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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1)화 (21/133)

목줄

라이언의 붉게 충혈된 눈이 깊게 감겼다 뜨였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게 음각된 천장의 무늬는 라이언이 직접 명령을 해 새겨 넣은 것이었다.

미렌과의 약혼 전부터 그는 오랫동안 그녀의 방 안에 둘 모든 물건을 제 손으로 선택해 꾸몄다.

허투루 손댄 것 하나 없었다.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은 라이언의 손을 거쳐 결정되었으며, 미렌이 알지 못하는 조그만 것 하나까지 모두 신경을 썼다.

미렌의 아비인 에드가 공작이 죽으며 그녀가 혼자가 되었을 때부터, 늘.

미렌. 당신은 이곳에 8년간 누워 있으며 저 천장에 몇 번이나 시선을 주었을까.

못해도 기백 번은 바라봤겠지.

무심코 발을 옮기던 라이언은 제 발치에 부딪힌 물건을 내려다봤다.

그곳엔 미렌이 매일같이 사용하던 고급스러운 찻잔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방 안은 이미 엉망이었다.

테이블은 엎어져 구석을 굴러다녔으며 커튼은 반쯤 찢어져 초라하게 휘날렸다.

한쪽에는 부서진 조명이 바닥에 쏟아져 유리 조각들이 위험하게 나돌아 다녔다.

그 속에서 온전한 것이라곤 미렌의 침대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을 집어 든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얼마나 되었나.”

“……여, 열아홉 시간 되었습니다.”

대답을 한 것은 라이언의 뒤편에 있던 주름진 노인이었다.

몇 명의 시종과 시녀, 그리고 미렌의 주치의가 문 앞에 시립한 채였다.

그러나 그들은 엉망이 된 방 안을 치우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한 명이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를 모셔 온 이들이었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기다렸다.

찻잔을 바라보던 라이언의 얼굴 위로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똑바로 대답해야지. 낮에 일어났던 이십 분을 제외하고 얼마나 되었느냐?”

“스물여섯 시간입니다.”

이번 대답은 마리아로부터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잠든 것을 직접 확인한 이는 마리아인 탓이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찻잔에 금이 갔다.

얼마 가지 않아 찻잔이 깨지며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이언의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시종인 애들러의 눈이 커졌다.

놀란 애들러가 다급하게 다가가려는 찰나 라이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끼익…….

라이언의 한 손에 잡혀 있던 검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기분 나쁜 소음을 내었다.

일어선 그가 멈춰선 곳은 주치의 앞이었다.

연로한 노인이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자 라이언이 그의 어깨를 짚어 왔다.

“이대로 황후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

“이 방에 있는 자들의 목이 날아간다.”

알겠느냐?

대답을 종용하는 질문에 결국 겁먹은 주치의가 숨을 들이켜며 겨우 ‘예’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마리아와 애들러를 비롯해 방 안에 있던 모든 시종들이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라이언은 안중에도 없이 한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미렌의 침대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아는 생각했다. 괴물의 형상을 닮았노라고.

몇 시간 전, 눈이 돌아간 라이언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부쉈다.

한 번은 테이블의 다리가 부러져 황제의 눈가를 스쳐 지나가자 그의 시종장인 애들러가 조금이라도 말리기 위해 달려왔다.

이윽고 애들러의 목 옆으로 칼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 한 줌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방 안에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왔었다.

만약 그게 시종장인 애들러가 아니었다면, 머리카락이 아닌 목이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황후가…….”

미렌의 머리맡에 선 라이언은 전부터 꺼내 둔 검으로 바닥을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붉게 물든 그의 눈이 죽어 있었다.

“피곤했던 모양이야.”

그런 거지, 미렌.

주치의에게 말할 때와 달리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소름이 돋았다.

일어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이언이 손을 뻗어 미렌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려다 멈칫했다.

손이 피에 젖어 엉망이었다.

챙, 채앵…….

결국 그는 그나마 멀쩡한 반대편 손을 들었다.

그러느라 바닥을 짚은 채 서 있던 검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색소가 빠져 얇디얇은 머리카락을 만지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만지던 라이언이 문득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반쯤 침대에 올라선 그가 사정없이 떨리는 제 손을 거둬들인 채 그녀의 가슴 위로 귀를 가져갔다.

눈을 감고서 미렌의 심장 소리를 듣는 라이언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숭고했다.

쿵.

쿵.

쿵…….

심장이 약하게 뛰고 있었다.

자칫 시끄러웠다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심장 소리였다.

라이언은 제 숨소리에 그것이 가려질까 두려워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끊어질까 두려웠다.

그 미약하다 못해 죽어 가는 심장 소리가, 사자의 숨마저 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

움찔…….

새끼손가락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미렌은 잠에서 막 깨어나 몸이 몹시도 무거울 때면 그런 식으로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에게 몸이 붙들렸다.

뼈만 남은 제 몸과 달리 상대의 몸집이 몹시도 커서 순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것을 막아 준 건 자신을 껴안은 이의 손이었다.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싼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향기였다. 미렌은 짧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라이언.”

“…….”

“라이언?”

저를 껴안은 체구가, 그의 향기가, 그리고 뒷머리를 감싼 손마저 라이언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대답이 없었다.

불안해진 미렌이 문득 눈을 떴다.

라이언의 얼굴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잠시 그의 어깨를 밀었는데 오히려 그녀는 팔을 든 그대로 품 안에 갇혔다.

라이언이 강하게 당겨 그녀를 끌어안은 탓이다.

“라이언, 잠깐만요. 왜…….”

조금이라도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밀어 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포기한 채 품 안에서 눈만 굴리던 미렌은 그제야 제 방 안의 풍경을 확인했다.

방이 엉망이다 못해 참혹했다.

테이블은 뒤집어진 채 다리가 부러져 있었으며, 카펫은 난도질되어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바닥에는 위험해 보이는 유리 조각들이 곳곳에 널렸다.

그것을 깨달은 미렌이 다급하게 라이언을 밀어 댔다.

그러나 그는 제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도무지 그러고선 버틸 수 없다는 듯 오직 미렌을 껴안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라이언.”

“…….”

“풀어 주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움직여도 그가 풀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미렌은 결국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 대신 짧게 기침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목이 마릅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서요.”

그러자 놀랍게도 그 순간 라이언이 그녀에게서 팔을 떼어 냈다.

아무래도 물을 가져오라 말하려는 듯 시종들을 향해 돌아서려는 라이언을, 미렌이 먼저 붙잡았다.

팔이 붙잡힌 라이언은 그 조그만 힘에도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다.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라이언이 이끌려 왔다.

미렌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방 안이 왜……, 라이언?”

“…….”

“어째서…… 울고 있습니까?”

방 안만큼이나 그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무감각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침대 자락을 적셨다.

몸을 일으킨 미렌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서 라이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양 뺨을 손에 쥐었다.

“……미안해요.”

“당신이…… 죽는 줄 알았어.”

“미안합니다, 라이언…….”

“이대로 내 곁을 떠나는 줄 알았다고.”

얼마나 숨을 참고 있었을까.

라이언으로부터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그 숨마저 거칠게 떨리고 있어서, 미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눈을 내리감은 라이언이 손을 들어 제 볼을 감싼 미렌의 손등을 뒤덮었다.

그녀가 제게서 손을 떼어 내지 못하도록 막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던 미렌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며 엄지로 둥글게 그의 뺨을 매만졌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밤에 오겠다고 했었잖아.”

푸르스름했던 방 안으로 밝은 햇빛이 들어왔다가,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바깥의 날씨가 유달리 흐려 구름이 많은 탓이었다.

미렌은 햇빛이 들어올 때면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속상해했다.

라이언의 얼굴에 실금 같은 상처가 나 있었다.

몹시도 얕은 상처라 이미 피가 말라붙어 있었지만,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은 오늘 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했다.

엄지로 그것을 문지르던 미렌이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미렌.”

꼭 미렌이 그랬던 것처럼 라이언도 한 손으로 그녀의 한쪽 뺨에 손을 올렸다.

감싸 쥔 그의 손은 아직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녀가 일어나지 못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저 어찌할 수 없는 병마가 상황을 이리 만든 것이다.

분노인지, 혹은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라이언은 그저 자신의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당신이…… 이토록 오래 자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

“……예?”

“잠은 당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지?

라이언의 굳은 두 눈이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 질문의 기저에는 미렌을 탓하고 싶지 않다는 라이언의 속내가 깔려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이 몹시도 초조했다.

눈을 마주하던 미렌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라이언…….”

미렌이 대답하는 순간 라이언이 웃었다.

그의 웃음에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을 피해 버렸던 그녀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방 안으로 햇빛이 들이닥친 탓이다.

내부가 밝아지자 침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그제야 라이언의 떨어진 한 손에서 핏물이 뚝뚝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다급해진 미렌이 그의 반대쪽 팔을 당겨 제 눈앞으로 가져왔다.

제법 심각해 보이는 상처에 눈썹을 찌푸린 미렌이 어서 피를 닦으며 저 멀리 서 있는 주치의를 불러냈다.

일련의 광경을 보던 라이언은, 한 번 더 웃었다.

사자는 아직 제 목에 채워진 목줄을 확인했다.

그 목줄이 제 목을 조이고서야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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