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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 (17)화 (17/133)

토끼는 육식 동물이다

미렌의 질문에 주방에는 순간 정적이 돌았다.

정작 질문을 받은 이들이 답을 하지 못해 머뭇거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눈치만 주고받자 미렌이 그들 중 한 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툭.

어깨를 잡힌 시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은 사실 어깨를 쥐었다기보다는 그저 얹었다는 게 옳을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묻고 있잖은가. 신하들이 나를 폐위하라 읍소를 하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아, 아아, 아닙니다! 전하,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시녀들은 모두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미렌이 그것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뒤에 있던 마리아가 한 걸음 나섰다.

마리아가 아는 황후는 단 한 번도 아랫사람들을 혼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무엇 하나를 할 때마다 자신 때문에 고생시켜 미안하다며 종종 사과를 해 오기도 했다.

그리 착한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황궁에는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법도가 존재했다.

미약하고 선한 분이시니 마리아가 그 직책을 대신할 참이었다.

마리아가 한 걸음 나선 순간 제 앞에 있는 이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네들의 죄에 대해 물은 게 아니네. 다시 한번 묻지. 그런 이야기가 궁에 떠돌고 있나?”

“…….”

“어서.”

‘어서.’ 그 한마디에는 묵직한 명령이 담겨 있었다.

비록 생기 없는 얼굴로 시녀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였지만 눈만큼은 생생했다.

누구보다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영애이자 한 명의 황후다웠다.

미렌이 대답을 기다리자 이윽고 그중 한 명으로부터 조그만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리아가 미처 그들을 나무랄 새도 없었다.

“저, 저희는 높은 분들의 이야기는 직접 듣지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궁에 떠돌고 있습니다…….”

“……전하, 나머지는 제가 다시 교육을 하겠습니다. 불온한 말에 귀 기울이지 마소서.”

아랫입술을 깨문 마리아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유명한 이야기였다. 신하들로부터 황후를 폐위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모두가 쉬쉬하며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떠들지는 못했지만 이미 제법 많은 이들에게 소문이 퍼져 나갔다.

오로지 미렌만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자네들이 내 폐위를 읍소한 것도 아니잖나.”

미렌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그들의 말을 정정시켜 주었다.

비록 말투는 건조했지만 그 내용이 제법 따뜻해서, 시녀들은 그제야 제 앞에 있는 이가 못생겼지만 다정한 황후 미렌 에드가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잘못을 빌고 빠져나갈 수 있겠다.

그 생각이 든 순간부터 시녀들은 살며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허리를 잔뜩 굽혀 인사를 올렸다.

“전하, 다시는 입을 가벼이 놀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

“예……?”

그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사실 제법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애초부터 그녀가 건강한 몸으로 들어오지 못했기에 당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어쩌면 당장 내일 그녀가 죽는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이들은 없을 터였다.

끊어지지 않는 기침을 달고 사는 데다 혼자 걷는 것도 힘들어 부축을 받는 황후였으니 이미 죽음은 목전까지 다가오고도 남았다.

매일 밤이, 그녀에게는 고비였다.

“마리아, 이들이 나의 죽을 날을 고대하지 않았나?”

“예, 전하.”

“얼마 가지 않아 내가 죽는다면, 이들을 조사하게. 황족 시해죄는 중죄에 해당하니.”

“전하!”

나직한 한마디에 시녀들의 몸이 덜덜 떨렸다.

황족 시해는 반역에 해당한다.

만일 미렌의 말대로 정말 내일 당장이라도 황후가 죽는다면 그녀들은 3대가 반역자로 몰릴지도 몰랐다.

그제야 눈앞이 깜깜하게 변했다.

자신들이 건든 이는, 다정하고 멍청한 황후가 아니라 평생을 고귀한 여인으로 살아온 미렌 에드가였던 것이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흐윽, 한 번만,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전하.”

“잘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흑.”

결국 그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비벼 가며 잘못을 비는 이들을 미렌은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미렌 에드가.

병약하고 못생겨 8년을 죽은 듯 지내었던 황후가 살아 있었다.

방에서 나오지 않아 귀신이라 불렸던 황후가 살아났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전하께서 그리 차갑게 말씀하시는 것은 처음 뵈었습니다. 혹여 마음에 담아 두셨을까 하고…….”

방으로 돌아가는 미렌을 뒤따라 복도를 걷던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걱정을 올렸다.

미렌은 제 뒤를 힐끔 보았다가 다시 벽을 짚은 채 천천히 걸어가며 대답했다.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데 어찌 못 들은 척 넘겨.”

“……후에도 제가 따로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결국 미렌은 당장 아무 벌도 주지 않은 채 넘어갔다.

아마도 어린 그들은 그게 얼마나 아량 넓은 용서였는지 조금도 알지 못할 터였다.

대신, 적어도 몇 달 동안은 황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두려움에 떨겠지.

이번 기회를 삼아 우습게만 보았던 상전을 제대로 모시려 들 것이다.

마리아는 흉한 소문이 돌지 않는 선에서 그들을 반성하게 한 미렌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자네들에게 언제나 고마워.”

“……네?”

“몸이 약한 탓에 다른 이들에 비해 수배나 더 신경을 써야 하잖나. 내가 잠든 사이 마리아가 몇 번이고 창문을 열었다 닫는 것도 알고 있고, 다른 시종들이 부족한 나의 영양분을 챙기기 위해 온갖 약재와 수액을 가져오는 것도 아네.”

말을 길게 한 미렌이 결국 숨을 크게 내쉬며 잔기침을 반복했다.

콜록, 콜록. 거센 기침 사이로 쉭쉭 바람이 새는 소리가 나갔다.

상태가 좋다고 너무 오래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제 바로 눈앞이 방으로 돌아가는 문이었다.

주방의 문과는 달리 무겁고 두꺼운 황후의 침실 문은 이제 슬슬 팔이 바들바들 떨려 오는 미렌이 열기엔 벅찼다.

그래서 마리아의 시중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뒤에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해진 미렌이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마리아가 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마리아? 왜 울고 그래. 으응?”

“죄송합니다, 전하…….”

작게 웃은 미렌이 마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벌써 8년이었다. 마리아가 자신의 수발을 들기 시작한 지가.

처음 만났던 마리아는 아직 어린 시녀였고, 미렌은 인정받지 못하는 황후였다.

그리고 미렌이 마리아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 웃음을 보고서도 아무 변화가 없던 이는 마리아, 자네뿐이잖나.’

누군가는 얼굴을 찌푸렸으며, 또 누군가는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마리아와 함께 뽑혔던 시종들 중에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이는 마리아, 그녀 한 명뿐이었다.

“울지 마.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아.”

“……전하께서도 아름다우십니다.”

“하하.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미렌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만 들어가지. 새벽이 깊어졌으니 곧 잠이 들 것 같아.”

“예.”

“마리아,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지만……. 혹여나 누군가 자네를 괴롭히면 꼭 말하도록 해.”

아마 마리아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척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힘이 없는 자의 편에 섰다는 건 그런 이야기였다.

권력이 없는 황후의 곁이라는 건, 무척이나 버티기 힘든 자리니까.

그러니 미렌은 만일 자신이 이 생을 마감하더라도 마리아만큼은 꼭 지켜 주고 싶었다.

마리아가 묵묵히 문을 여는 사이 미렌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허수아비 황후라지만, 자네 한 명은 지켜 줄 수 있어.”

“이토록 다정하신 분이요?”

“그럼. 개싸움은 자신 있네.”

그 한마디에 마리아가 누가 들으면 어쩌냐며 눈을 크게 떠 왔다.

종종 황후는 평민들이나 쓸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 때가 있어서 놀라웠다.

“……다 괜찮으니 부디 건강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잔소리는 그만하고.”

마리아가 문을 열자 미렌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마리아는 미렌이 들어갈 때까지 문밖에서 몸을 반쯤 숙인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간 미렌은 당장 침대로 향할 생각이었다.

슬슬 몸이 무거워지는 게 잠이 들려는 신호가 분명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네?”

“이만 밖에서 기다리겠나?”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괜찮네.”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마리아가 물러가겠다며 문을 닫아 왔다.

끼익, 쿵. 문이 닫히는 그 찰나의 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미렌의 등줄기로 짧은 식은땀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방 안에 드리워진 사람의 그림자가 미렌의 발아래까지 길게 늘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미렌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입을 열었다.

어딘지 화가 난 것처럼 처음에는 목소리가 컸다가, 아직 밖에 있을 마리아를 생각해 바로 잦아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미렌의 빈 침대에 앉아 있는 이는 헤겔이었다.

처음 방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 있는 헤겔을 두고 얼마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당연히 비어 있으리라 생각한 방 안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깜짝 놀랄 만했다.

그런데 헤겔은 자연스럽게 미렌을 향해 검지를 입에 붙여 오며 비밀을 종용했다.

그래서 미렌도 마리아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말을 전한 것이었다.

문이 닫히자 씩 웃은 헤겔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

“안녕할 땝니까? 대체 누가 황후의 방에 함부로 들어옵니까?”

“내가.”

저 뻔뻔한 놈 보게.

험한 말이 나오기 전 숨을 들이켠 미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르게?”

“이르긴 누구한테 이릅니까?”

“밖에 사람 있잖아.”

“……마리아요? 괜히 여기 엮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알아.”

어쩐지 헤겔의 웃음이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깊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이었다.

헤겔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빨라 미렌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어 느린 미렌과 달리 헤겔이 가까워져 오는 속도는 차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안 말할 거잖아.”

“……예?”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다다른 헤겔이 미묘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렌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 봤지만 그 뒤엔 당장 그녀가 들어온 문이 존재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벽에 부딪친 미렌은 숨조차 멎은 채 헤겔이 내리는 고개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 순간, 헤겔이 입을 열었다.

“너, 나 알고 있지.”

헤겔의 보랏빛 눈동자가 길게 늘어졌다.

깊은 눈꼬리가 생기도록 웃은 헤겔이 몹시도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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