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는 토끼가 산다더라
“그게 무슨, 절 언제 보셨다고 그러십니까?”
“몰라서 묻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길게 늘어진 치맛단을 꾹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천 조각이 감기며 뼈마디가 불거진 손이 가려졌다.
손이 떨리는 것을 막으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헤겔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가 창문가로 다가서자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며 커튼 자락이 흩날렸다.
헤겔의 어깨 뒤에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얼마 전 아르테미스를 찾을 때 같았다.
창문턱을 짚은 헤겔이 고개를 들어 유난히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미렌은 숨을 죽인 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봐야만 했다.
“달에는 토끼가 산다더라.”
미렌 에드가의 눈동자는 에메랄드빛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에드가 공작 부인으로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시종들은 그녀의 눈을 두고 그렇게 불렀다.
해골에 보석을 붙여 놨다고.
그러니 헤겔이 갑작스레 언급한 토끼 따위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
그가 언급한 토끼와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찾으러 갔다가.”
“…….”
“그곳에서 웬 토끼 한 마리를 만났는데.”
거기까지 말한 헤겔이 뒤돌아섰다.
창문턱으로 두 팔을 뻗어 지지한 그는 씩 웃으며 미렌을 바라보는 채였다.
그의 보랏빛 눈을 마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몸으로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픈 건 미렌 우드가 아니라…… 너였어?”
한때는 둘 중 하나가 꿈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현실에 연약한 생을 마감하려 든 적도 있었다.
꿈, 두 개의 삶.
이것은 미렌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꼭 헤겔이 와 닿지 않던 두 개의 삶을 이어 주는 매개체 같기도 했다.
두 몸으로 그를 마주하고서야 깨달은 점도 있었다.
나의 현실은, 두 가지구나.
“하루는 일어났는데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뭐?”
“아십니까? 새끼손가락 하나를 드는데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돌이라도 드는 것처럼 힘겨운 기분을요. 얕은 바람이라도 불면 누군가 내 온몸의 뼈를 저미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어요.”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절망했다.
목 위를 간신히 움직이며 시녀들을 불렀지만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두려워 온 얼굴이 더러워지도록 눈물을 흘렸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렌은 잠을 잤다.
미렌 우드가 되어 다시는 잠들지 않기 위해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다.
그건 악몽이야. 현실이 아니야.
그렇게 되뇌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그 무거운 몸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나이프를 목에 가져다 대었다.
악몽을 끝내려면 죽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으니까.
“제게는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
“곧 죽을 몸입니다. 헤겔 씨, 모른 척 눈감아 주세요.”
부디.
그 순간 창문이 활짝 열리며 거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순간적인 바람에 미렌의 몸이 휘청거리자 헤겔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뼈만 남은 몸이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려온 헤겔이 미렌의 허리를 받치자 미렌이 끊어졌던 말을 이었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
“고작 바람에도 뼈가 저미는 고통이 느껴진다 한탄한 주제에 무슨 말이야? 되었어. 잠깐 이러고 있어.”
“약속해 주세요, 비밀로…….”
“알겠어! 어차피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 없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야, 토끼?”
알겠다는 한마디에 미렌은 마음을 놓았다.
그러자 미뤄 두었던 잠이 쏟아지며 눈이 감겼다.
그녀를 안아 든 헤겔이 얼굴을 구긴 채 몇 번이고 미렌을 불렀지만 이미 내려앉기 시작한 눈꺼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그녀로부터 고른 숨이 흘러나왔다.
몸의 힘이 풀리자 헤겔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넣고 안아 들었다.
그러자 가볍다 못해 뼈만 남은 미렌의 무게에 헤겔은 잠시 놀랐다.
헤겔은 얄팍해 보이는 몸과 달리 핏줄이 솟은 팔로 가볍게 그녀를 침대까지 옮겼다.
미렌을 침대에 내려 두고서야 그녀의 광대가 불거진 얼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또 도망쳤네.”
누가 토끼 아니랄까 봐.
***
눈을 떴을 때에는 밖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눈곱이 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이 씻기 위해 방 한쪽에 마련된 화장실로 들어갔다.
“……진짜 안 건가.”
칫솔을 물다 말고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토끼 이야기를 하던 헤겔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궁금했다.
그가 지나가듯 말했던 두 개의 마나인지 뭔지를 보고 알아낸 건가.
그러면 모든 마법사들은, 두 미렌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건가?
하나의 궁금증이 떠오르자 꼬리를 물듯 연이어 다른 질문들이 솟아났다.
그건 다음번에 눈을 떴을 때 헤겔에게 물으면 되니 미렌은 생각을 그만하고 어서 나갈 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당장 할 일이 많았다.
미렌이 시장에 갔다가 사 온 새 양말을 신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마을에 좀 다녀올게요.”
“이렇게 아침부터?”
“촌장님을 봬야 할 것 같아서요. 저 빼고 식사 먼저 하세요.”
“밥이라도 먹고…… 미렌!”
헤겔보다도 급한 건 먼저 프레니티 사람들이 테룬 공국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정황상 라이언의 서류를 보았을 때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럼 촌장님밖에 없다는 건데…….
촌장님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마을까지 가려면 꽤 넓은 밭과 논을 넘어 짧은 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다.
논을 지나며 오랫동안 얼굴을 알아 온 마을 사람들이 미렌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미렌, 어디 가니!”
“마을에요!”
“마을에? 이렇게 아침부터!”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이따가 아저씨 밭으로 오너라! 감자 좀 나눠 주마!”
논이 워낙 넓어서 이야기 한번 나누려면 서로 큰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미렌이 알겠다는 듯 크게 손을 흔들자 아저씨가 어서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분명 좋은 사람들이었다. 약탈과는 거리가 아주 먼.
미렌은 촌장님 댁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굳어졌다.
중간에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겨우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이들이 갑자기 테룬 공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리가 없다.
도착한 집 앞에서 미렌이 조심스레 나무 손잡이를 잡고 대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계세요?”
워낙 작은 마을이라 주민들끼리 모르는 얼굴이 없었다.
촌장님도 대부분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는 편이라 미렌이나 마을 사람들에겐 아무리 촌장님이라 하더라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였다.
끼익.
대문 안쪽이 열리며 안색이 좋지 못한 할아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최근 들어 촌장님의 건강이 나빠졌다더니 얼굴색이 까맣게 죽어 계셨다.
“미렌?”
“예, 저 기억하세요?”
“그럼. 저 산 아래에 복숭아 키우는 우드네를 모를까. 들어오려무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막 나무를 만지고 계셨는지 아직 다듬지 못한 나무들이 가득했다.
촌장님은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셨다.
주방으로 들어갔던 촌장님이 이가 다 빠진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담아 건네셨다. 몸에 좋은 약초 몇 가지를 달인 물이었다.
“무슨 일이니?”
“저……. 우리 마을이 곧 테룬 공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자꾸 나는 게야. 누구한테 들었니. 응? 내가 혼쭐을, 쿨럭.”
“천천히 말씀하세요, 할아버지.”
쉰 소리가 나며 할아버지께서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할머니를 잃고 혼자 지내신 지 오래된 분이라 건강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가간 미렌이 그의 굽은 등을 조심스레 두드려 주었다.
그가 겨우 기침을 멈추고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촌장님이 옆으로 길게 누인 나무 위에 앉으며 미렌에게도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럼, 정말 아닌 건가요?”
“……나도 그 소문을 듣고 마을 대표로 영주님을 만나러 간 게 일주일 전이었단다.”
프레니티 영지에도 영주님은 계셨다. 대부분이 테룬 공국 출신인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워로덴 제국인인 사람이었다.
영지는 넓지만 산이 대부분이라 실질적으로 마을은 작았기에, 마을과 관련된 모든 일은 촌장님이 처리하셨다.
그래서 미렌은 한 번도 영주님을 만나 뵌 적이 없었다.
“얼굴을 뵙기도 전에 쫓겨났지. 테룬 공국 놈 말은 들어줄 수가 없다더구나.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소문만 나서 마을 사람들 분위기만 흉흉해지고 말이다.”
“촌장님께서는 테룬 공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그랬으면 이미 저 산을 넘어 도망갔겠지. 쿨럭.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모두 20년 전에 다 떠났어. 이제 여기가 우리의 터전이란다.”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와 꼭 같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영주가 수도로 다른 보고를 올렸다.
영지에 관한 모든 보고는 영주를 거쳐 수도로 올라간다.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니, 관리가 허술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보를 얻은 미렌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갑작스레 촌장의 집 대문이 벌컥 열리며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헨리 부샤드는 들어라!”
연로하신 촌장님의 성함이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걸어온 기사 두 명이 허리가 굽은 촌장을 양쪽에서 강제로 연행하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미렌이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뇌물죄로 너의 보직을 이 시간부로 해제한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신고가 들어왔다. 영주님의 명령이니 잠자코 따르도록.”
촌장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자 입을 열었던 기사가 허리에서 장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손질된 검이 주름진 목에 닿았다.
“반항하느냐?”
“……아, 아니요. 따르겠소.”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미렌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믿기지 않아 입을 벌렸다.
프레니티 영지가 테룬 공국에서 워로덴 제국 소속으로 바뀌었음에도 20년 동안 촌장직을 맡아 왔던 할아버지께서 직위를 박탈당했다.
너덜거리는 대문 너머로 마을 주민 몇 명이 걱정스럽게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집을 둘러싼 기사들이 위협적으로 그들을 내쫓았다.
그러다 기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저 멀리 커다란 몸집의 누군가가 부서진 대문을 넘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영주님이었다.
“조잡하기 짝이 없구나.”
주변을 둘러본 그가 고급스러운 무늬가 음각된 나무 의자를 걷어찼다.
그러다 문득 영주가 구석에 서 있던 미렌을 발견하더니 히죽 웃었다.
영주가 촌장님을 걷어찬 건 그때였다.
“네 이놈, 촌장이라는 직위로 젊은 여자를 탐하다니! 그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놈을 감옥에 수감하고 저 여자를 구해 주거라!”
순간 미렌이 멈칫한 사이 기사들이 그녀의 양팔을 잡아채었다.
걷어차여 바닥을 구르시는 촌장님을 돌아볼 새도 없이 그녀는 기사들에게 붙잡혀 끌려가야 했다.
“성으로 돌아간다.”
난데없이 붙잡힌 미렌은 짐짝처럼 짐차로 들이밀어졌다.
그녀가 짐차의 바닥을 구르는 사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짐차의 문이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