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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9)화 (19/133)

멀어져 가는 당신에게

떠밀리듯 짐차에 넣어진 탓에 나무 바닥을 구르다 부딪친 손바닥이 유난히 따가웠다.

손을 들어 살피자 손바닥 정중앙에 얇은 가시 하나가 박힌 게 보였다.

손톱으로 그걸 겨우 뽑아냈다.

그사이 짐차가 출발하며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 미렌이 문 쪽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조그만 손으로 몇 번이고 벽을 두드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영주님께서 널 구해 주셨다. 보상을 주려는 거니, 가만히 있도록.”

“보상 따위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촌장님을 찾아간 겁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짐차의 문에는 나무판자 사이로 미약한 틈이 있었다.

그녀가 그곳에 얼굴을 들이밀며 간절하게 부르짖었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연로하신 촌장님께서 쓰러진 게 더 걱정되었다.

거기다 이대로 가다간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성으로 가게 될 터였다.

“……하아.”

미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리던 그녀는 결국 흔들리는 짐차에서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문틈 사이로 눈을 갖다 대자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도 익히 아는 산속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 미렌이 짐차의 벽을 향해 온몸을 부딪쳤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렸지만 낡은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한 번 더 어깨로 들이박았다.

겨우 쩌적, 하는 소리가 들리며 금이 가자 그 부분을 노려 발로 힘껏 걷어찼다.

“이게 무슨……!”

“여자가 탈출했다!”

부서진 벽 사이로 조그만 몸을 구겨 넣어 쏙 빠져나온 미렌이 땅바닥을 한 번 크게 굴렀다.

바닥에 부딪힌 부위가 유독 쑤셔 왔지만 가만히 있을 새가 없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자 말을 탄 기사 몇 명이 쫓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미렌은 길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숲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말이 들어오기엔 나무가 많아서 복잡한 곳이었다.

“윽,”

벽에 부딪힌 데다 바닥을 크게 구른 오른쪽 어깨는 탈골이라도 되었는지 유달리 통증이 올라왔다.

어깨를 부여잡은 그녀는 미세하게 다리를 절뚝이며 최대한 속도를 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저들보다는 자신이 이 숲속에 대해 잘 안다는 점이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몸을 숨길 만한 동굴 하나가 있었다.

거기까지만 가자. 며칠만 숨었다 나오면 잠잠해져 있겠지.

그렇게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이년 봐라.”

“……!”

눈 깜짝할 새에 머리채가 붙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갑주를 입은 기사 한 명이 기고만장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렌이 머리카락을 붙잡히고도 고요히 그를 노려보자, 기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감히 날 노려봐?”

“……놓으십시오.”

“하! 말하는 것만 보면 어디서 교양이라도 배운 줄 알겠군. 그러면 놓아줄 것 같으냐?”

남자가 미렌의 머리를 한 번 더 단단히 고쳐 쥐자 뒤통수에서 격렬한 고통이 올라왔다.

그녀가 눈을 찌푸림과 동시에 기사의 뒤에서 동료가 그를 불러 왔다.

“잡았으면 어서 데려와! 영주님께서 기다리신다.”

“기다려 봐, 이년이 지금 내 앞에서 반항을……!”

“이거 놓으라고 했습니다!”

거칠게 반항하던 미렌은 결국 그의 얼굴을 힘껏 주먹으로 쳤다.

고개가 돌아간 기사가 느릿하게 눈을 돌리더니, 입가를 부들부들 떨었다.

이윽고 배에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가 발로 걷어찬 것이다.

순간적인 고통에 배를 감싸자 뒤이어 뒷목을 내리치는 게 느껴졌다.

점멸하는 시야와 더불어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점점이 들려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 봐. 네년 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

***

“……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미렌이 이불을 움켜쥔 채 일어나 앉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직 한낮인 창문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불이 구겨지도록 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어 내려다보자 뼈만 남은 손이 보였다.

기절했구나.

깨달은 순간 이가 악물렸다.

걷어차인 배와 얻어맞은 뒷목에서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방금 전 일어났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초조하게 침대를 두드리던 미렌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아에게 수면제를 부탁해 다시 잠들 요량이었다.

반대편 몸이 걱정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 거기 있는가?”

“…….”

“마리아!”

보통 때라면 마리아가 아니더라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종이 대신 들어왔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들어오는 이가 없었다.

밖에 나가야 할까.

황후가 낮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또 소문이 돌 텐데.

고개를 숙인 미렌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할 때였다.

그녀의 귓가로 육중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반색한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마리아, 잘 왔네. 지금 당장 수면제를……!”

“……수면제?”

당연히 마리아인 줄로만 알았다. 이 시간에 시종들을 제외하고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없는 탓이다.

그런데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라이언이 서 있었다.

성큼 다가온 그가 침대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라이언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면제라니, 미렌.”

“……폐하.”

“폐하라 부르겠다는 건가? 그래. 황후, 방금 전 말한 수면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고하라.”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매일 밤, 그가 자신을 기다리느라 초조해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병으로 인해 잠든 이를 함부로 깨울 수도 없어 그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도.

그런 이의 앞에서 수면제를 말했다.

그가 당장에 불같이 화를 내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미렌으로 인해 둘 사이에는 무거운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라이언이 낼 화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느라 아래로 내려갔던 시야에 문득 라이언의 힘줄이 솟은 손이 보였다.

그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서로가 말없이 있은 지 몇 분이 지나간 뒤였다.

“라이언……?”

천천히 그가 서 있을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이불자락이 점점이 젖어 드는 게 보였다.

놀란 미렌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이 무감각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의 가라앉은 표정 위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이언의 손이 떨리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 얼마나 격한 감정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언.”

“…….”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가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 미렌이 침대에 앉은 채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들었다.

핏줄이 솟아난 손등 위로 이마를 기대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가……. 제가 실수했습니다.”

“……미렌.”

목덜미에 뜨거운 호흡이 닿아 왔다.

이제껏 가만히 서 있던 라이언이 움직여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다.

허리를 굽힌 채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감싼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

“기다리는 나를 두고…….”

수면제를 먹겠다는 그녀를 보고도 라이언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애처롭고도 안쓰러워서 미렌은 손을 뻗어 등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라이언의 떨리던 몸이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미렌의 뼈만 남은 어깨에 눈을 묻은 라이언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꼭 그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라이언은 미렌의 품에 안긴 채 한참을 떨었다.

“설마, 이제껏 당신이 깨어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니요. 수면제는 한 번도 복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방금 전은 단지……. 단지 몸이 좋지 않아서.”

“몸이 좋지 않아서 잠에 들려 했다고?”

아직까지 미렌의 어깨에 눈을 묻고 있던 라이언으로부터 묘하게 추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미렌의 품에서 벗어났다.

“당신의 입에서 수면제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어.”

“……라이언.”

“죽으려는 건가? 또다시, 나를 두고 가려는 건가. 이곳에 나만 내버려 둔 채……. 그렇게 도망가려는 건가.”

절망에 찬 그의 목소리에 미렌이 이불자락을 꾹 움켜잡았다.

저쪽 일이 급해 미처 미렌 에드가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생각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라이언을 보면서 깨달았다.

라이언을 이렇게 두고 가는 건 그에게 못할 짓이라는 것을.

가게 되더라도 이렇게 가면 안 된다는 것을.

두고 갈 라이언을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이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비록,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제가 먼저 이 삶의 끈은 놓지 않겠다고.

“제가 먼저 이 삶을 놓아 버리진 않을 겁니다.”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그래야만 해.”

“약속할게요.”

“이제는 내가 못 버텨. 당신이 나를 거절했다간, 내가 버티지를 못해…….”

미렌의 품에서 벗어났던 라이언이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짚은 채 올라왔다.

그는 그대로 집어삼키듯 그녀를 제 팔 안으로 당겨 안았다.

미렌의 뒷머리로 라이언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불안해하는 라이언을 위해 잠자코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던 미렌은 문득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꼭 누군가 자신을 거칠게 흔드는 것처럼…….

“윽…….”

“미렌?”

짧은 신음에도 라이언이 놀라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 왔다.

자신이 머리를 만진 탓이라 생각하는 건지 이미 조심스러웠던 손길이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라이언이 당장에 의원을 불렀다.

밖에 서 있던 시종이 다급히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라이언은 그것도 참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미렌을 안은 채 의원에게 가려 했을 때였다.

“……라이언.”

“아무 말도 하지 마. 당신, 지금 몸이 좋지 못해.”

“그저 잠이 들려는 겁니다.”

미렌은 본능적으로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이 당장에라도 잠들기 위해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몰려오는 수마를 겨우 떨쳐 낸 미렌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밤에.”

“……미렌?”

“밤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미 눈이 감겼다.

그녀의 모습이 꼭 죽어 가는 것만 같아서, 라이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꼭이요, 라이언.”

“일어나, 미렌.”

몰려오는 불안감에 라이언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잠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렌의 고개는 툭, 아래로 떨어졌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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