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오징어
라이언은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내내 웃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행복해 어쩔 줄 모르는 남자처럼 그는 복숭아를 먹는 미렌을 그저 바라만 봤다.
복숭아를 먹던 미렌은 어쩐지 혼자만 먹는 것 같아 과일 한 조각을 포크에 꽂아 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느라 식사 시간은 한없이 길어졌다.
아침 해가 뜬 뒤부터 시작했던 식사가 어느새 오전이 지나가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식사부터 다과까지, 대화를 곁들여 하다 보니 늘어진 탓이다.
앉아 있는 미렌의 등 뒤로 햇빛이 비치며 그림자가 졌다.
그것을 발견한 라이언이 배부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자꾸 그렇게 웃으십니까?”
“……낮에 일어난 당신을 보는 게 어색해서.”
미렌의 등 뒤에서 들어오는 만큼 마주 앉은 라이언에겐 햇빛이 눈부실 터였다.
시종 중 한 명이 커튼을 치려 움직이자 라이언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햇빛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줄은 알지 못했어.”
밝은 빛이 들어온 탓에 새하얗게 질린 미렌의 모습은 사실 아름답기보다도 곧 바스러질 것처럼 유약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라이언은 온 얼굴을 붉히며 당장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도 쑥스러워했다.
라이언이 자꾸만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은근히 시선을 피하자 그녀도 결국 웃고야 말았다.
아무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고작 몇 달 되지 않았다지만, 결혼한 지 무려 8년이 된 부부였다.
아직까지도 설렌다는 라이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제 마음도 괜히 간질거렸다.
“미렌, 이만 일어나서 산책을 나갈까.”
“아……. 라이언, 이제 그만 업무를 보러 가셔야죠.”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아. 당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낮에 일어나있는 건 오랜만이니까. 그렇지, 애들러?”
문득 이름이 불린 애들러가 눈을 크게 치떴다.
그가 힐끗 돌아보자 애들러는 떨떠름한 얼굴로 조그맣게 ‘예’라고 대답해 왔다.
물론 물어보는 라이언도, 지켜보는 미렌도 그 대답에 영혼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이 그리 여유로울 리가 없었다.
라이언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만으로도 미렌은 고마웠다.
“라이언.”
“응.”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던 탓인지 슬슬 몸이 무거워졌다.
어쩔 수 없이 숨을 몰아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 미렌이 다소 힘들게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인가?”
“그럼요.”
어쩐지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그녀가 몇 번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미렌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아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라이언의 얼굴 위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라이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갈 거면서.”
덜컥.
의자가 뒤로 밀리며 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 있던 시종들 사이로 움찔거리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테이블을 지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앉은 채로 잠든 미렌의 머리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그러나 라이언이 미렌의 옆에 선 순간 그의 등이 햇빛을 막아섰다.
새하얀 햇빛을 받으며 웃던 미렌은 이제 없었다.
라이언의 앞에는 그가 만든 그늘에 가려져 무방비하게 늘어진 황후만이 있을 뿐이었다.
힘이 풀린 미렌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며 순간 몸이 기울었다.
바라보던 라이언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감쌌다.
그제야 미렌은 단단한 손에 기대어 편하게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만 봤다.
그녀를 숨죽여 지켜보던 라이언은 문득 허리를 굽혔다.
이윽고 미렌의 이마에 메마른 입술이 닿았다.
굽혔던 허리를 세운 라이언이 결국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둘러 들어 올렸다.
인형처럼 안긴 미렌은 라이언에게 온몸을 맡긴 채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몇 걸음 움직인 그가 미렌을 다시금 침대에 눕혔다.
또다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결국에 더는 무엇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라이언,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언젠가의 미렌이 그러했듯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비록 그에 임하는 서로의 마음은 깊이가 다를지라도.
***
“미렌, 일어났니? 몸은. 몸은 어떠니.”
“……엄마?”
온몸이 아팠다.
미렌 에드가의 몸처럼 거동이 힘든 건 아니었지만 팔다리 곳곳이 쓰라려서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잔뜩 찌푸려야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미렌을 내려다보고 있던 건 다정한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옷 곳곳에 흙이 묻어 있는 걸 보아하니 자신이 걱정되어 밭일을 하다 말고 오신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젯밤에 늦는다 싶더라니, 아침이 되어서 이런 꼴로 돌아오고. 응?”
“그게요.”
다행히 영주는 그녀의 집까지 들이닥치진 않은 것 같았다.
어젯밤 일어났던 일들을 되짚던 미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수도에서 친구가 와서요. 술을 마시다가 넘어져서.”
“술 냄새도 안 났는데 무슨!”
“제가 아니라 친구가요. 녀석이 술 마시고 넘어졌지 뭐예요.”
“정말, 그런 거니?”
미렌의 어머니는 자못 의심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물었다.
미렌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의 허리를 감싸고선 달래셨다.
“여보, 미렌이 그렇다지 않아. 애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이야. 그럴 때도 되었지.”
“……정말 별일 없는 거지? 응?”
“그럼요. 괜찮아요, 엄마.”
아버지의 토닥임으로 어머니도 당장은 안심을 하셨는지 점심을 준비해 놓았다며 아래로 내려가셨다.
어머니를 따라 계단으로 향하셨던 아버지가 문득 계단 앞에서 뒤를 돌아봤다.
“미렌.”
“예?”
“요즘 잠이 늘었구나.”
“……제가요?”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미렌의 대답을 듣는 대신 그저 힘없이 웃은 아버지가 아래로 내려가셨다.
이불을 꾹 쥔 채 아버지가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미렌이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늘 밝기만 한 아버지께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영 마음이 좋지 못했다.
라이언과 부모님 둘 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입 안이 썼다.
자신으로서는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렌이 고개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다리가 쓰리긴 했지만 얕은 타박상이라 움직이기 힘든 건 아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아버지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렌의 공부를 봐주겠다며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미렌도 재빠르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가는 미렌의 몸짓에는 어딘지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방금 전, 아침 식사를 하던 중 라이언은 그렇게 말했다.
‘사실 기사는 이미 프레니티 영지로 보내었어. 마법사를 통해 연락하고 있으니까, 그쪽에 복숭아를 가져오라고 이야기하면 되겠지.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도착하겠군.’
라이언이 보낸 기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어젯밤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영주 성에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내려가자 오늘따라 시끌벅적한 게 느껴졌다.
5일마다 한 번씩 서는 장날이 오늘인 모양이었다.
이 시골 마을에서 타지인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미렌이 주변을 둘러보자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한쪽에 몰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래?”
“수도에서 왔다는데……. 칼을 찼으니 기사님인가?”
“히익. 누굴 잡아가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유달리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이가 보였다.
남자가 서 있는 곳은 마을에 얼마 없는 여관의 앞이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기지개를 켠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
자신이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안 모양이었다.
저자가 라이언이 보낸 기사가 맞을까.
미렌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남자가 먼발치에서 자신을 두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미렌에게도 제법 가까운 거리였다.
“저 혹시.”
“……우, 우리 말이오?”
“네. 이곳에서 가장 맛있는 복숭아를 사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이번에 프레니티 영지로 간 그에게 복숭아를 부탁해 볼까.’
분명 라이언은 그렇게 말했었다. 남자가 복숭아를 말하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가 라이언의 기사임을 알아챈 미렌이 한 발 나서서 그와 대화를 나누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궁금했던 것을 쏟아 낸 덕분이었다.
“수도에서 오셨소? 복숭아를 사러 여기까지?”
“제 상관께서 이곳의 복숭아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우드네는 출세했네. 응? 그 집 복숭아가 유달리 맛있긴 하지!”
듣고 있던 미렌도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집 복숭아가 아직도 나오나?”
“내가 듣기로는 수확이 끝났다던데.”
아직 우리 집에 보관해 둔 거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또 실패했다.
미렌이 한 발 나서려 하면 그녀보다 키가 큰 아저씨들이 먼저 몸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렌의 키가 작아서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 뒤로도 그런 식이었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사람들이 나섰고, 사람들이 떠나면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시골 마을에 드물게 온 타지 사람이라 모두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기다린 미렌은 결국 남자와 대화를 할 기회를 만들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튀어 나간 미렌이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저기요.”
“수도는 그리 별세상이라던데. 정말인가?”
“이 사람아, 도시라고 다를 게 있나!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데야.”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묻혔다.
마침내 미렌이 소리라도 지르기 위해 힘껏 목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톡톡.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남자와 대화하는 것에 집중한 미렌이 귀찮다는 듯 팔을 내저었다.
그러자 뒤에서 이번에는 톡톡톡, 하고 세 번을 두드렸다.
“아, 누굽니까! 저 진짜 할 말 있다고요!”
“뭐야. 고작 그것 때문에 그래?”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군지 생각하기도 전에 미렌의 허리가 붙들렸다.
그러고는 부웅.
키가 작아 자꾸만 남들에게 치이던 미렌의 몸이 붕 들렸다.
……누군가에게 허리를 잡혀 들어 올려졌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너 키 작아서 이러고 있었잖아. 아니야?”
고개를 돌리자 제 허리를 잡은 이의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친 헤겔은 씩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갈 곳이 있어 떠났다는 헤겔.
그가 제 옆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