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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20)화 (20/133)

동이 트기 전에

“……워라.”

“어서!”

눈을 뜬 순간 명치 부근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분명 몇 시간 전 남자에게 얻어맞은 위치였다.

배를 부여잡은 그녀가 겨우 초점을 잡아 갔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농사나 짓고 살아가는 프레니티 영지라기에는 너무도 화려한 곳이라 미렌은 순간 그곳이 다른 영지인 줄 알았다.

“드디어 일어났군. 팔자도 좋지. 이런 곳에서 잠이 들 생각이 나긴 하더냐?”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뒤에 젊은 시녀 몇 명이 고개를 깊숙이 조아린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조잡한 편이긴 했지만 형식이 그녀가 아는 귀족들의 집 같기는 했다.

힐끗 제 손을 내리자 평민들이나 입는 튜닉 따위가 아니라 하늘거리는 재질의 옷이 입혀진 것도 보였다. 누군가 옷을 갈아입힌 것이다.

“네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란다.”

“……보상이 이겁니까?”

“그럼. 예쁨만 받을 수 있다면 결혼도 할 수 있겠지. 남작 부인이 되는 거란다.”

결혼? 그 터무니없는 제안에 미렌은 헛웃음마저 나왔다. 대체 어느 귀족이 이런 방식으로 결혼을 추진한단 말인가?

거기다 더 우스운 건 저 시녀장이라 불리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녀는 전혀 미렌을 ‘미래의 남작 부인’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수하쯤 되는 시녀로나 봤을까.

“보상을 주는 사람의 태도가 봐줄만 하네요.”

“네깟 게 이런 기회를 함부로 얻을 수 있을 줄 아느냐? 건방지긴.”

여자는 꼭 자신이 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 꼴을 보던 미렌이 픽 비웃었다.

“웃음이 나오나 보구나.”

시녀장이 손을 뻗어 미렌의 턱을 확 잡아 들었다.

강제로 고개가 올라간 채 눈을 마주하게 된 미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영주님을 가장 지척에서 모시고 있는 게 나다. 이게 무슨 말인진, 너도 잘 알고 있겠지.”

“…….”

“겁나지 않니? 이제 와 후회가 되지는 않아?”

눈동자를 굴리자 방 한쪽을 지키고 선 기사 두 명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오늘 낮에 미렌의 배를 발로 찬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보여 주겠다던 지옥이 이것인 모양이었다.

그사이 시녀장이 미렌의 턱을 잡았던 손을 거칠게 떼어 내며 시녀들에게 턱짓했다.

“영주님의 방으로 데려가거라. 아, 함부로 반항은 안 하는 게 좋을 게다. 기사들이 영주님의 방 앞을 밤새도록 지킬 테니까.”

“……좋은 충고네요.”

“그럼.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하렴.”

소름 끼치는 웃음을 건넨 시녀장을 뒤로한 채 미렌은 시녀들의 떠밀림에 의해 복도를 걸어가야만 했다.

몇 걸음 뒤에서 방에 있던 기사 둘이 따라오는 것도 느껴졌다.

걸을 때마다 발치에 걸리는 옷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미렌은 제 옷을 한 번 추스를 뿐, 잠자코 걸어가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제 팔을 붙잡은 시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무엇이죠?”

“여기 고용인들은 다들 수도에서 오신 건가요?”

팔을 붙잡은 두 명의 시녀들 사이로 기묘한 눈빛이 오갔다.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있음을 안 미렌이 그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마을 분들은 아니신 것 같고……. 처음 뵙는 분들이어서요.”

“알려 드릴 게 없군요. 도착했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세요.”

시녀들은 모두 젊은 편이었다.

마을에서 고용했다기에는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수도가 있는 북쪽에서 왔다기에는 말투가 이상했다.

두 개의 몸으로 살며 양쪽 지방의 말투를 모두 다 알고 있던 미렌의 귀에는 이상하리만치 어색한 어조였다.

“영주님, 들여보내겠습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등 뒤로 손이 닿아 오며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고작 시골 영주의 방답지 않게 무척이나 화려했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해 둔 것 같은 모습에 미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프레니티 영지에서 나오는 돈으로 이 정도 부를 쌓을 수는 없을 텐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렌이 방 안을 둘러보고 있느라 가만히 서 있자 누군가 침대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육중한 몸의 영주였다.

“왔느냐?”

미렌이 눈만 끔뻑거리며 보고 있자 영주가 선한 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이리 오너라. 착하게 굴면 네가 원하는 걸 쥐여 주마. 으응?”

그의 손짓에 미렌은 순순히 걸어 영주의 앞까지 갔다.

폐까지 살이 찐 건지 숨조차 쉬기 벅차 보이는 영주가 가만히 서 있는 미렌을 향해 실실 웃어댔다.

“착한 아이구나. 이리 말을 잘 듣고.”

“보상은요?”

“으응?”

“보상을 준다고 데려오셨잖습니까.”

기묘한 대화였다.

갈아입혀진 옷과 더불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미렌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보상이라는 이야기에 영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보상. 그래, 보상. 무엇이 필요하니? 보석, 아니면 금화?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렴.”

히죽 웃은 영주가 살이 찐 손을 들어 미렌의 팔뚝을 잡아 왔다.

그가 그녀를 당겨 제 품으로 껴안으려는 순간이었다.

“시골 영주면, 남작쯤 되려나.”

“아악!”

미렌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미렌이 가볍게 발을 놀려 영주의 급소를 걷어찼다. 방심하고 있던 영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까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기사, 기사들을 불러와라!”

“영주님이 그렇게 대단한가?”

난 잘 모르겠는데.

반평생을 공작가의 유일한 영애로 태어나 살았던 미렌이 고개를 기울였다.

고작해야 남작, 거기다 시골 귀족은 그녀의 기준에서 몹시도 소박한 계급이었다.

그사이 강한 충격을 받은 영주의 얼굴이 붉다 못해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미렌은 잠깐 발을 떼었다가 한 번 더 급소를 향해 퍽, 거세게 차 냈다.

얻어맞은 영주가 다리 사이를 부여잡은 채 침대 바닥을 굴렀다.

그것을 뒤도 돌아보지 않은 미렌은 그대로 방 한편에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고 밖을 보니 막 저녁이 되었는지 해가 진 채였다.

아래를 훑어보니 고작해야 2층이었다.

미렌은 고민하지 않고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여자가 탈출했다!”

뛰어내리자 등 뒤에서 영주의 비명을 듣고 방으로 쳐들어온 기사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미렌은 바닥에 내려와 한 바퀴 구르며 충격을 완화했다. 어릴 때부터 험한 산을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바닥에 착지한 미렌은 저택을 두른 높은 담을 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사이 저택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장, 잡아 와! 도망친 여자를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라!”

“예!”

저 멀리 키가 큰 나무 하나가 보였다.

당장 그 앞까지 달려간 미렌은 고민하지 않고 나무를 올라타기 시작했다.

“저쪽에 있다!”

목소리가 들려오자 미렌의 몸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가벼운 몸 덕분에 손쉽게 나무 위에 올라간 미렌은 그대로 담장을 향해 팔을 뻗어 매달렸다.

이윽고 그 높다란 담장을 넘어갔다.

아래가 수풀이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온갖 나뭇가지에 피부가 쓸려 따끔거리긴 했지만 그것을 무시한 채 다시 일어났다.

영주의 저택 근처에서 조금만 달려가면 바로 그녀의 집이었다.

그곳을 목표로 한 미렌이 숲길을 헤쳐 나갔다.

이미 거의 해가 진 데다 나무가 우거져서 주변이 기묘할 정도로 어두웠다.

“아직 이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다! 흩어져서 찾아!”

가까운 곳에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집이 작아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던 미렌은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커다란 돌 뒤로 몸을 숨겼다.

저벅, 저벅.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고 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돌에 딱 붙어 있자 기사들이 그곳을 지나갔다.

그 뒤로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됐다.

움직이려고만 하면 넓게 흩어져 찾고 있는 기사들의 소리가 들려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몸을 숨겨야만 했다.

“망할, 여자도 안 보이고. 이미 이 근처를 빠져나간 거 아니야?”

“찾는 척이라도 해. 그냥 돌아갔다가 누구 한 명 죽어 나가는 것보다는 낫지.”

“밤새도록 뺑이 치게 생겼네.”

투덜거리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그들의 바로 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미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탈출이 쉽지가 않았다.

이 숲길만 빠져나가면 논과 밭이 나오는 터라 그 근처에 사는 마을 사람 아무한테나 숨겨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데,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에 가기는 한대?”

“그거야 모르지. ……다고는 하던데.”

두 사람이 지나가자마자 또 다른 기사 두 명이 주변을 지나갔다.

결국 소리 없이 한숨 쉰 미렌은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아무리 기다려도 기사들의 목소리나 인기척이 주변에서 들리지 않았다.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미렌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드디어 기사들이 철수를 한 모양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숲길을 내려갈 수 있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래로 내려가던 미렌이 문득 멈춰 섰다.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그 순간, 멈춰 선 그녀의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떠 버린 아침 해가 그녀의 머리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밤에 다시 오겠습니다…….’

자신이 라이언에게 했던 약속.

저 멀리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 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미렌이 밤새 긴장하느라 지쳤던 것도 잊은 채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이언과 결혼한 뒤 8년. 그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밤을 지새운 적이 없었다.

잠들기 직전 그의 불안한 눈빛이 잔상이 되어 남았다.

어쩌면, 어쩌면 라이언이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리의 힘이 풀려 꺾여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마을과 동떨어진 그녀의 집이 보였다.

미렌이 겨우 현관문을 열고 구르듯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간 미렌이 그대로 쓰러졌다.

엉망이 된 옷가지와 팔다리, 밤새도록 숲에 숨어 있느라 흙과 나뭇잎으로 더러워진 몸.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미렌은 그대로 문 앞에서 쓰러져 내렸다.

제 집에 들어오자 그만 안심이 되어 버린 미렌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침부터 누…… 미렌?! 미렌! 이게 무슨 일이니!”

눈을 비비며 나온 어머니가 뒤늦게 그녀의 몸을 흔들었지만, 미렌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뒤였다.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아무리 몸을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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