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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2)화 (22/133)

우리는 서로 다르므로

미렌의 주치의가 간단하게 라이언의 손을 치료하는 동안 시립해 있던 시종들이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방 안은 미렌이 일어나고서야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라이언이 자신의 살기를 죽인 덕분이었다.

라이언의 손에 붕대가 감기자 미렌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어릴 때부터 검을 잡은 탓인지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 박여 있었다.

“왜 그랬어요.”

“……무엇이?”

“방 안이며, 라이언의 손까지요. 왜 그러셨습니까?”

미렌의 나직한 물음에 라이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는 혼을 내듯 쌀쌀맞았지만 그의 손을 잡은 손길과 눈빛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황후는 언제나 그랬다.

그녀에게 있어서 곁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몹시도 냉정했지만 한번 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속절없이 무른 이였다.

지금도 그렇다.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든 주범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저 그의 손만 걱정하고 있었다.

“……초조해서 그만.”

“잘못한 건 아십니까?”

“몹시 반성하는 중이야.”

라이언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당장 아래로 축 처졌을 터였다. 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미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다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방 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귀한 손을 다치게 하시다니요.”

눈을 끔뻑거리던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미렌이 안심하자 라이언도 짧게 웃어 왔다.

“그런데, 미렌.”

“예.”

“다음은 없어.”

“……그게 무슨.”

대답을 한 순간 그녀의 몸이 이끌리며 라이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끌려간 미렌이 엉성하게 안기자 그가 그녀를 덜컥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라이언은 그대로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독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기묘하지, 미렌. 당신에게선 왜 늘 단내가 날까.

가끔은 그 향기에 휘둘려 미렌을 제 입에 넣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이 채우지 못한 갈증이 만족스러워질까 싶었다.

그러나 그 하얀 목덜미를 막상 눈앞에 마주하면, 그저 있는 힘껏 향을 들이켜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또다시 당신이 이토록 오래 잠들었다간 내가 먼저 죽어.”

“……라이언.”

“더는 내가 버티지 못해…….”

애처로운 라이언의 목소리에 미렌은 결국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죽어 가는 몸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마저 자신의 잘못이라는 듯, 그녀는 라이언에게 미안해했다.

나의 무르디 무른 황후.

조금만 더 나를 불쌍히 여겨 줘.

라이언은 그 동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목숨을 붙잡고 싶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몸이 무어가 그리 좋은지 그는 오랫동안 미렌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있었다.

***

방 안이 수습되자 라이언은 아침 식사를 명령했다.

내도록 시간이 맞지 않아 실패한 아침 식사를 이제야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방 안으로 트레이가 밀려오며 새로 들여온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하나하나 차려졌다.

그런데 고기라곤 하나 없이 대부분이 수프나 묽게 갈아 낸 음식들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미렌이 나직이 라이언을 불렀다.

“……고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딱딱한 음식을 씹으면 무리가 갈지도 몰라. 다음번에는 먹기 편한 고기를 들여올 테니까,”

“그게 아니라.”

제 앞으로 몰린 음식 접시들을 곤란하게 바라보던 미렌이 그중 하나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라이언, 당신이 먹을 음식이 없잖아요.”

“……뭐?”

“채소보다는 고기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애들러에게.”

“애들러가?”

제 시종의 이름이 들려오자 라이언이 눈을 찌푸리며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애들러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미렌도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험악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입을 열었다.

“마리아를 시켜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 오라 했습니다.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듯하여.”

“……미렌,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예?”

테이블 위로 턱을 괸 라이언이 입가를 당겨 활짝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제법 소년처럼 보여서 미렌은 순간 눈을 끔뻑거렸다.

소년? 어디서 저런 웃음을 봤었나?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라이언이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혹스러워.”

“…….”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욱 그러해.”

라이언이 대놓고 식사를 미뤄 둔 채 그녀만 바라보자 미렌은 결국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저런 말을 대놓고 하는 라이언을 보자니 쑥스러워서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라이언의 미소가 짙어진 것은 당연했다.

결국 라이언이 먼저 눈을 떼고 식사를 시작하고서야 미렌도 스푼을 들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내게 궁금한 건 나에게 직접 묻도록 해.”

“라이언에 비해 저만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게 미안해서요.”

“그럴 필요 없어. 미렌, 당신과 나의 마음이 같다고 생각해?”

그의 스푼이 접시에 닿으며 달칵이는 소음을 냈다.

라이언의 커다란 손에 비하자면 스푼이 몹시도 작아서 꼭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미렌은 문득 라이언과 눈이 마주쳤다.

“전혀.”

“전혀……라니요.”

“조금도 같지 않아.”

한마디 내뱉은 라이언은 이윽고 수프를 떠올려 한 모금 삼켰다.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던 그가 지나가듯 툭, 내뱉었다.

“내 마음은 당신이 생각지도 못할 만큼 더러워.”

“누가 남의 마음을 두고 더럽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 미렌.”

감히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다고 하지는 말아 줘.

말을 마친 라이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식사를 이어 갔다.

그는 꼭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스쳐 가듯 말한 라이언의 마음을 그녀가 한 번 더 곱씹으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프레니티 영지에 관심이 있었지.”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라이언의 입에서 나온 프레니티 영지라는 단어를 듣자 스푼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이상한 점이요?”

“촌장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더군. 헨리 부샤드…….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촌장의 이름마저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프레니티 영지는 특수한 상황이니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서 그럴 뿐이야.”

그의 말에는 어딘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미간을 좁힌 미렌이 그 점을 콕 집어 물었다.

“한번 들은 이름을 기억하신다고요?”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단하신 겁니다.”

그제야 라이언을 칭송하는 말들이 생각났다.

누구보다 현명한 태양. 제국의 성군.

그 소문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프레니티 영지까지 퍼질 정도로 유명했다.

라이언은 누구보다도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황제였다.

“……그래서 프레니티 영지에 가 볼 생각이야.”

“라이언이…… 직접이요?”

놀란 그녀가 멈칫하자 라이언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라이언이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직속 기사단 중에서 차출해야겠지. ……설마 내가 가길 바란 건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나는 안 가. 아니, 못 가지. 이리 약한 당신을 두고 어디를 가겠다고.”

입가를 닦은 라이언이 마침내 식사를 마쳤다.

미렌도 반쯤 음식을 남기긴 했지만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서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다가온 시녀들이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접시를 치우는 시녀들 사이로 마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습에 라이언이 고개를 까닥이자, 마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미렌에게 잔을 내밀었다.

“마법사님께서 전해 주신 아르테미스입니다. 깨어 계실 때 드시는 게 좋을 듯하여…….”

마리아로부터 잔을 받은 미렌이 얼굴을 찌푸린 채 그것을 삼켜 냈다.

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모습에 라이언이 짧게 웃으며 다가오는 시녀들에게 과일을 가져오라 명했다.

이윽고 미렌이 좋아하는 복숭아가 곱게 깎여 앞에 놓였다.

라이언은 그저 접시를 밀어 주며 그녀가 먹는 것을 지켜봤다.

“미렌, 아르테미스는 잘 먹고 있는 건가?”

“……보시다시피요.”

“맛이 제법 끔찍할 거라더군.”

“헤겔……, 카르너가요?”

“그래. 기묘하지. 그 마법사는 먹어 본 적이 없을 텐데, 꼭 그런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까.”

그러고 보니 미처 헤겔을 떠올리지 못했다.

며칠 전 밤, 그에게 정체를 들키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든 뒤로 헤겔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그분이 오늘도 제 진찰을 보러 오십니까?”

“아니. 그자는 갈 곳이 있어 이만 떠난다는군. 애초부터 아르테미스를 복용해도 좋을지 진찰하기 위해 왔었으니까. ……아쉬운가?”

“아쉬울 리가요.”

미렌이 고개를 젓자 라이언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에서 실수로 헤겔을 이름으로 부른 뒤로 라이언은 헤겔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포크를 사용해 복숭아를 집어 먹자 물렁한 식감이 느껴졌다.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과즙에 미렌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 복숭아는 어디서 가져오신 겁니까?”

“음? 그 복숭아가 마음에 들어? 복숭아로 유명한 지방에서 들여왔어.”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복숭아밭은 마침 수확을 끝내 가고 있었다. 물렁한 식감은 딱딱한 우드네 복숭아와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이 시기의 복숭아는 대부분 물맛이 나고 달기가 힘들 텐데, 정말 잘 키운 복숭아네요. 맛을 보니 동쪽 지방인 것 같은데…….”

입가에 묻은 과즙을 엄지로 훔쳐 닦은 미렌이 고심하며 중얼거리자 라이언이 웃었다.

그가 먼저 포크에 조각 한 개를 더 꽂아 그녀에게 건네었다.

“정말 별걸 다 아는군. 복숭아가 그리도 좋아?”

“……아. 책으로, 많이 봐서요.”

순간 복숭아밭 주인의 딸로서 주절주절 말하던 미렌이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과즙이 잔뜩 흐르는 복숭아를 한입 더 물었다.

“단단한 복숭아는 프레니티 영지가 유명한 편이던데. 그곳에서 나오는 복숭아가 제법 맛있다더군. 다음엔 그걸 들여올까?”

“정말요? 거기가 맛있답니까?”

“그래. 아, 이번에 프레니티 영지로 간 그에게 복숭아를 부탁해 볼까.”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미렌이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눈치로 라이언을 바라봤다.

드물게 밝은 미렌의 모습에 라이언이 말없이 웃었다.

“저, 그런데 라이언.”

“말해, 미렌.”

“그래서……. 프레니티 영지에 가는 기사가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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