.”

“설마요.”

“그렇지? 내가 워낙 예쁘고 얜 워낙 건강하게 생겼잖아. 나랑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익숙하게 헤겔의 말을 무시한 미렌이 이올라오스에게 다가갔다.

정말 헤겔을 시켜 옮길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손이나 보태 줄 생각이었다.

그러자 이올라오스가 성큼 물러섰다.

“도움을 주셔서 기쁘지만 괜찮습니다. 이건 황후 전하께서 드실 음식이라 제가 직접 옮겨야 해서요.”

어색하게 빈손이 되어 버린 미렌에게 이올라오스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대답은 미렌 대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헤겔로부터 나왔다.

“호오. 황후 전하께서 드실 복숭아라. 그걸 이올라오스가 가지러 왔다고.”

어딘지 이죽거리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헤겔의 얼굴 위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지목당한 이올라오스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돌아섰다.

미렌이 다시 헤겔에게 다가가자 그가 제 손바닥을 입가에 붙이며 속삭여 왔다.

“너 이렇게 황실을 상대로 불법 장사를 해도 되는 거냐? 어?”

“……제가 명령한 거 아닌데요.”

“이게 거짓말까지 하네.”

미렌은 익숙하게 헤겔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떠나려는 이올라오스를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저, 기사님. 정말 이곳에 복숭아만 사러 오신 겁니까?”

아닐 텐데.

라이언의 명령으로 프레니티 영지를 조사하러 왔을 터였다.

분명 라이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올라오스가 협조를 요청한다면 그녀가 직접 증언을 해 줄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 초조하게 그를 불렀을 때였다.

복숭아 상자를 안고 가던 이올라오스가 헤겔과 미렌을 향해 뒤를 돌아보더니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깊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저는 복숭아를 사러 이곳까지 왔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이올라오스는 결국 자리를 떠났다.

황망하게 남은 미렌만이 어쩌지도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이올라오스가 복숭아를 사러 여기까지 오는 게 말이 되냐?”

“아까 전부터 그러시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올라오스잖아. 황제 폐하의 유일한 친우.”

“……친우요?”

라이언의 친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제껏 미렌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전면적으로 나선 적이 없었기에 이렇다 할 소식을 들을 곳이 없는 탓이었다.

“어. 저 나이에 기사단장이 되었잖아. 함께 전쟁터를 구른 전우라지.”

“아……. 10년 전 황자의 난 때군요.”

“그래. 그런데 저 이올라오스가 고작 복숭아를 사러 여기까지 온다고? 기사단 이끌고 수도 치안 신경 쓰느라 바빠 죽을 저놈이?”

헤겔이 어딘가 미심쩍다는 듯 말하자 결국 미렌이 그의 생각을 막아섰다.

“복숭아를 사러 온 건 아니고, 프레니티 영지를 조사하러 왔을 겁니다. 요즘 이 근방이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한데?”

“말하자면 긴데……. 축약하자면 이곳 영주가 서류를 빼돌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걸 라이언에게 말했고요.”

곰곰이 미렌의 말을 듣던 헤겔이 ‘그래도 이상해.’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대해 말을 덧붙이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너는 그걸 바로잡고 싶은 거고?”

“그렇죠. 자칫하면 프레니티 영지민들이 테룬 공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어서요.”

“좋은 거 아니야? 고향이 테룬 공국인 사람들이잖아. 너도 거기로 가면…….”

“여기서 먹고사는 사람들한테 터전을 버리고 떠나라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어딘지 떠보는 듯 말하던 헤겔은 미렌의 싸늘한 대답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의 반응에 의아해진 것은 미렌이었다.

헤겔이 있을 남쪽 마탑은 프레니티 영지보다도 수도에 더 가까이 있었다.

사실 그는 프레니티 영지와도 관련이 없을 텐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냐. 됐어.”

헤겔의 떨떠름한 반응에 그를 힐끗 바라봤던 미렌은 개의치 않고 이올라오스가 걸어간 방향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올라오스가 제대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은근슬쩍 미렌의 옆에 붙어 가던 헤겔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일단 영주 성으로 가는 것까지 확인을 해 보고……. 조사를 하는 걸 몰래 도와 드려야죠.”

“몰래? 대놓고는 안 되나?”

“그랬다가 괜한 의심 받으면 안 되니까요.”

저 멀리 앞서가던 이올라오스가 문득 멈춰 섰다.

곧바로 뒤돌아볼 기색에 미렌이 이번에도 헤겔의 손목을 잡고 옆에 있는 나무로 숨어들었다.

꼭 미행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헤겔은 이번에도 순순히 그녀에게 잡힌 채 미렌을 내려다봤다.

이올라오스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미렌은 고개를 빼꼼 내민 채였다.

나무 뒤에 숨어든 헤겔과 미렌의 거리가 무척이나 좁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헤겔이 제 손목을 잡은 미렌의 조그만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떨쳐 내려면 얼마든지 떨쳐 낼 수 있는 그 조그만 손길에도 헤겔은 움직이지 못했다.

문득 방금 전 못다 한 말이 떠올랐다.

‘너도 거기로 가면…….’

거기서는, 황후가 아닐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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